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집의 제주 전통문화 이야기 ⑨
이 글은 제주민예총이 발간하는 '계간 제주문화예술' 2005년 봄호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지역 문화를 얘기하는 것이어서 방언과 속담이 많이 들어갔는데 블로그에 '아래아(·)'를 넣을 수 없어서 대신 '오'나 '어'로 바꿨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진은 어제(2005. 7. 24.) 서귀포시 선돌에 다녀오면서 찍은 것들입니다.
* 천선과 열매
▲ 식겟집 아인 몹신다
국어 사전에서 '제사(祭祀)'를 찾아보면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런 의식. 향사(享祀).'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발간된 '제주어사전'에서 '식게'를 찾으면 '조상이 돌아가신 전날 밤에 제사를 지내고 제관들이 제물을 음복하는 일. 제사(祭祀).'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주의 제사 풍속에서는 '음복(飮福)'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음복(飮福)'이란 '제사를 지내고 나서 제사에 썼던 술을 제관들이 나누어 마시는 일.'이다.
어디 음복(飮福)뿐이랴? 어렵던 시절 '식겟날'은 돌아가신 어른의 영혼에게 올리는 정성이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인 친척과 이웃을 위한 하나의 '작은 축제'였다. 비록 적은 양이지만 보통 때는 꿈도 못 꿀 쌀밥에 고깃국, 그리고 돼지고기와 떡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부담 없이 바쁜 와중에 살붙이들과 얼굴을 맞대어 정을 나누면서 집안 일을 의논하고, 아이들은 재미있는 옛말을 들을 수 있는 좋은 모임이 되었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한 달, 아니 두 달 전부터 식겟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에서는 살림도 넉넉지 못한데 제수(祭需) 준비를 하려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언제 바다가 사나워질지 모르기에 미리 생선을 마련하여 까마귀나 고양이를 의식하면서 장대를 높이 걸어 조심스레 말려 항아리에 보관했다. 요즘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당일로 살 수 있어 전날쯤 싱싱한 것으로 마련하겠지만 정성을 드리던 그 시절의 바룻괴기(생선)는 약간 역한 냄새를 풍기는 것을 정성으로 알았다.
'식겟집 아인 몹신다(제삿집 아이는 사납다)', '식겟집 아인 코 나도 곱나(제삿집 아이는 코가 나와도 곱다)'라는 속담은 아이들에게 식게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잘 말해주는 속담이다. 식겟날이 되어 떡을 들고 나가면 주변의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비위를 맞추려고 곰살궂게 굴어도 어쩔 수 없고, 아무리 코를 흘려 더럽더라도 다가설 수밖에 없는 가난하던 시절의 풍속이었다.
* 옥잠난초
▲ 식게도 공들여사 먹나
제수(祭需)를 마련하는 일은 최대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했지만 집에서 직접 얻을 수 없는 쌀이라든가 돼지고기, 과일 등속은 곡식을 내다 팔아 구입하였다. 제주에는 논이 적지만 여유가 있는 농가에서는 산디(밭벼)를 심어 제사 때 쓰는 집도 있었다. 예전에는 가루를 내는 것도 맷돌이나 방아를 이용했지만 정미소가 생기면서부터 그 수고는 면하게 되었다. 물을 많이 쓰기 때문에 허벅으로 물 길어오는 일도 중요한 노동이었고, 땔감도 많이 소비되어 이리저리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식겟날이 되어 아침 일찍 집안 청소를 하여 정갈히 하고 나면, 가까운 친척의 여인들이 밭일도 거른 채 모여든다. 4대까지 제사를 모셨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 직계 후손의 며느리들이었다. 제일 먼저 만드는 떡은 줴기떡. 아침에 올 때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터이고 보면 배가 출출하기도 하고 힘든 일도 해야 되는 처지의 며느리들에게 이 쉰다리에 밀기울이나 보리기울로 만든 줴기떡은 그런 대로 감지덕지였다.
