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삶의 중심에 있었던 소(牛)

김창집 2005. 8. 12. 16:12

♣ 김창집의 제주 전통문화 이야기 ⑧

 

 이 글은 제주민예총이 발간하는 '계간 제주문화예술' 2004년 겨울호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지역 문화를 얘기하는 것이어서 방언과 속담이 많이 들어갔는데 블로그에 '아래아( · )'를 넣을 수 없어서 대신 '오'나 '어'로 바꿨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진은 지난 8월 3일 좌보미오름과 백약이오름 사이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 소와 농경생활의 시작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소(牛, cattle)를 가축으로 기른 역사를 농경문화의 시작과 같은 시기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소는 이미 부족국가 시대에 들어와 농사에 없어서는 안될 가축으로 사육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농사를 천하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던 전통사회에서의 소는 한 집안식구처럼 여겨 '생구(生口)'라 불렀다.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일컫는 말'로, 소를 사람으로 대접할 만큼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소는 최근까지도 농사를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해줄 뿐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나르는 효용성 높은 가축으로, 또 민가의 귀한 재산으로 여겨왔다. 소를 제의·순장용으로 사용한 초기의 풍습은 후대에까지 전승되어 고려 때는 궁중의 제의동물을 관장하는 장생서(掌牲署)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풍년을 빌기 위해 농신(農神)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매년 경칩 후 첫 해일(亥日)에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이 때 제물로 소를 바쳤으며 의식이 끝난 후에는 탕을 끓여 여러 사람이 나눠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도의 민간 풍속에는 '첫쉣날'이라 하여 새해 들어 처음 맞이하는 축일(丑日)을 신성시했는데, 소 앞에서 말을 삼가고 빨래도 금하며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았다. 민간 신앙에는 가축을 담당하는 당신(堂神)이 있어 제물(祭物)을 차리고 가서 번성을 기원했으며, 목축업을 주로 하는 곳의 신당(神堂)에서는 칠월 보름 백중날에 '테우리코사'를 지냈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식용작물을 재배하는 농경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농경은 사람들에게 많은 노동력을 요하기에, 사람들은 최대한 노동력을 적게 들이면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 중의 하나가 축력(畜力)의 이용이었다. 가축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은 소를 농경의 최대 동력원으로 이용하였다. 소의 이용은 인력노동의 중압감을 덜게 하였고, 그 결과 농경에서 소의 이용 범위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 소와 더불어 자라던 시절

 

 내가 자라던 시골집의 구조는 사람이 사는 안거리와 밖거리로 구분이 되었고, 밖거리는 대문 구실도 했는데, 대문 옆방은 쉐왕(소를 가두어 두는 방)이었고, 북쪽에 목거리라는 집을 지어 암소들을 매고 가두었다. 그래서, 집은 사람이 반을 쓰고 소가 반을 쓰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남쪽에는 빌딩만한 촐 눌(둥그렇게 쌓아올린 것)과 보리낭(보리짚) 눌이 언제나 한라산을 가리곤 하였다.

 

 소가 쉐왕에 있을 때면 아이들의 일과는 소와 더불어 시작되고 끝났다. 우선 학교 가기 전에 꼴 묶음을 가져다 풀어 주인이 집을 비우는 시간의 분량만큼 나눠주고, 학교 갔다 점심 먹으러 오면 다시 꼴을 나누어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몰고 물 먹이러 못이나 바닷가 용천수 있는 곳을 다녀왔다.

 

 다녀오면 암소는 매고 송아지 같은 것은 그냥 가둔 뒤, 보리짚을 빼다가 쇠똥 위에다 깔아준다. 그렇지 않으면 소 엉덩이에 쇠똥이 덕지덕지 매달려 볼품이 없을뿐더러 소가 성가셔 자라지 않는다. 또, 그건 퇴비를 늘리는 일석이조의 역할을 한다. 저녁이 되어 놀러 가게 되면 다시 꼴을 주고 돌아와 자기 전에 다시 한 번 주고, 자나깨나 소 꼴 주고 물 먹이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봄이 되어 들판이 파릇파릇해지면 소 먹이러 들판으로 갔다. 길이 좁고 들판이 적은 우리 마을에서는 주로 소 먹이러 가는 곳이 과오름이었다. 하루종일 풀밭을 뒹굴며 책도 읽고, 시기가 늦어지면 상동 따먹고 삘기 빼먹고, 아이들이 많으면 놀이에 정신이 팔려 소를 잃고 헤매다 늦게 돌아와 보면, 나이 많은 암소가 무리를 이끌고 앞장서 돌아와 제 방으로 들어가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땐 소를 잃고 애 태우던 마음은 스르르 녹아버리고 아까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 황소 기르기

