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일본의 관문 ; 화산섬 큐슈 답사기 (6)

김창집 2002. 11. 8. 17:30



(시마바라(島原)와 구마모토(熊本)를 잇는 훼리)

▲ 구마모토(熊本)로 가는 길

버스를 탄 채로 시마바라(島原) 외항 터미널에서 쿠마모토 신항으로 출발하는
훼리를 탔다. 차가 제자리에 안전하게 세워지자 우리는 내려서 선실로 들어갔다.
큐슈섬은 워낙 커서 많은 부속 섬을 거느리고 있으며, 안으로 깊숙이 만(灣)처럼
들어간 육지로 둘러싸인 바다들이 있는데, 이곳은 아리아케해(有明海)라 한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 호텔 온천욕실 노천탕 에서 바라보니 운젠에서 태평양으로
출어하는 배 두 척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곳 시마바라의 바다는 작고 예쁜 섬을 거느리고 있어 아기자기하고 깨끗하다.
모두들 기분이 좋아져 선실 뒤 갑판으로 나와 담소하며 사진 찍기에 바쁘다.
여기서 구마모토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선실에서는 회기별로 생맥주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구마모토시(熊本市)는 규슈섬의 중심을 이루는 구마모토 현청 소재지로
인구 65만의 도시이다. 구마모토 평야의 중앙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인데
아직도 전차가 다닌다. 동쪽은 아소산(阿蘇山) 기슭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홍적대지를 이루고, 서쪽은 아리아케해에 면하는 분지상의 지형을 이루고 있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시의 기원은 5세기이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의 한 축을 이루었던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17세기초에 구마모토성(城)을 축성한 후
250여 년에 걸친 세월 동안 성읍으로 번성하였다.
지금은 상업과 서비스업 등 3차 산업 인구가 전체의 약 70%를 차지하며
소비도시의 성격이 짙은 곳이다.

구마모토 시는 큐슈섬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크고 중요한 도시로
오오사카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 3대 성의 하나인 구마모토성(熊本城)과
스이젠사(水前寺) 공원이 유명하다.
구마모토는 큐슈섬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물과 바다를 통해 모든 현과
접해 있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이며, 중심적인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정 때문에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아쉽게도
이곳에서 돌아가야 한다. 동쪽 산너머에 있는
그 유명한 온천 휴양지 벳푸(別府)나 미야자키(宮崎),
섬 남쪽에 자리잡은 동양의 나폴리라는 가고시마(鹿兒島)에도 가보고 싶었는데….
그 뿐인가? 나가사키현에 속하는 우리 나라로 가는 징검다리 쓰시마(對馬島)나
큐슈섬의 연장선상에 있는 오키나와(沖繩)는 따로 가야 할 판이다.

드디어 눈앞에 도시가 펼쳐지고 배가 접안을 위해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천천히 선실에서 나와 자기가 탔던 차의 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이곳 구마모토에서는 우리 나라 옛 백제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고적과 유물들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저 기구치(菊池)로 나가면 기구치가와(菊池川) 유역에 많은 고분(古墳)들이
흩어져 있는데, 거기서 발굴되는 유물들을 보면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곳 구마모토시는 우리 나라와 관계를 많이 맺고 있다.
백제의 고도 공주(公州)와 구마모토현 국수정(菊水町)이 자매결연을
맺고 있으며, 아소산에서 구마모토시에 이르는 간선도로변에는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일본인 무궁화회에서 심은 무궁화 400그루가 자란다.



(구마모토성 덴슈가쿠의 옆모습)

▲ 구마모토의 상징 구마모토성(熊本城)

구마모토 성은 가토키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1607년 완성되었는데,
7년여에 걸친 대공사였다고 한다. 구마모토 성은 일본의 역사적 내란인
세이난노에키(西南之役) 때도 그 문을 굳건히 닫은 채 난공불락의 성으로
위세를 떨쳤었다.
성의 구조는 쓰보이가와(坪井川)와 세이킨가와를 비롯해 성루 49개,
성문 29개, 누문 18개를 가지고 있었으나, 1877년 전화(戰火)로 거의 소실되고
지금은 우토야구라(宇土櫓)와 긴 담장을 비롯한 돌담이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덴슈가쿠(天守閣)는 1960년에 재건된 것으로,
이곳 전망대에서는 아소산의 웅장한 모습과 구마모토 시가지 및
나라야케우미(有名海)를 비롯하여 규슈(九州)산맥, 우에키(植木) 고원까지도
전망할 수 있다.

덴슈가쿠 내부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역대 영주들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성터 주변은 4계절 내내 꽃이 피어 있는 화원과 일본 각지의 나무를 모아 놓은
4목원이 있으며, 이곳 또한 공원으로 개방되고 있다.
배에서 내려 성으로 가는데 낡아 보이는 전차가 길 가운데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구마모토성이 웅장한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선다.
고목이 된 녹나무들의 우람한 자태가 역사가 오래였음을 말해주고,
성 앞에 긴 모자를 쓰고 쭈그려 앉은 가토기요마사의 동상을 보면서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을 나만의 감정일까?
성의 상징 탑인 덴슈카쿠로 가는데 일본의 고등학교 수학여행단을 만났다.
여학생들의 스커트가 너무 짧아져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성벽이다.
대부분의 성벽이 직각으로 쌓는데 이곳은 아래 부분은 비스듬히 쌓다가
위로 가면서 직각을 이루고 있다. 이는 성벽으로 적들이 올라오게 유도해서
이를 물리치는 작전을 위해 그랬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의 축성은 임진왜란 때
우리 조선에서 배워온 축성법을 활용했다 한다.
덴슈카쿠 1층 옥상에 검은 복면을 하고 칼을 든 무사가 갖은 몸짓으로
시선을 끈다. 눈을 들어 처마 위에 조선 도공이 만들었다는 기와를 유심히
쳐다본다. 건물의 내부는 새로 개조되어 계단을 오르면서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도 둘로 갈라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구분해 놓고.
한쪽에 지붕마루를 장식했던 커다란 막새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모조품이었고 진품은 황금으로 되어 있다 하니
그들의 호화스런 생활을 짐작해 볼만도 하다.