다음에 아이들이나 어른들을 위해 만드는 떡은 중실이었다. 어쩌다 남아 있는 가루나 오래된 가루로 적당히 만드는 중실이는 대부분 보리나 밀기울을 곱게 간 것을 이용했다. 간혹 메밀을 급질(껍질을 벗기기 위해 하는 맷돌질) 때 나오는 껍질과 알이 부스러진 것이 섞인 는쟁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 는쟁이는 고구마를 넣어 범벅을 만들어 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
시루떡을 찌는 데도 등급이 있다. 아래쪽에는 동네에 돌리거나 파제(罷祭) 전에 손님들에게 대접하기 위하여 침떡 재료인 좁쌀 가루와 고구마를 섞어 양하 잎으로 시루 구멍을 막은 후 켜켜이 팥고물로 경계를 지우면서 징을 넣고, 윗 부분에는 쌀가루로 제상(祭床)에 올릴 흰떡 재료를 넣는다. 사실 제물은 팥고물을 넣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전통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송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빚지 아니하며, 쌀가루를 이용하여 만드는 온달 또는 반달 모양의 곤떡은 솔잎 위에서 쪄낸다.
* 콩짜개덩굴 속 일엽초
▲ 식게 혼 번 넹기젠 허문
'식게 혼
번 넹기젠 허문 가지 다섯 웨 다섯 두 벵 들이 물 하나 셔사 혼다(제사 한 번 넘기려면 가지 다섯 개, 오이 다섯 개, 두 병이 드는 물통
하나 있어야 한다)'는 속담은 제사 한 번 치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자가 들어가는가를 시사해 준다.
제물로 올리는 떡에는 앞의 흰떡이나 곤떡 말고도 세미떡과 인절미가 있다. 이들의 재료로는 겨울에는 메밀, 여름에는 보리 가루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보리 가루나 밀가루를 이용할 경우 누룩이나 막걸리로 반 발효시켜 놓고 도마 위에서 잘 다진 뒤 병으로 밀어 세미떡은 동그란 판으로 찍어낸 것에 참깨가루나 미수가루 등을 가운데 조금 넣어 반으로 접고, 인절미는 사각으로 잘라 조금 따뜻한 곳에서 다시 발효시켜 쪄낸다. 메밀가루인 경우는 발효시키지 않고, 세미떡 가운데가 조금 도톰하게 팥고물 등속을 넣어 삶아내는 게 틀리다.
가루 적으로는 보통 메밀을 사용하여 묵을 쑤거나 지져 사용한다. 여유가 있거나 큰제사에는 두부를 만들어 직사각형으로 잘라 4개씩 보기 좋게 적꽂이에 꿴다. 고기적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쓰나 쇠고기를 접하기 힘들었던 과거에는 돼지고기 한 가지로 통일했고, 어적(魚炙)을 하게 되면 싸고 구하기 쉬운 모도리(돌묵상어)를 주로 사용했다. 구울 생선으로는 옥돔이나 우럭 등 비늘 있는 고기라야 한다. 감주(甘酒)를 해 올리는 집도 있는데, 이는 보리에 싹을 틔우고 말려 가루로 만든 골가루(엿기름가루)를 이용한다.
채소는 봄에 꺾어 말려두었던 고사리와 시루에 기른 콩나물 두 가지가 보통이다. 혹, 양하간이 나는 계절에는 양하간을 추가했다. 과거 과일이 풍족하지 못할 때에는 조율이시(棗栗梨枾)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토질에 맞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제주에 대추, 밤, 배나무가 거의 없었고, 감나무는 갈옷을 만들기 위한 재래종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가까이서 얻을 수 있는 당유자 한 가지로 모든 과일을 대표하여 올리기도 했다.