 

 암소나 송아지는 다루기가 쉬운 반면, 황소는 한 마리를 기르더라도 공이 많이 들었다. 수송아지가 자라서 사릅(3살)이 되면 성징(性徵)이 뚜렷해지고 등치도 제법 커져서 또래를 만나면 싸움하러 들고, 발정기의 암소를 만나서는 기를 쓰고 쫓아가 꼭 용을 한 번 써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쯤 되면 다루기 힘들어 코뚜레를 꿰게 되고 그 때부터는 황소로서의 구실을 하게 된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투입되는데, 우선 밭갈이를 시키기 위한 단계로 멍에를 지우고 돌을 끌게 한다. 처음에는 갑갑하고 힘들어 뿌리치려고 한껏 달려보지만 결국 힘이 부치게 되고 순순히 주인의 지시를 따르게 된다. 산에 가서 적당한 통나무를 잘라 끌어오기도 하면서 멍에가 익숙해지면 모래밭에 끌고 가 밭갈이 연습으로 훈련을 끝낸다.

 

 그러는 동안 소가 축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짚 같은 것을 썰어 보리겨 가루를 버무려 끓여 먹이기도 한다. 그렇게 한 1년 부려먹고 나릅(4살)이 넘는 겨울이면 고기소를 만들어 봄에 출하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소 물 먹이러 거리로 나섰을 때 사람들이 엉덩짝 밑으로 무륵이(가득히) 올라온 살을 보며, "어! 그 놈 잘 먹였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떤 집에서는 남편이 부인 몰래 곡식을 갈아다 섞여 먹이거나 밭에 옥개기(큰갈퀴)를 경작하여 겨울에도 입맛을 돋우노라 푸른 풀을 섞여 먹이기도 했다. 황소 먹이는 사람이 옥개기를 경작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밤이나 이른 새벽을 이용하여 남의 밭에 가서 훔쳐오는 이른 바 '옥개기 도둑질'을 많이 했다. 이렇게 경쟁적으로 소를 살찌우는 일은 곧 수입(收入)의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 소가 했던 일들
   
 소를 기르는 일은 우선 팔아서 돈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동력 확보의 비중이 컸다. 아무 때나 짐을 옮기려면 간단한 것이거나 마차가 가지 못하는 곳에는 질메(길마)를 지워 나르고, 길이 좋고 한꺼번에 많이 나를 때는 수레를 이용한다. 옛날에는 좁은 길이나 '세든밭(남의 밭 몇 개를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밭)이 많아 거름을 나르는 일이나, 수확한 곡식을 나르는 일은 질메를 이용하지 안으면 안되었다. 

 

 소 한 마리가 질메를 지고 나를 수 있는 양을 '한 바리'라고 하며 보통 사람 짐의 2∼3배를 실어 나를 수 있다. 거름을 나를 때는 맥(멱서리)에 담아 양쪽에 무게를 같게 해서 나르고 꼴 같은 것을 나를 때는 '보달(꼴을 길마에 싣기 좋게 다시 묶은 것)'을 만들어 싣는데, 양쪽이 고르지 않으면 소가 들러퀴면서(날뛰면서) 짐을 흩어 놓는 경우가 있다.

 

 특히 조를 파종할 때면 밭을 밟아야 하는데, 이것도 상당 부분 소나 말의 몫이다. 지금은 특용 작물을 많이 재배하지만 30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에는 보리, 여름에는 조 농사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러면 산에 올라가 있는 암소의 무리를 내려다가 좁씨를 뿌려 섬피(가지 많은 나무를 엮어 끌며 씨앗을 감출 수 있도록 하든 농기구의 하나)로 한 번 끈 뒤 노래를 부르며 단단히 밟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로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밭갈이다. 봄이 되어 땅이 풀리면 개간을 위해 새 밭 이기는 일부터 보리를 베고 나서 밭 거스리기, 여름 곡식 파종을 위한 밭갈이, 겨울 곡식을 위한 밭갈이까지 일년에도 몇 번씩 밭을 갈아엎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밭가는 기회가 많았다. 게다가 시간을 내어 홀어멍(과부)집의 밭도 갈아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루 밭을 갈아주면 수눌음인 경우 소와 사람 몫을 합쳐 2∼3일 동안 일을 해준다. 

