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빗속에서 빛나는 오름들

김창집 2002. 9. 18. 12:57
대수산봉, 두산봉, 손자봉 답사기

▲ 가을비 우산 속에

빗방울이 제법 잦아지는 날씨인데도 9명의 회원이 모였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 오늘 산에 오른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인데도 우리는 이제 익숙해버렸다. 자진해서 늘 차량을 지원하고 있는 변 총무가 펑크를 때우러 간 사이에도 빗방울은 더 굵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잔뜩 찌푸려 온 섬이 다 비가 오는 것 같다. 구름이 흐르고 한쪽이 밝아져 있으면 그곳이 갤 가능성이 많지만 오늘은 그게 아니다. 우리가 늘 모이는 계단에 흐르는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룬다. 그렇다고 어디 물러설 사람들인가? 회원들은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동쪽으로 출발했다.

오늘 같은 날은 해변의 풀밭 오름에 가야 걸어 다니는 데도 좋고 시원히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다고, 1차 목표를 성산읍 고성리에 있는 대수산봉으로 정했다. 가깝게 간다고 연삼로 → 삼양 거문소 → 진드르 → 함덕 → 선흘 → 16번도로 → 송당 → 고성 코스를 잡고, 길을 잘 아는 부 원장이 앞장서 간다. 오늘 따라 비에 젖은 용눈이오름이 꼭 샤워를 하고 있는 여인의 나신(裸身) 같다. 고성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소나무가 가득하고 전파 중계탑이 우뚝 솟아 있는 대수산봉이 눈앞에 다가선다. 마을에서 오름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 입구에는 분꽃과 며느리밑씻개가 곱게 피어 있다. 이 길은 일주도로 성산 읍사무소 남쪽 신양리로 통하는 농로다.

5분쯤 달렸을까? 오른쪽으로 왕릉 같은 무덤이 나타나고 다음은 오름으로 오르는 길이다. 마침 그 길로 벌초를 마치고 나오는 3대의 승용차와 마주쳤다. 조금 올라가니 고성리 공동묘지였다. 차를 세우고 모두 비옷을 껴입은 뒤 우산을 쓰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간다. 공동묘지에는 아직도 벌초를 안한 무덤이 20% 정도 남아있다. 묘지 앞 쟁반 위에 사과와 배, 포도 등의 과일을 남겨놓고 그냥 가버린 곳도 있다. 차례를 지냈으면 음복(飮福)을 해야 복을 받지 요즘 입이 고급이 되다 보니까. 쯧쯧! 저 플라스틱과 은박지 쟁반은 두고두고 남아 오염원이 될 터인데. 벌써 보기 싫게 썩은 것도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색색의 우산을 쓰고 가는 것도 운치가 있다. 길섶에는 이질풀꽃이 진보라로 피어 우리를 반기는데, 다람쥐꼬리를 닮은 수크렁도 이제 막 이삭을 내밀었다. 풀 사이에서 둥그렇고 옅은 초록빛 잎사귀가 눈에 번쩍 띈다. 식물도감을 뒤져도 못 찾아 숙제로 남아 있는 풀이다. 식물학 전공인 부 원장에게 물어보니, '병풀'이란다. 아! 병풀. 그렇다면 독특한 효능이 있는 약초가 아닌가. 서울대 주상섭 교수 팀이 최근 제주도를 비롯해 인도 및 마다가스카르 등지에서 자생하는 이 병풀에서 치매인 알츠하이머병 치료 후보 물질 SM-2를 뽑아내서 미국과 프랑스에 특허 등록했는데, 동물 실험과 인체 임상 실험을 거치고 있다고 한다. 하루빨리 성공을 거둬서 내가 나이 들었을 때 덕 좀 보았으면….