제주(祭酒)는 보통 좁쌀로 떡을 빚어 만든 청주를 사용했다. 과거에는 제사와 명절을 지내기 위해 집에서 좁쌀을 빻아 오메기떡을 만들어 그것을 으깬 다음 적당량의 물과 누룩을 넣어 발효시켰다가 가라앉아 위에 뜬 맑은 부분을 곱게 떠낸 청주를 제주로 썼다. 워낙 제사가 많은 집에서는 담가놓은 술을 익힌 다음 고소리를 이용하여 증류시켜 술 춘이(동이)에 담아 두었다가 꺼내 사용하는 수도 있으나 밀주 단속이 심해지면서부터는 소주를 사다가 제주로 썼다.
* 새로 커가는 마
▲ 먹어 볼 거 으신 식게에 절헌다
'먹어 볼 거 으신(없는) 식게에 절헌다(절한다)'는 속담은 '실속 없는 일을 꼬집을 때' 쓰는 속담이다. 이왕 차리는 제사,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이것저것 다 동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빙떡은 제물로 준비하기보다는 주로 출가한 딸이 만들어 왔다. 이 제주도 고유의 빙떡은 메밀가루로 둥그렇고 얇게 지져낸 다음 무를 채썰어 양념한 것을 가운데 놓고 둘둘 만 것이다. 솥두껑을 뒤집어 걸어놓고 돼지기름 졸라둔(정제해둔) 것으로 휘두른 다음 빠른 동작으로 지저내기 때문에 이를 푸꺼낸다고 한다. 빙떡은 그 푸꺼내는 기술과 소가 맛을 좌우하는 식품이다.
요즘 와서 현대인의 식성에 맞춰 어전이나 표고전 같은 여러 가지 전(煎), 고기와 두부 등을 다져 넣어 동그랗게 만든 동그랑땡이나 풋고추 속을 후벼내고 속을 채우는 고추전, 달걀을 풀어 고사리나 부추 등으로 무늬를 넣은 계란전, 찹쌀로 둥그렇고 둘레를 토달토달하게 만들어 설탕을 입힌 기름떡, 냉동 오징어에 금을 그어 양념한 뒤 통째로 구어 낸 것 등이 등장했으나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 제물(祭物)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밥은 메라 하여 곤밥(흰쌀밥)을 마련하는데, 쌀을 씻어 준비해 두었다가 제사를 지내기 직전에 갱(羹)과 함께 지어 올린다. 갱의 재료로는 쇠고기를 잘게 잘라 무나 미역을 넣고 끓이는 것이 있으나 구하기 힘들어 대신 돼지고기에 무를 썰어놓는다든가 아니면 옥돔이나 비늘이 있는 바닷고기에 미역을 넣거나 무를 썰어 넣어 끓인다. 모든 제물에는 마늘이나 향신료 등의 양념은 쓰지 않는다.
제수 준비를 마치면 제기와 그릇을 꺼내 닦고 제상(祭床)과 향로, 향, 양초 등을 준비한다. 과거 양초를 구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접시에 들기름을 부어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켰다. 벼루와 먹, 붓과 백지도 빠뜨리면 안 된다. 겨울에 마루에 깔 방석이 없는 집에서는 멍석을 깔았다. 병풍이 없는 집에서는 미리 빌어 와야 했고, 제상과 젯자리도 친척집에서 빌어다 쓰는 집이 많았다.
* 나무에 매달린 채 뿌리 내리는 백량금
▲ 이녁집 식게 몰르멍 놈의 집 식게 알카
'이녁집 식게 몰르멍 놈의 집 식게 알카(자기 집 제사 모르면서 남의 집 제사 알까)'라는 속담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을 모르는 칠칠치 못한 사람을 나무랄 때' 쓰는 속담이지만 보통 사람이면 자신이 참가해야 할 제삿날은 환히 꿰었다. 지금처럼 복잡한 사회구조가 아니고 활동 범위도 좁은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큰 부담 없이 얻어먹을 수 있는 작은 축제가 아니던가.