 


 

▲ 소 사육의 경제학

 

 소는 팔아서 돈도 되지만 노동력을 제공하는 한편, 거름을 생산해준다. 소가 많은 집에서는 헛걸름이라 하여 얻어지는 퇴비의 양이 만만치 않다. 비료가 없던 시절에는 이 거름이 농사의 수확과 직결되기 때문에 중요한 자원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들판에 나가 배불리 먹고 돌아온 소는 배설물의 양도 많아 자연스럽게 좋은 거름 원천이 된다. 

 

 소꼴을 줄 때 소가 먹다 남긴 거친 덩굴은 거두어다 땔감으로 썼고, 퇴비가 많이 쌓이면 틈을 내 거름을 내었다. 더러는 물이 고여 질척이는 통시(돼지우리)에다 넣으면 돼지의 분비물과 어울려 좋은 돗걸름이 되었고, 쇠똥과 오줌이 보리짚과 범벅이 된 것은 차곡차곡 쌓아 발효시키면 훌륭한 퇴비가 되었다. 

 

 이렇게 노동력과 거름을 생산해 내는 것 외에 소를 기르는 일은 여가의 시간을 이용해 재산을 이루는 부업이었다. 당시 황소 한 마리를 팔면 웬만한 밭을 살 수 있었고, 서울에 유학간 자식 1년치 대학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음은 물론 자식 결혼시키는 일이라든지, 상을 치르는 데도 거뜬하였다. 그리고, 소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팔아 현금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적금을 붓듯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집집마다 기르게 된 것이다.

 

 선친(先親)께서는 여유만 있으면 암소나 암송아지를 샀고, 돈 쓸 일이 있어 송아지나 암소를 더러 팔아버리면 그 대신 멤쉐(배냇소)를 매었다. 멤쉐는 '번식된 후에 임자와 기른 이가 나누기로 하여 기르는 소'인데 벵작쉐라고도 한다. 즉 돈이 있는 사람은 투자를 위해 암소를 사서 기를 사람에게 주면, 그 사람은 2년 정도 길러 송아지 두 마리를 낳게 한 뒤 하나씩 나누는 것이다.

 


 

▲ 소 기르는 일의 지혜

 

 제주도는 다른 곳과 달리 밭마다 돌담을 쌓아 바람과 마소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했다. 그러기 때문에 소를 길가에 놓아 길섶의 풀을 뜯기거나 넓은 공터나 울타리의 풀을 먹도록 해도 되었다. 간혹 곡식을 수확해버린 밭이 있으면 먹을 만한 풀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밭에다 에울 수도 있다. 그런데, 한 쪽에 다른 농작물이 남아 있는 것을 모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럴 때는 빈 밭이 아니라는 표시로 대나무 가지 같은 것을 눈이 띌 만한 곳에 찔러 넣는데, 이것을 '종을 지른다'고 한다.        

 

 간혹 소가 돌아다니다가 밭담이 허술한 곡식 밭에 들어가 농사를 망치게 되면 그 농사를 배상해야 하기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말 모르는 짐승이 저지른 일'이라 하여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된다. 이렇게 곡식 때문에 소가 가지 못하는 곳이 많아 사람이 직접 돌아다니며 꼴을 베어다 주기도 하고 소분(掃墳)이 끝나 좋은 풀이 나오게 되면 묶어  지고 와 소에게 먹인다.

 

 여름이 되고 소가 할 일이 끝나면 덥고 쇠파리 극성을 부려 마을에서 견디지 못하는 암소와 송아지들은 목장으로 보낸다. 조선시대 목장이었던 중산간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각 마을의 공동목장이 되어 울타리를 정비하고 테우리를 정해 한 마리 당 보리 얼마 하는 식으로 삯을 주어 가을이 되어 선선해질 때까지 관리를 맡긴다. 추수 직전에는 꼴밭에서 풀을 베어 말려 소를 먹일 양식을 준비했다. 고구마 줄기, 콩줄기, 산디짚, 조짚도 말리면 훌륭한 사료가 되었다. 

