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넙거리와 사려니오름 답사기

김창집 2002. 12. 17. 11:08
△ 따뜻한 남원읍의 오름을 찾아서

폭풍주의보 속 비 날씨. 비바람이 심하니, 시골 어머님이나 뵈러 가는 게 어떠냐는 집사람의 채근을 뒤로 한 채, 빈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나그네들이 모이는 장소로 나갔다. 왜냐하면, 지난 주 답사 때 같이 오름에 한번 올라보고 싶다고 약속한 사람이 두 분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두 분은 오름 오를 날씨가 못되는 줄 지레 짐작해서 안 왔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를 외치는 회원 열두 분만이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일요일날 집안에 있으면 좀이 쑤시는 못 말리는 나그네들이다.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과 눈 섞인 비가 그치지 않을 것 같아 한라산이 그 바람을 막아 줄 남원읍으로 향했다.

누가 진한 것 한 병을 가져 왔기 말리지는 못하고 봉개동 할머니 집에서 차를 세우고 곁들여 먹을 만한 것들을 샀다. 동부산업도로를 따라가다 우회전해서 남조로로 들어 섰는 데도 여전히 비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남원읍 의귀리에서 다시 우회전한 후 얼마 안되어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쓰레기 하치장이 나온다. 쓰레기장 주변에는 까마귀가 먹을 것을 찾아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목장 문을 열어 배고픈 다리를 지나 200m쯤 가서 차를 세웠다. 우선 삶은 달걀 하나씩 먹고 중무장을 하여 오른쪽으로 난 길을 오른다. 시계를 보니, 10시 35분. 마차나 경운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길 양쪽엔 측백나무를 심어 놓았다. 곧, 내리막길이 나오자마자 왼쪽 산 옆구리께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숲이어서 많이 느끼지는 못하지만 바람이 꽤 세고 눈발까지 휘날린다.

▲ 눈보라 속에 피어난 남산제비

삼나무가 잡목에 뒤섞여 오름을 온통 뒤덮고 있다. 사이사이 햇볕을 받은 잡목은 초록색 싹을 매달고 제법 부풀어 있다. 이제 봄은 완연해진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리치는 눈비바람은 꽃샘바람인가. 등성이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니 비고가 제법 높다. 서쪽으로 내려다 뵈는 쓰레기 하치장엔 바람까마귀들이 시커멓게 모여들어 쓰레기를 뒤지느라 어지러이 군다.

한라산 위에 뭉게구름이 피어 솜이불을 덮은 듯 아름답더니만 순간적으로 시커멓게 변해버린다. 억새 밑둥을 더듬다가 우연히 남산제비를 만났다. 하얗게 수줍은 꽃잎이 청초하니 정말 아름답다. 주위에는 꽃봉오리를 매단 채 봄을 준비하는 제비꽃도 있다. 오랜만에 산에서 봄을 확인해서인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친다. 서 사장은 삼각대를 세우고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다. 비고는 100m밖에 안되지만 표고는 523m로 주위의 넙거리나 머체오름보다 높다. 그래서인지 사방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소등 같은 등성이를 타고 억새와 청미래덩굴이 우거진 곳을 따라 동쪽 정상을 찾아간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역시 삼나무다. 곳곳에 사스레피나무, 동백나무, 참식나무, 꾸지뽕나무도 길을 막는다. 이쪽 등성이에서면 저쪽이 높아 보이고, 저쪽 등성이에 서면 이쪽이 높아 보이고, 삼나무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데다 삼각점은 찾을 수 없고 정상이다 싶은 자리엔 새우란이 한 무더기 퍼져 있다. "오름! 오름!" 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위미 앞바다의 지귀도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다.

△ 삼나무에 갇혀버린 무덤과 동자석

분지 쪽으로 어두컴컴한 삼나무밭 길을 걸어 내려오며 화풀이하듯, 삭은 삼나무 가지를 후려친다. 후두둑후두둑 떨어져 나가는 재미에 태권도 옆차기도 등장한다. 몇 십 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조림했기 때문에 오늘날 오름의 식생은 파괴되고 고유한 모습도 잃어버렸다. 6,70년대 당시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은 민둥산을 푸르게 가꾸었다고 상을 타고, 조림 실적을 올린 공무원은 분명히 그 공적으로 승진을 했으리란 생각에 쓴웃음이 나온다.

