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민들을 공포로부터 탈출하게 한 나가사키 원폭(原爆)
아리타 도자기 판매장에서 나온 우리는 태평양전쟁을 마감하는 원자폭탄 투하지로 잘 알려진
나가사키(長崎)로 향했다. 자신들의 힘만 믿고 아시아 대륙은 물론 남양군도까지 점령하고,
나아가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싸우게 된 일본은 날이 갈수록 전쟁이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주민들까지 희생시키며 마지막 보루였던 오키나와까지 빼앗기게
되었지만 전쟁을 쉽게 포기할 그들이 아니었다. 본토로 가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기에는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아 옥쇄 작전을 펼칠 요량으로 우리 제주도를 지목했다. 오키나와 섬은 너무
밋밋하여 항전이 힘들었지만 제주도는 해안선이 가파르고 곳곳에 오름이 있어 버티기 쉬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결사 항전을 의미하는 결1∼7호(決1∼7號) 작전을 수립하고 대륙에서 철수하는
병력들을 제주도로 진주시키는 한편, 주민들을 동원하여 제주도를 요새화 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제주국제공항 자리에 정뜨르 비행장과 모슬포에 알뜨르 비행장을 닦고, 북쪽 제주시
사라봉과 별도봉, 동쪽 성산 일출봉, 서쪽 송악산, 남쪽 서귀포 삼매봉에다 바다 쪽으로
어뢰정과 대포를 숨길 굴을 파고 오름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면서 마지막 전쟁 준비를 했다.
농번기를 맞은 주민들은 곡식을 거둘 틈도 없이 동원되어 굶주리면서 삽과 곡괭이를 들고
작업을 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반발을 했다간 그 자리에서 총살, 매립 당하기도 했다.
미군은 폭격을 해보다 말고 주민들의 피해를 생각했다. 일본군을 굴복시키기 위해선 이런
국지적인 싸움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 본토를 공격하는 쪽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실제로 사용하지 못했던 원자폭탄에 대한 유혹이
꿈틀거렸을 것이다. 어디다 떨어뜨릴 것인가가 문제였다. 처음 지목한 곳이 교토(京都)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 중요한 무기제조 공장이 있긴 하지만 오랫동안 일본의 중세 수도(首都)
였던 관계로 유물과 유적이 다칠 것을 우려해 다시 고른 것이 히로시마(廣島). 1945년 8월 6일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로 시 전체가 초토화되어 20여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커다란 것을 한 방 맞은 일본 당국은 어리벙벙해졌다. 쉽게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데
사흘 후 이곳 나가사키에 다시 한 방이 터졌다. 건너 쪽 해안에 있는 조선소를 폭파한다는
것이 흐린 날씨 때문에 시내 한 복판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린 일본 군부에서는
무조건 항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일 후인 8월 15일, 일본 천황은 뜨악한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한다. 우리 나라는 해방을 맞았지만, 제주도민들의 감격은 남다르다. 그 지긋지긋한
강제 동원의 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보다 더한 전쟁과 죽음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으니까.
이런 경우에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란 말이 해당되는지 몰라도 일본으로서는 당연히
죄 값을 받은 것이다. 물론 아무 죄도 없는 양민들의 피해는 가슴 아프지만…….
(나가사키의 전차)
▲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나가사키
나가사키로 가는 거의 두 시간 동안 사방을 둘러보며, 일본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가이드 유한숙 씨의 얘기를 들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 나라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산에 나무가
우거지고 논밭이 잘 정리되어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산이나 언덕의 나무는 주로 삼나무를
비롯해서 편백, 대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마을에는 우리 제주도와 비슷한 후박나무, 나한송,
녹나무, 식나무, 먼나무, 느티나무 등이 보이는데 가끔씩 익어 가는 감이 달려있는 감나무와
밤나무도 보인다. 논에는 벼가 익어가고 드물게 양배추 밭이나 마을 어귀의 채소밭이 보이는데,
우리처럼 놀리는 땅이 없고 비닐이 보이지 않았다. 집 앞의 조그만 터도 놀리지 않고 잘 다듬은
정원수와 화초를 심었다.
코스모스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 다음으로 좋아해서 가을 '추(秋)'자에 벚나무를 뜻하는
'사쿠라(櫻)'를 합쳐 '추앵(秋櫻)'이라 한다고 일러준다. 봉숭아라든가 다알리아, 나팔꽃,
백일홍, 칸나도 보이고, 들꽃 계통인 노란 상사화가 이채롭다. 농촌이든 도시든 거리엔 사람의
발자취가 뜸한데 모두들 일터로 나갔기 때문이란다. 나가사키시에 도착해 보니, 오래된 전차가
길 가운데로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의 나가사키현 현청 소재지인 나가사키시는 인구
약 44만 명의 중도시이다. 일찍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1571년 포르투갈과 무역을 시작함으로써
자연스레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은 당시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총 3자루를 금과 바꾸어
이를 대량 생산해 냄으로써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오랫동안 지속되던 전국시대
(戰國時代)를 마감하여 통일을 이루었고, 주체할 수 없는 힘을 밖으로 분산시키고자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발달된 선진 문물과 함께 이곳에 그리스도교를 뿌리 내리게 했고,
그로 인해 영국과 네덜란드와도 교역을 하게 되었으나, 1641년 그리스도교를 금하는 쇄국
정책으로 인해 외국 무역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포교 활동을 하지 않은 네덜란드와 중국,
그리고 조선은 예외가 되어 개국(開國) 때까지 무역을 계속함으로써 일본이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수산 도시이자 원양
어업 전진기지로 발달하였으며, 공업은 조선, 제강, 전기 기계 외에 수산가공업, 식품공업,
목공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된 유적으로 교회를 비롯하여 서양식 건물이
나 외국인 묘지 등이 남아 있어, 동서문화가 융합된 이국적인 정서가 깃든 국제도시로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박물관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나가사키 역 앞에서 시작되는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니시자카 공원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기독교 금지령에 의하여 처형당한 26명의 카톨릭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가 기도하는 모습을
새긴 조각상이 있다. 니시자카 형장에서는 약 600명의 교인이 순교했다고 전해졌는데 외국인이
많이 살던 오란다자카에 있는 목조의 서양식 건물이나 고딕 탑,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다운
오우라 천주교 회당, 영국인 무역상이 살던 그라바소노, 그리고 원폭투하 지점에 원폭 투하
중심비가 있는 헤이와(平和) 공원 등은 나가사키의 명물이다. 1977년 국제문화관광도시로
지정되었으며, 1992년에 문을 연 하우스텐보스는 네덜란드 말로 '숲속의 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네덜란드의 고성이나 궁전, 푸른 전원 등이 펼쳐지고 12개의 크고 작은 박물관이
들어선 공원이다.
