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왜 오르느냐고 묻거든 궷물오름, 그리고 노꼬메에 올라>

김창집 2002. 12. 17. 10:21
△ 궷물오름에서 경마장을 바라보며

한밝 저수지에서 원동으로 이어지는 산록도로를 따라 가다가 경마장 위 노꼬메 입구에서 1100도로로 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오름 나그네 일행들을 만났다. 잠시 나뉘어 있었는데도 석 달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다. 원망하며 서먹했던 것도 잠깐, 일행은 일정에 따라 새로운 마음으로 새 오름엘 오른다. 누군가가 말했지, 오름에 오르는 것은 자연을 즐기는 맛도 있지만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라고.
죽어 넘어져 반쯤 묻혀 있는 망아지가 얼마 전 있었던 꽃샘바람이 얼마나 혹독했는가를 일깨워 준다.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로 접어들어 궷물오름으로 향했다. 표고 597m의 나지막한 오름이다. 동쪽 사면(斜面)은 가시가 날카로운 보리수나무와 청미래덩굴이 우거져 오르기 힘들었으나, 경계의 표시로 심어 놓은 3열의 삼나무 중 양쪽 줄을 베어 버린 곳을 따라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아래로 경마장이 보인다. 주차장에 가득 세워져 있는 승용차를 보니, 호주머니에 든 마권(馬券)을 만지며 손에 땀을 쥐고 있을 그들이 딱한 생각이 든다. 그들 중 십중팔구는 공기 좋은 야외로 나와 일주일 동안의 스트레스를 푼다고 변명할 테지만, 오히려 돈 잃고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확률로 보아 훨씬 많을 것이다. 하긴, 세상일은 생각하기 나름이어서, 그들의 눈에는 오름 오르는 우리를 더 딱하게 여길지 모른다. '시간 허비하고, 신발 헐리면서, 오름에 오르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다리만 아프주.'라고.
정상 남쪽 사면에 제법 오래된 무덤이 있어 비석을 살피니, 오소장 '묘수악(猫水岳)'으로 되어 있다. 김종철 선생의 <오름 나그네>에 보면 "자그만 암굴을 뜻하는 '궤'에서 흐르는 물이 있는 오름"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묘(猫)'는 '괴(고양이)', '수(水)'는 '물'의 훈가자(訓假字' 한자가 가진 뜻은 무시하고 그 훈만을 빌려쓴 글자)로 보아진다.

♧봄의 전령사 '박새'

앞에 크고 작은 두 노꼬메를 바라보며 간단한 점심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늦어서일까. 김밥이 유난히 맛있다. 그리고, 모처럼 사온 돼지족발은 더 인기다. 남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 큰 노꼬메를 바라보며 벌판으로 내려간다. 표고 834m, 비고 230m가 말해 주듯 삼각으로 솟은 봉우리가 시원스럽다. 저 봉우리는 오늘 오르지 않고 동쪽에 있는 족은노꼬메에 오를 예정이다. 족은노꼬메는 표고 775m에 비고 150m다. 가운데 굼부리 때문에 봉우리가 두 개로 보인다.
삼나무 숲을 통과하는데 2,30년 된 나무를 가운데 한 줄씩 무자비하게 베어 아무렇게나 방치한 게 눈에 거슬린다. 저것도 처음 심을 때는 기대를 걸고 고생하며 심었을 터이고 보면, 어디엔가 분명히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삼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두 오름 사잇길로 접어든다. 주위엔 온통 박새 순이 피어올랐다. 백합과 다년초인 이 식물은 깊은 산 습지에서 무리 지어 자라며, 꽃은 7∼8월에 연한 황백색으로 피어난다. 강한 독성이 있으며 약용으로 쓴다. 나는 이 박새를 노꼬메 지역 '봄의 전령사'로 임명했다. 어렸을 때는 새우란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두 오름 사이 어우러짐이 거의 벗어난 곳에서 왼쪽으로 난 숲길을 헤치며 족은노꼬메에 오른다. 녹다 남은 얼음이 나무 가지 끝에 구슬처럼 매달렸다. 20분 걸었는데 벌써 정상이다. 설치한 지 조금 오래된 노루 올가미를 하나 수거했다. 누가 놓았는지 괘씸하다. 동료가 내미는 좁쌀 막걸리 한잔으로 분을 삭여 본다.

▲오름에 존재하는 것

오름에는 빛깔이 있다.
오름의 모습은 하나이되 결코 하나가 아니다.
보는 방향에 따라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해마다 다르고 날마다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다르고 햇빛에 따라 다르고 바람에 따라 다르고 구름에 따라 다르고 안개에 따라 다르다.
오름은 대자연의 탤런트이다.
싸락눈이 왕소금처럼 얼얼하게 귀싸대기를 후려갈기는 그런 한겨울날 오름 위에 올라보라.
문득문득 찢어지는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은 어찌 그리 푸르른가.
절망 속에서 움튼다는 희망의 빛깔이 그러하단 것일까.
녹작지근하게 무르익은 봄빛 속에서 높이높이 날아오르는 종달새의 노래는
어찌 그리 맑은가.
우리의 무채색인 나날들, 상투적인 빛깔들이 문득 부끄럽게 돌아다보인다.
아, 나는 무엇하며 살았나. 내 빛깔은 언제 적부터 길을 잃었나.
허심탄회하게 문을 열고 가라.
탁해진 마음의 눈빛을 밝혀주는 빛깔이 오름에는 지천으로 깔려 있다.
<김순이 '오름 에찬' 중에서>

멀리 들판을 바라보니, 설화가 만발하였다. 적당히 흰 것이 억새꽃 무더기로 보인다. 주위에 있는 오름을 둘러본다. 왼쪽 벌판 너머 천아오름, 붉은오름도 정답고, 건너에 있는 이스렁오름도 여전하다. 작년 가을 우리들에게 틀(산딸나무 열매)과 정금과, 노가리 열매와 다래를 한껏 선사했던 오름이다. 시계 방향으로 노로오름, 한대오름이 형제처럼 다정하다.
사진 찍기에 몰두해 있는 작가분들에게 출발을 알리며 숲을 헤쳐 아래쪽 봉우리로 간다. 깊지는 않지만 굼부리가 길쭉하다. 순간적으로 해가 반짝 비치자 나무에 매달린 얼음 방울들이 영롱히 빛난다. 여기저기 환성이 터졌다. 주위를 살피다 가시덤불 속에서 보춘화(춘란) 몇 포기가 무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가웠다. 10여 년 전만 해도 그렇게 흔하던 춘란이 이제 산야에선 보기조차 힘들어졌으니, 무서운 세상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나쁜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번성하기를 빌며 가파른 길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