준비를 마치고 저녁이 되면 제상을 차린다. 방을 깨끗이 치우고 닦아 정결히 한 후 젯자리를 깔고 병풍을 두른 뒤 앞에 제상을 편다. 병풍과 제상 사이에는 조상신들이 와서 앉을 수 있도록 띄어 놓는다. 가문가례라고 집안마다 진설(陳設)과 제의절차가 다르지만 문전상을 옆에 차려놓고 먼저 문전제를 지내는 일은 한결같다. 이는 무속(巫俗)에서 연유한 것으로 집을 관장하는 문신(門神)에게 먼저 제를 올리는 것이다.
제사상 진설(陳設)은 각 집안의 관습에 따라 다른 점이 많이 있으나 향교에서 권하는 제사상 차리는 법을 많이 따르고 있다. 위치를 말할 때는 편의상 신위를 향하여 우편을 동쪽, 좌편을 서쪽으로 정해 북쪽에 병풍을 치고 병풍 앞에 신위를 모실 위패(位牌)와 촛대를 마련한 다음 식어도 괜찮은 음식부터 제물을 차리고 진설이 다되면 미리 써둔 지방을 위패에 붙인다. 제사상 앞 가운데 위치한 향상에는 축문, 향로, 향합을 올려놓으며 그 밑에 모사(茅沙)그릇, 개잔(퇴주) 그릇, 제주(祭酒) 등을 놓는다.
보통으로 차리는 경우는 5열로 차리되 병풍 쪽을 1열로 하여 메(밥)와 갱(국)을, 2열에는 채소, 3열에는 탕(湯, 찌개), 4열이 적(炙), 마지막 5열이 실과인데 홍동백서(紅東白西)로 진설한다. 그리고 4열 양끝에는 좌포(左脯) 우혜(右醯), 2열 양끝에는 좌면(左麵) 우병(右餠), 1열에는 수저와 밥, 잔, 갱, 두 위를 모실 때는 반복하면 된다.
제사는 4대를 모셨는데, 보통 고조를 넘어서면 지제(止祭)를 한 후 묘제로 돌리는 집안이 많았다. 어느 분의 제사가 되드라도 부부를 함께 모시며 부인이 둘 이상이라도 그 수만큼 모시는데 살아있는 경우에는 제외된다. 제삿날은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날짜로 맞추어 준비하고, 주위가 적막하여 신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자시(子時) 무렵 하루가 시작되는 신성한 시간에 지낸다.
* 나무에 붙은 콩짜개덩굴
▲ 도릿사름 베창옷 입엉 나사문 식께 시냐 헌다
'도릿사름 베창옷 입엉 나사문 식께 시냐 헌다(교래리 사람 베창옷을 입고 나서면 제사 있느냐고 한다)'는 속담은 그만큼 옷 입을 여유와 계기가 없다는 걸 꼬집는 얘기로 들리지만 작은 동네여서 한 집에 제사가 있으면 모두 참가한다는 말도 된다. 이처럼 제사를 보러오는 친척의 범위는 따로 정해지지 않았는데, 직계 후손을 필두로 방계(傍系) 친척이라도 같이 명절을 지내는 집안이면 와도 무방했다. 한 때는 고인(故人)의 친구는 물론 이웃, 제사를 차리는 제주(祭主)의 친구나 아들 친구까지 몰려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제사 보러 가는 사람들은 보통 술 한 병을 들고 가는 게 상례(常例)였다. 어른들은 모처럼 술 한 잔 먹게 되는 데 대해, 아이들은 곰밥(쌀밥)과 돗괴기(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손꼽아 제삿날을 기다려온 터다.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 제상을 진설하여 지방을 붙이고 향을 사른다. 밖으로 나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돌아와 몸을 씻고 의관을 정제해 두 번의 절을 올리는데 이를 재배(再拜)라 한다. 제사를 보러온 사람들이 제주를 올리고 재배를 하고 나서 문안 인사를 하고 앉으면, 침떡과 콩나물 등속의 채소, 그리고 감주가 마련된 집에서는 감주 한 잔을 드린다. 지금처럼 먼저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일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사람이 모이는 대로 문안 인사를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라든가 앞으로 닥칠 집안 일을 의논한다. 아이들의 졸음을 몰아내게 하기 위해 입담 좋은 어른이 나서 옛날 얘기를 해주는 것도 이 때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시간을 맞추어 밥솥에 불을 지피도록 하고 와야 할 사람이 안 오면 불러오게 한다든가 욕먹을 일을 한 일가의 젊은이에게 훈계를 하는 것도 이 시간이다.