컴컴한 터널이 끝날 무렵 해서 오씨 무덤이 나타났다. 1920년대에 이 무덤을 쓸 당시만 해도 앞으로 탁 틔어 시원한 남원 앞 바다가 펼쳐졌을 텐데 지금은 사방이 삼나무로 포위되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비석은 이장(移葬)해온 거라 이곳 지명은 안나오고 송당경 1소장으로 되어 있다. 외진 곳이라 동자석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지난 번 답사 때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을 들렀는데, 희원(熙園)이라고 새로 조성해 놓은 정원 입구에 팔도(八道) 동자석들이 다 모였는데, 현무암으로 되어 있는 우리 동자석 두 쌍이 눈에 띠어 이것이 도굴꾼에 의해 여기까지 온 것인 아닌가 의심하며 본 적이 있다. 가슴에는 밥주걱인 듯 동그란 것을 들고 있는데, 얼굴까지 동그란 아주 예쁜 작품이다. 후손들이 밥이나 굶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서 세운 게 아닐까 하고 좋은 쪽으로 해석해 본다. 답답함을 풀어버리자고 하면서 김 원장이 진한 것을 꺼낸다. 추위 속에 독한 술을 한 모금 마시는 것은 추위를 이기는데 도움이 된다고들 했다.

▲세상은 움직이는 사람의 것이라 했던가

무덤을 뒤로하고 내리니 바로 차를 세워둔 길에 이르렀다. 11시 40분. 차를 그냥 두고 이번에는 반대 편 머체오름엘 오른다. 그늘지고 기름진 땅이어서 그런가. 멀꿀(멍줄)이 넓은 잎사귀를 달고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조그만 등성이를 넘자 이건 어딘가 낯익은 모습이다. 애월읍에 있는 납읍 금산과 착각할 정도로 식생(植生)이 닮았다.

돌무더기가 모여 있거나 여기저기 서 있는 모습이 납읍 금산을 연상시킨다.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는가 하면, 참식나무와 구실잣밤나무, 거기에 매달린 콩짜개란도 같은 모습이다. 엄청나게 크고 오래된 구실잣밤나무를 만났다. 모두들 크다고 야단들이다. 다만 이곳에는 금산에 많은 보리밥나무와 후박나무, 종가시나무가 드물다는 점 정도일까.

목석원에 가져다 놓으면 갑돌이 정도는 될 괴석이 마주 보이는 정상, 오래된 식나무 아래에서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남은 술잔을 기울인다. 추운 자리라 송 선생이 가져온 뜨거운 커피도 제 맛이다. 세상은 움직이는 사람의 것이라 했던가. 비가 온다고 바람이 분다고 이불이나 쓰고 누워서 브라운관이나 달구고 있을 사람들이 어찌 이 맛을 알까? 또, 맛있는 점심 메뉴를 가지고 토론하는 즐거움까지.

남조로에 들어서서 조금 달리니 온 들판이 허옇다. 심하게 나뭇잎을 두드리던 눈비바람이 이곳에선 눈보라가 된 것이다. 네 거리에서 다시 동쪽으로 조금 가니 넓은 벌판에 '아진가든'이 앉아 있다. 따뜻한 방안에 앉아 오겹살을 굽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성불오름이 손에 잡힐 듯하다. 성깔 있는 조교라면 선착순 돌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옆으로 비치미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감은이도 정답다. 김 원장은 내가 갖고 간 3년 묵은 과일주를 탐닉하고 있다.

오리고기국수를 먹으며 많은 토론과 오름 공부를 하고 나서, 육지서 온 손님을 맞으러 김 원장과 강 화백은 함덕 별장으로 가고, 나머지 일행은 서 사장의 차로 눈 속에 핀 복수초를 보러 절물오름으로 차를 돌렸다. 해가 안 비쳐서 그런지 복수초는 눈 속에서 모두 잎을 오무리고 수줍게 모여 있다. 아쉬운 대로 숲에서 어렵게 찾아낸 나도바람꽃의 해맑은 모습을 보며, 오늘도 오름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