▲ 제주 동쪽의 아기자기한 풍경이 한 눈에

대수산봉(大水山峰)은 큰물뫼, 큰물미, 물미오름라고도 불리는 해발 137.3m, 비고 97m, 둘레 2,094m의 제법 듬직한 오름이다. 완만한 기복을 보이는데, 정상 부분에는 꽤 넓은 산마루가 길게 이어지면서 얕게 패인 타원형의 분화구가 무성한 억새풀로 덮여 있다. 무덤이 몇 개 있는 동쪽 산마루에 오르니, 아! 눈앞에 펼쳐진 정경이라니. 가운데 성산(일출봉)을 중심으로 그 뒤에 우도가 소처럼 길게 누워 있고, 오른쪽에는 섭지코지가 신양해수욕장을 안았다. 섬과 산봉우리와 바다와 해수욕장이 아기자기하게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여름날 새벽 이곳에 오면 일출봉 위로 해가 둥실 떠오른다 하니, 그 정경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흥겹다.

비에 젖어서 그런지 노란 딱지꽃은 거의 끝물에 이르렀고, 곳곳에 연보랏빛 무릇꽃이 숨어 있다. 나비나물 한 포기가 여남은 개의 꽃을 안았는데 비해 빗속에서 짚신나물의 작고 노란 꽃이 빛난다. 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골뱅이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나누고는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향해 분화구의 억새를 헤쳐간다. 쑥부쟁이와 모시대 꽃이 피어나는 것으로 보아 얼마 없어 가을 들꽃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곳곳에 억새 뿌리에 기생하는 야고가 무더기로 피어 있다. 작달막한 키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피어난 연한 홍자색 꽃. 내가 처음 이 꽃을 보았을 때 너무 신기하여 건드리면 오므라들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나지막한 오름 정상으로 오르는 길엔 산불 감시 초소가 들어 서 있고, 봉우리엔 조선시대 구축해 놓은 수산봉수(首山烽燧)가 잡목에 덮여 있다. 자세히 보니 둥그런 두 개의 둔덕과 방화선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잡목은 우묵사스레피나무를 비롯해서 소나무, 보리수, 예덕나무, 팽나무, 찔레나무가 어지러이 섞이고, 사이사이에 억새, 수크렁, 며느리밑씻개, 닭의장풀이 얽혀있다. 화덕의 자리엔 높직하게 삼각점 표석이 세워졌다. 과거 이곳 봉수대엔 12인이 2교대로 근무하면서 북동쪽으로는 성산봉수(城山烽燧), 남서쪽으로 독자봉수(獨子烽燧)와 교신했었다.


▲ 알오름을 거느린 전형적인 이중식 화산체 두산봉

비가 그치지 않아 우산을 쓴 채로 오솔길을 돌아 내려 왔다. 시간은 이제야 11시를 막 넘겨 아직 점심 먹기에는 일러서 가까이에 있는 오름 두산봉을 하나 더 오르기로 했다. 속칭 말미오름으로 불리는 두산봉(斗山峰)은 성산읍 시흥리에 있는 오름인데, 해발 126.5m, 비고 101m, 둘레 3,631m으로 높이는 방금 오른 대수산봉보다 낮으나 둘레는 더 넓은 오름이다. 알오름을 갖고 있는데, 해발 145.9m, 비고 51m, 둘레 1,613m이다. 앞에 보이는 우도 쇠머리오름이나 성산(일출봉)과 같이 얕은 바다 속에서 화산 분출 활동에 의해 떠오른 응회환으로 된 수중분화구 안에서 다시 화산이 터져 솟아오른 전형적인 이중식 화산체다.

오름으로 들어가는 농로 양쪽으로는 이 고장 특산물인 당근밭이 많다. 정상으로 길이 나있는 곳에서 차를 내려 철조망을 통과한다. 말을 놓아기르기 때문에 풀이 아주 짧아 걷기에 편하다. 이곳은 4년 전 1월1일에 일출을 보려 왔던 곳이다. 써서 말이 좋아하지 않는지 어머니 몸에 유익하다는 익모초가 한 무더기 작은 꽃을 피우고 있다. 정상에는 이질풀, 수까치깨, 딱지풀, 쥐꼬리망초, 갯기름나물 꽃이 뜯어먹은 풀 위로 솟았다. 동쪽 알오름으로 이르는 길 곰솔 사이사이에 비를 피하느라 말들이 몰려 있다. 정상 조금 아래 사스레피나무로 두른 무덤이 있어 들어가 보니, 방금 벌초를 끝내고 간 듯 오래된 동자석만 눈을 멀뚱히 뜨고 서있다. 요즘 도굴꾼들 때문에 동자석이 수난이다.