자시가 되면 문전상부터 메와 갱을 올리도록 하고 삼헌관과 집사를 정해 향물에 손을 씻고 의관을 정제한 후 문전제를 지낸다. 우선 집안의 신을 모셔야 오늘 이곳에 오는 조상신들이 마음놓고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문을 향해 젯자리를 펴고 문전상을 들어다 난간 쪽으로 향하게 놓고 향을 피운 다음 재배(再拜)하고 술을 따라 올리고 나서 메에 숟가락을 꽂고 채소에 젓가락을 걸친 뒤 다시 재배하고, 술잔에 모든 음식을 뜯어 마지막 하직 재배하고 지붕 위에 올리면 된다. 문전상은 부엌으로 가져다가 그릇에 조금씩 모두 뜯어 조왕신을 위하여 솥 뒤에 놓아둔다.
* 무슨 버섯인지?
▲ 식게 안 헌 건 놈 몰라도 소분 안 헌 건 놈
안다
'식게 안헌 건 놈 몰라도 소분 안
헌 건 놈 안다(제사 안한 건 남이 모르지만 벌초 안한 건 남이 안다)'는 속담은 제사 안한 것은 집에서 몰래 식구만 후딱 해치울 수도 있어
남이 모르지만, 벌초 안한 산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며 쉽게 알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다른 후손들이 있는 이상 물 한 그릇
떠놓더라도 제사는 지내야 했다.
제사 순서는 집안에 따라 다르나 제주에서는 거의 다음의 순서로 한다. 먼저 집사가 재배하고 들어가 향에 불을 피우고 조상신의 강림(降臨)을 청하는 의식으로 제주(祭主)에게 술을 조금 따라 건네 주면 제주는 받아서 향불 위에서 좌우로 세 번씩 돌린 다음 고사리를 놓은 모사에 세 번 따르고 제관들 모두 재배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하늘에 계신 신에게 알리기 위함이고, 모사에 술을 따르는 것은 땅 아래 계신 신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다음은 제주(祭主)인 초헌관이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제주가 신위 앞에 꿇어앉아 분향하면 집사가 술을 따라 제주에게 내밀어 양손으로 받들면 집사는 잔을 받아서 메 그릇과 갱 그릇 사이의 앞쪽에 놓고 메의 두껑을 열고 수저를 들어 갱에다 적신 후 메에 꽂고, 채소 위에 젓가락을 놓으면 제주는 재배한다. 이어 집사나 제주가 축(祝)을 읽으며, 과
거에는 딸이나 며느리들이 곡(哭)을 했다.
다음에 아헌관과 종헌관이 차례로 잔을 올리고 절을 하며, 잠시 틈을 두었다가 첨작(添酌)을 한다. 첨작은 제주로 가져온 술을 조금씩 따라 올리는 의식인데 너무 많은 경우는 같은 종류의 것은 한 번만 따르고 술병을 움직이면 된다. 집사가 다 따르고 나서 잔을 내밀면 삼헌관은 꿇어앉아 두 손으로 올리고 집사는 그것을 받아 먼저 올린 잔에다 세 번씩 따른다. 그 다음 숭늉을 올려 문을 닫고 잠시 묵념을 올리며 신들이 식사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
몇 분이 지나면 헛기침으로 끝났음을 알리고 문을 열어 숭늉에 술잔의 술을 따르고 새롭게 술을 따라 고인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심잔을 드려 재배하고 나면, 고인과 가까운 순서대로 술잔을 올리고 재배한다. 사람이 많으면 세 사람씩 같이 잔을 드리고 재배하도록 한다. 그러고 나서 집사는 갱을 제자리에 놓고 숭늉에다 제물의 모든 것을 조금씩 뜯어놓고 나서 나와 하직 재배를 하고 들어가 지방을 떼어 축문과 함께 향로 위에서 태우면 삼헌관이 마지막 하직 재배를 하면 제사 절차가 끝나는 것이다.