(평화의 공원 상징탑)
▲ 원폭이 떨어졌던 중심부에 만든 '평화의 공원'
점심은 평화의 공원 앞 원폭 피해자들과 유족이 운영하는 관광기념품 가게 앞 식당에서 했다.
벌써 점심 식사를 끝낸 수학여행단 학생들이 이곳 명물인 카스테라를 비롯한 각종 기념 선물을
사기 위해 복작거리는 1층 상점을 거쳐 2층에서 먹었다. 중국식도 아니고 일본식도 아닌 어정쩡한
음식이었으나 그런 대로 먹을 만하였다. 식성에 잘 안 맞는 사람들은 가지고 온 고추장과
들깻잎지, 김치 등을 내놓고 먹는다. 평화의 공원으로 들어가는데 당시 교도소로 썼던 건물이
밑부분만 남아 있어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을 지나 다다른 넓은 광장이 이른 바
헤이와코엔(平和公園)의 중심지였다. 공원 북쪽 가운데 기념상이 자리잡고 양쪽에 종이학을
걸어 놓은 탑이 있었다. 마침 기념상 머리에 비둘기가 앉아 있어 모두들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이 기념상은 1955년부터 5년에 걸쳐 만들어진 남자 모습의 청동상으로, 하늘로 향한 오른손은
전쟁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가볍게 감긴 눈은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양쪽에 있는 센바르즈라는 종이학을 매다는 탑은 원폭의
화상으로 오랫동안 앓았던 아이의 쾌유를 빌며 보내기 시작한 데서 유래하는데, 지금도 이곳을
들르는 사람들이 학을 접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아직도 신음하고 있는 환자들의 쾌유를 비는
뜻으로 걸어 놓는다고 한다. 광장 남쪽에는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평화를 기원하는 조각물들이
설치되었고, 아래로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대는 분수를 만들어 놓았다. 당시 피폭 당한 이들이
물을 달라고 외쳤던 것을 생각하면서 저 세상에서나마 목을 추기게 하려는 배려라고 한다.
1945년 8월 9일, 이곳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원자 폭탄으로 말미암아 7만 여 명이 사망했고,
원폭 중심지에서 반경 2킬로미터 이내는 불바다가 되었다. 계단을 걸어 나와 조금 돌아간 곳에
원폭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나가사키 국제 문화회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회관은 철근 콘크리트
6층의 건물로, 1955년에 완성된 것인데 이 안의 원폭 자료실에서는 원폭 관련 수기,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마당에 들어서자 여러 형태를 가진 석등이 보이고 핵폭탄이 떨어진 곳에 높은
탑을 세워 놓았다. 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보니 당시 폐허가 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지층이
있어 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을 실감케 한다. 빙빙 돌며 들어가도록 특이하게 설계된 된 현관으로
들어가 먼저 당시 상황을 알리는 영상물을 보고 전시장으로 향하였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원자벌판으로 변한 나가사키 시가와 맞은 편에 우라카미
천주당의 참상을 재현해 놓은 것이었고, 다음 칸에는 가운데 피폭된 나가사키 시가지 모습을
축소한 모형, 옆으로 원폭 투하까지의 경과, 열선에 의한 피해 모습과 유물이 전시돼 있었는데,
병들이 녹아 있는 것과 사람의 뼈가 엉겨 붙은 것 등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음으로 열풍에
의한 피해, 방사선에 의한 피해, 교수 구호 활동, 피폭자의 호소, 나카이타가시 박사의 활동 모습이
차례로 전시되었다. 기획 전시실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원폭 투하로의 길, 현대의 핵 병기,
핵 병기 개발과 실험 피해자들,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핵폭탄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핵 폭탄 폭발의 시간을 알려주는 11시 2분에 멈춰진 기둥 시계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금 북한의 핵 발언 때문에 온 세계가 뒤숭숭하다. 북한은 부산 아시안게임에 평화의 사절단을
보내면서도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이 핵 개발 계획 파문을
일으킨 농축 우라늄 핵폭탄은 바로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과 같은 것이다.
나가사키 원폭 전시관은 원폭 투하 전의 나가사키 시가 및 풍경과 시민들의 생활 모습과 일순간에 파괴된
시가지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원폭의 파괴력과 두려움을 호소, 핵 병기가 없는 세계를
지향하고 있었는데, 전쟁과 핵무기의 문제 및 평화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하였다. 나는 국방의
의무를 준수하기 위하여 입대하였다가 월남전에 참가하여 전쟁의 비참함을 경험했다. 어쨌든
아름다운 이 땅에 핵을 사용하는 비참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핵문제는 성실한 자세로
임하여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나가사키 축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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