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역사기행] 제주의 향교를 찾아서 (3)

김창집 2005. 2. 19. 23:09

 

* 이 글은 '제주시'지 통권 제47호(2005)에 실린 것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대정향교(大靜鄕校)로 가는 길

 


* 대정향교의 모습

 

 현장 확인을 위해 대정향교에 가는 12월 5일 날은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제주의 향교들은 초창기에 왜 그렇게 하나같이 정착을 못하고 옮겨다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기록조차 부실하다 보니 답답하기까지 하다. 대정향교가 세워진 것도 역시 태종 16년(1416) 대정현을 설치할 때로 보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없는 상태이다. 성종 12년(1481)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성 가운데 있다',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은 옮겨서 동문 밖에 있다'고 했다.

 

 여기저기의 기록을 참조하여 볼 때 처음 지었던 곳은 대정현성 북쪽 안으로 여겨지며, 다음에 동문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서문 안으로 옮긴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규모가 어떠했는지 언제 어떻게 보수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고, 다만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1601) 10월 신사에 '북쪽에 있는 대정향교는 황폐하고 쓸쓸한 모양이 정의향교와 같다.'라는 것 정도이다. 지명은 다른 것은 거의 남아 있는데, 이상하게 향교에 대한 것은 없다.

 

 <남제주군의 문화유적>의 강창언에 의하면 '동문 밖으로 이전했다는 기록을 쫓아 현지 조사를 벌였으나 별다른 자료를 찾지 못했고, 성안 서쪽으로 옮겼다는 기록을 따라 조사를 하였으나 과수원과 주택들이 있어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리고 단산으로 옮긴 후인 1703년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대정현성 안의 건물 배치도를 보면 향교가 들어섰었을 만한 곳은 성의 '서남쪽 모퉁이'나 '서북쪽 모퉁이' 정도라고 추정하였다.
 
□ 옮긴 지 350년이 넘은 대정향교

 


* 대정향교 정문인 대성문

 

 지금의 대정향교가 단산(簞山)으로 옮긴 것은 효종 11년(1653) 이원진 목사 때였다. 대정향교라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대정현성에서 4㎞ 정도 떨어진 안덕면 사계리 3126 번지에 자리잡았다. 단산을 배경으로 하여 삼읍 향교 중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은 제주도향교재단에서 운영한다.

 

 대정향교는 이전 후 수 차례 중수와 개축을 하게 된다. 먼저 현종 10년(1669) 이인 목사 때 현감 조문혁(趙門赫)이 대성전을 중수했고, 숙종 14년(1688) 목사 이희룡(李喜龍)도 중수하였다. 그리고, 영조 28년(1772) 현감 이빈(李賓)은 명륜당과 전사청, 서재를 중건했으며, 헌종 원년(1835) 목사 이장복(李長復) 때 현감 장시열(張時悅)이 대성전을 중건하였다. 순조 때 현감 변경붕이 주자필을 본받아 명륜당이라는 액자를 게시하였고, 대정 훈장 강사공(姜師孔)은 유배 왔던 완당(阮堂)에게 청하여 의문당(疑問堂)이란 액자를 걸기도 했다.

 

 경내에는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5성과 공문 10철, 송조 6현, 신라, 고려, 조선의 18현을 봉안하고 있다. 강사공은 순조 11년(1811)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소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대성전 뜰에 심었는데,  팽나무는 살아 남았는데 비해 소나무는 한 그루만 남아 치료를 받으며 힘겹게 서 있다.

 


 

* 대정향교 의전당

 

 소장된 전적류(田籍類)를 보면 <대정향교절목> 등 18종 37권이 있고, 유교경전의 집주류(集註流)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적과 노비 등을 지급 받아 훈도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경장(1894)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고, 봄·가을로 석전제, 매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는 한편 문명학원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 제주 유형문화재 제4호

 

 대정향교는 1971년 8월에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담장 서쪽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는 대성문 현판 아래로 '대정향교'와 '성균관유도회 대정지부', 그리고 대정향교 문명학원 간판이 걸려 있다. 대성문 맞은편 동쪽 길가 울타리에 외문(外門)이 서 있는데, 역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판자문을 달고 있다.

 

 대성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의문당(疑問堂)을 만나게 되는데, 확인을 위해 방문했을 때는 콘크리트 건물을 헐고 새롭게 신축 중이었다. 남쪽에는 북향의 명륜당이 서 있는데 정면 5칸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전퇴 바닥은 현무암 판석을 깔았다. 후퇴는 개방되어 토방으로 사용되고, 중앙 3칸은 마루로 청방, 좌우방은 온돌 구조로 되어 있다.

 


 

* 대정향교 명물인 하나밖에 안 남은 소나무

 

 명륜당 오른 쪽에는 동재가 서 있는데, 정면 4칸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기단부에는 판석이 놓여 있고, 초석은 현무암을 원형으로 다듬어 놓은 뒤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명륜당 왼쪽의 서재는 정면 3칸에 역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초석은 동재와 달리 현무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놓은 뒤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명륜당 마당에서 대성전을 향하여 세 개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내삼문이 있다. 이 건축물은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는데, 원형 초석 위에 원형 민흘림 기둥을 했고, 중문 좌우에 협문을 두고 있다. 외문을 통하여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에도 협문을 두고 있는데, 합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조그만 협문이 또 있다. 원뿔형 초석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

 

 헌종 원년(1835)에 중건된 대성전은 완전히 헐고 1993년에 중건되었는데, 기단부, 초석, 가구(架構) 등에 못 쓸 부분은 버리고 새 재료를 써서 옛 건물을 본떠 지어졌다. 정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한 대성전은 기와도 육지부에서 생산되는 새 것으로 바꾸었다. 기단은 현무암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했는데, 초석은 현무암으로 되어 있고 원형인데 기둥은 원통형의 민흘림이다. 

 


 

* 뜯고 새로 짓는 의문당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제주시의 문화유적(1992) : 제주시·제주대학교박물관
제주도지(濟州道誌 1993) : 제주도
속탐라록(續耽羅錄 1994) : 제주문화방송
제주시의 옛 지명(1996) : 제주시·제주문화원
남제주군의 문화유적(1996) : 남제주군·제주대학교박물관
제주교육사(濟州敎育史 1999) : 제주도교육청
제주향교지(濟州鄕校誌 2000) : 제주향교
제주사인명사전(濟州史人名事典 2002) : 김찬흡(金粲洽) 편

 

* 원고 매수를 2백자 원고지 50매로 한정시켜, 겨우 10매 더 늘릴 것을 허락 받고 쓰노라 자세히 쓰지 못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