점심은 시흥리 해녀 식당에 가서 먹기로 하고 해변도로로 가는데 지미봉 가까운 곳 논에 벼가 누렇게 익은 것이 보인다. 이곳은 제주도내에서 얼마 안 되는 논이 있는 곳이다. 이번 바람에도 끄덕 없이 잘 견뎌내어 수확을 앞두고 있다. 잠시 루사 때문에 토사로 묻혀버린 논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하다.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마침 썰물이어서 맛소금으로 조개를 잡는 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점심으로 해녀들이 이곳에서 잡아낸 조개죽을 시켜놓고 안주로는 군소 두 쟁반을 시켰다. 군소는 이곳에서 물톳, 또는 굴멩이로 불리는데, 독특한 향기와 담백한 맛으로 환영받는 해산물이다. 밑반찬으로 나온 게 튀김을 으적으적 씹으며 소주 한잔을 곁들였다.


▲ 비에 젖어 촉촉하게 빛나는 손자봉

밥도 잘 먹었겠다. 소화를 위해 오름 하나를 더 오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손자봉으로 향했다. 이런 날은 오름 오르는 맛도 있지만 향토 음식을 찾아 먹는 것도 즐거움이 하나다. 그렇다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임은 점심을 준비하지 않고 회비로 1만원을 받아 해결한다. 그 중 일부는 정상에서 새참으로 먹을 캔맥주나 음료수, 과일 등을 사고 나머지로 점심을 먹는다. 그러다가 돈이 남으면 차량을 지원한 분에게 기름 값으로 나눠주는 것이다. 충분하진 않지만 돌아가면서 차를 동원하기 때문에 불만은 없다. 비는 더 거세게 퍼붓는데 우리들은 더 신이 났다. 어떤 날씨도 즐길 수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용눈이오름을 지나고 네거리에서 동거미오름으로 들어가는 곳에 차를 대고 빗속으로 들어간다. 해발 255.8m, 비고 76m, 둘레 2,251m 속칭 손지오름으로 불리는 이 오름은 한라산의 축소판이어서 손자봉(孫子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구좌읍 종달리 지경인데 용눈이오름에서 보면 오름 사면에 X자 형태로 심어놓은 삼나무가 꼭 손자가 입고 있는 바지의 어깨끈이 연상되어 손자봉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걸맞는 이름인가를 알게 한다. 남쪽의 정상봉을 중심으로 동반부는 평평한 등성이를 이루고, 서반부는 크고 작은 세 봉우리가 기복을 이루는 가운데 둘레 약 600m, 깊이 26m나 되는 타원형의 분화구가 있고, 동쪽기슭에는 원추형 알오름이 있는 복합형 화산체이다.

콩밭 옆으로 걸으며 얼마 없으면 콩 꼬투리가 실해져서 서리를 해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북쪽 사면은 온통 억새로 덮여 있고 사이로 구불구불 사람이 걸었던 길이 있다. 억새 속에서 다시 야고를 찾으면서 10분 정도 걸어 정상에 다다랐다. 군데군데 참취꽃이 피어 부는 바람에 향기를 풍긴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남동쪽으로 할아버지격이 되는 따라비오름, 어머니격인 모지악, 큰아들격인 장자악, 그리고 새끼오름이 있는데, 이 오름이 손자봉이다 보니, 가족끼리 모여 있는 셈이다. 풀밭 위를 촉촉히 적시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몸 어딘가에서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충만감을 느낀다. [2002. 9. 15.]


동반자 : 김세엽 고길홍 변신규 구웅서 부두홍 김봉선 고순여 박기배(8명)


<사진> 위는 잔대, 두 번째가 야고 꽃, 세 번째는 띠 위에 빗방울이 구르는 모습이고, 아래는 양영태 씨가 찍은 두산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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