유물관이라고는 하나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성이니 만큼
무사들의 모습과 장비, 그리고 무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 걸려 있는 이 성의 역사와 관련된 기록과 그림이 대부분이라고나 할까?
맨 위층에서 나무가 울창한 성 주변과 시가지를 둘러보고 내려왔다.
건너편에 이와 비슷한 작은 덴슈카쿠가 있는데 우토야쿠라(宇土櫓)라 하며
성이 지어졌을 때 함께 만들어진 400년 전의 건물이다.
1877년 내부 전쟁 때도 불타지 않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내부 관람이 가능한데
방들은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한다.
내려와 마당 구석에 있는 후루이 우물(古井戶) 옆에
타다 다시 살아난 은행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기념 사진을 찍었다.



(한창 활동 중일 때, 분화구의 야경)

▲ 세계 최대의 칼데라로 이루어진 화산, 아소산(阿蘇山:Asozan)

가끔씩 아주 오래된 건물들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며 외곽으로 빠져나가다가
뷔페식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초밥으로부터 각종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식당에서 오랜만에 자신들의
식성에 맞는 음식을 찾아 먹었다. 비교적 자연스럽게 갖고 간 한라산 소주를
곁들여 마시며 한라산 대신 아소산을 갖고 가야한다고 농담할 정도로
흐뭇한 식사였다. 원래는 아소산을 모고 나서 구마모토성을 볼 계획이었으나
순서가 바뀌었다. 가는 길에 사부아마시 원숭이 극장에서 쇼를 보게 되었다.
조그만 극장에서 원숭이 두 마리가 벌이는 쇼를 본다.
주로 높은 곳을 뛰어넘는 재주와 수평을 유지하는 재주로 이루어졌는데,
가엾기는 하였으나 최선을 다하는 공연자들의 성의가 돋보였다.

공연을 마치고 아소산으로 가는데 혹시 제주도로 돌아와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우리 오름 주변의 모습과 꼭 같은 풍경에 눈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초원의 띠와 허옇게 피어난 억새,
그리고 우뚝우뚝 솟은 산들까지….
삼나무와 잡목림이 우거진 산길도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하긴 제주도와 위도가 비슷하고 화산지대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지와 연락을 해본 가이드가 다행히 오늘 분화구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화산 활동이 심상치 않거나 바람 방향이나 기압이 맞지 않을 때는 관람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그냥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는데….
오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기생화산에 넋을 잃을 정도다.



(화구에서 분출하는 연기)

최근까지 화산 폭발을 했던 아소산은
세계 최대의 칼데라로 이루어진 화산이다. 아소산의 면적은
380㎢로 동서 18㎞, 남북24㎞, 둘레 128㎞의 엄청난 규모다.
아소의 폭발은 3천만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의 모습은 10만년 전에
있었던 대폭발로 이루어진 것인데 우리 제주섬의 기생화산들이 한창 솟아날
때와 같은 시기이다. 나카다케, 다카다케, 네코다케, 에보시다케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금도 계속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높이 1,328㎞, 폭 1.1㎞, 깊이 100㎞의 나카다케에
용암을 내뿜고 있어 살아 있는 아소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소산 정상까지는 1959년 설치된 91인승 대형 로프웨이로 올라갈 수 있는데,
높이 108m의 정상까지 4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아소산에서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여러 가지 축제가 행해지고 있다.
우선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열리는 불축제는 우리 제주도의 들불축제와
비슷한 축제로 아소산의 잔디 태우기 행사이며, 신들의 결혼을 축복하고
이듬해 들판의 싹이 잘 돋도록 하기 위해 치러지는 축제이다.
산 위로 크기가 무려 300m에 이르는 '불 화(火)' 자가 타오르는 모습이
장관이라 한다. 7월에는 '타코아게'라는 연날리기 축제가 펼쳐지는데,
아소의 초원 위에서 세계 각국에서 참여한 연날리기 명인들이 총출동한다.
부산과 구마모토는 이 연날리기 대회를 계기로 상호 교류를 맺고 있다.
다음이 7월 28일에 열리는 '고다 마츠리'로 아소산을 신으로 숭배하던
원시신앙에서 시작된 신사인 아소신사(阿蘇神社)에서 펼쳐지는
일본 고유의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는 축제이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 대합실에 줄을 지어 서서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버스 두 대에 나눠 탔던 우리 일행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태운다.
내려 시멘트 구조물로 된 몇 개의 대피소를 바라보며 분화구로 갔다.
분화구에는 빗물이 고인데다 유황이 녹아 초록빛을 띠고 펄펄 끓고 있다.
지금은 연기만 나고 있지만 간헐적으로 불꽃이 일어나거나 터지기도 한다는데,
아쉽게도 직접 목격은 하지 못하고 팔고 있는 사진을 사서 그것을 보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길로 돌아 내려오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푸른 초원을 보며 도저히 그냥 올 수 없어 길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동료 몇 분이 같이 앉아 안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용 한라산 소주로 가슴을 식히고서야 비로소 내려올 수 있었다.

▲ 다음은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과 후쿠오카'편을 싣습니다.



(초원 위 오름같이 파란 산, 미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