 

 수소들은 그냥 놔두면 매일 싸우거나 암소 뒤만 따라다니기 때문에 아는 사람끼리 목장을 빌어 번갈아 돌보게 된다. 이를 '번소'라 하며 한 번에 10마리 정도 관리하는 것이 알맞으며 소 주인들은 1회에 2박3일 정도 당번을 정하고 움막을 지어 쇠번을 본다. 당번은 아침에 일어나 이상 유무를 살피고 먹이가 풍부한 곳으로 말뚝을 옮겨 박고 줄을 맨다. 낮에는 물을 먹이고 오후 선선해지면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 속담에 등장하는 '쉐(소)'

 

 이렇듯 소는 당시 우리 삶과 늘 함께 했기 때문에 쉽게 비유와 상징의 대상이 되었다. 속담에 특히 잘 나타나 있는데, 소(쉐)가 등장하는 속담을 고재환 편 <제주도속담사전>에서 발췌에서 싣는다.       

* 놈 논 건 쉐도 못 찾나(남이 놓은 것은 소도 못 찾는다) - 남이 보관한 것을 찾기 힘들 때
* 놈의 쉐 들러퀴는 건 보기 좋나(남의 소 날뛰는 것은 보기 좋다) - 남의 일을 등한시하는 심리 상태를 꼬집을 때
* 돌 멍청 담이나 답곡, 낭 멍청 불이나  곡, 쉐 멍청 잡아나 먹나, 사름 멍청 쓸 듸 읏나(돌 멍청이는 담이나 쌓고, 나무 멍청이는 불이나 때고, 소 멍청이는 잡아나 먹지만, 사람 멍청이는 쓸 곳이 없다) - 멍청해서 쓸 모 없는(오히려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나무라서 한탄할 때
* 동세간의 산 쉐 다리 빈다(동서간에 산 소 다리 벤다) - 동서(同壻)지간의 인간관계가 가까운 것을 떠올릴 때
* 뜬 쉐 울 넘나(느린 소 울타리 넘는다) - 운신이 굼뜨다고 가소롭게 여기지 말길 바랄 때
* 말 탄 양반, 쉐 탄 귀양다리(말 탄 양반, 소 탄 귀양뱅이) - 양반의 처지가 각기 다를 수 있음을 상기시킬 때
* 섭보리왓듸 들어난 쉐광 지집방에 들어난 놈은 한 번 가나문 주으릇한다(섶보리밭에 들었던 소와 계집방에 들었던 놈은 한 번 가나면 솔깃한다) - 억제할 수 없는 버릇의 병폐를 풍자할 때
* 쉐 노는 듸 쉐 가곡, 말 노는 듸 간다(소 노는 데 소 가고, 말 노는 데 말 간다) - 끼리끼리 어울리는 현상을 일컬을 때
* 쉐 다리 말 다리(소 다리 말 다리) - 이질 적인 현상을 빗댈 때
* 쉐도 왕 하문 돌아산다(소도 '왕'하면 돌아선다) -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을 나무라서 꼬집을 때
* 쉐 둔을 둔이엥 하랴(소 둔을 말 둔이라고 하랴) - 왜곡될 수 없는 진리의 엄연성을 되새길 때  ※ 둔 : 족속의 무리, 즉 소와 말 따위가 무리를 이룬 떼거리.
* 쉐똥 줏어베민 거펑 하영 뗀다(소똥 주워 보이면 전복 많이 뗀다) - 꿈의 해몽을 통해 해산물 채취의 길흉을 점칠 때
* 쉐로 못 나사 여자로 난다(소로 못 낳아야 여자로 낳는다) - 여자의 고달픈 삶을 한탄할 때
* 쉐 먹어난 듸 말 배불르랴(소 먹어난 곳에서 말 배부르랴) - 실속 없는 운신을 경계할 때
* 쉐발 검뎅 돌라 불지 못한다(소발 검다고 도려내지 못한다) - 결함을 묵인할 수밖에 없을 때
* 쉐뿔도 각각, 직시도 각각(소뿔도 각각, 몫도 각각) - 모든 것이 천편일률적으로 꼭 같을 수 없을 이치를 일깨울 때
* 쉐 잡아먹을 간세한다(소 잡아먹을 게으름을 핀다) - 게으름뱅이를 꾸짖고 나무랄 때
* 쉐 치레 말앙 촐 치레하라(소 치레 말고 꼴 치레하라) - 튼실한 소 사육의 여건을 중시할 때
* 쉐터럭이 하뎅 하여도 날이 한다(소털이 많다고 하여도 날이 많다) - 느긋한 시간 관념을 부추길 때
* 준 쉐 파리 궨다(여윈 소 파리 들끓는다) - 궁색한 처지에 난처한 일이 겹치는 현상을 빗댈 때
* 큰 쉐 큰 쉐 호멍 촐도 안 준다(큰 소 큰 소 하면서 꼴도 안 준다) - 명분에 어긋난 대우를 꼬집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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