* 구름버섯이라 했던가?
▲ 식겟날 도투는 집 안 뒌다
'식겟날 도투는 집 안 뒌다(제삿날 다투는 집안 안된다)'는 속담은 그대로 신성한 제삿날 친척끼리 싸우면 그 집안은 조상의 노여움을 사 잘 될 수가 없다는 뜻이리라. 술 마실 기회가 많지 않은 때라 모처럼 마신 몇 잔에 취한 사람이 있어 실수를 하게 되면, 그것을 슬기롭게 넘겨야지 어른 앞에서 버릇없다고 다그치다 보면 술김에 큰소리가 오가게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집사는 남겨놓았던 숭늉 한 그릇에다 제일 위의 제물을 차례차례 뜯어놓고 걸맹 준비를 한다. 끝나면 제일 위의 숭늉 그릇에 모사를 합쳐 차례로 지붕위로 올리며 마지막 숟가락을 걸친 그릇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모든 신을 향해 캐우린다. 이 때부터 철상을 하고 음복에 들어가는 것이다. 음복(飮福)이라면 글자 그대로 복을 마신다는 뜻인데 조상을 잘 섬기면 조상신이 복을 내린다는 의미인 것이다.
먼저 개잔 그릇의 술을 조금씩 나눠 마시는데, 과거에는 교자상을 펴지 않고 마루에 앉아 돌아가며 술을 권하고 마셨다. 부엌에서는 상에 올렸던 메를 풀어 온 사람 숫자를 생각하며 사발에 조금씩 담아 갱과 함께 나누어주며, 방에서는 올렸던 제물을 하나씩 골고루 쟁반에 놓아 연장자 순으로 나눈다. 당시에는 쟁반이나 접시가 모자라서 어린이들에게는 적꽂이에 꿰어주게 되는데 떨어진 것이 많다.
* 칡잎 위에서 탈피해 날아가버린 매미껍질
가령 돼지고기 적이 떨어지는 경우에는 졸음을 참고 견디어온 것이 분해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도 있다. 50∼60년대에는 사과도 과일로 등장하게 되는데 조금씩 나누다 아이들에게 돌아오지 않는 수가 많았다. 이 때 주위에 어른이 마침 그것을 먹지 않고 있다가 아이에게 주어 달래지 않으면 안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어른들은 떡을 다 먹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아이들에게 받아주었다. 할아버지 떡에 눈독을 들였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을 때의 서운함이란.
먼저 친척집에 상이 있으면 그곳에 먼저 반을 보내고, 다음엔 제삿집에 오지 못한 사람에게도 떡반을 보낸다. 인사 치레할 곳은 또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냄새를 맡으며 침을 삼켰을 이웃에도 반을 아니 보낼 수 없었고, 자신들에게만 안 보냈다고 섭섭해할 동네 어른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어 뻔히 제사인 줄 아는 사돈까지도 인사치레를 거를 수 없었다.
오죽해야 '동네집 식게 넘어나문 사을 불 아니 솜나'와 '사둔집의 식게 넘어나문 사을 불 아니 솜나'란 속담이 생겨날까? 어렵던 시절 비록 서너 숟갈의 곤밥과 돼지고기와 떡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식게 덕분이었다. 식게를 치르는 집안의 어려움이야 말해 무엇하랴만 조상을 위한다는 이유로 수눌어가며 동네에도 떡을 먹을 수 있어 영양을 보충하게 했던 것은 조상이 내린 축복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 외지에서 들어온 애기범부채
♬ Season In The Sun - Terry J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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