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4·3 비극의 현장 - 아끈다랑쉬오름에서

김창집 2002. 12. 17. 11:18
△ 새봄 찬바람 속의 봄나들이

바람이 차다. 동거미오름에 들렀던 일행은 다랑쉬오름을 오르기 위해 송당 마을을 거쳐 비자림으로 향했다. 비자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가다가 비자림 입구를 지나 곧장 동쪽으로 나 있는 길로 접어드니, 오른쪽 앞으로 다랑쉬오름이 엉거주춤 모습을 드러낸다. 표고가 382m로, 오름의 왕국이라는 구좌읍에서 높은오름(405m) 다음으로 높다. 다랑쉬오름 막 지난 곳, 다랑쉬와 아끈다랑쉬 오름 사이에 시멘트 포장 길이 나 있다. 500m나 달렸을까? 차는 어느덧 두 오름의 중간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려 동쪽으로 비스듬히 나 있는 골목길을 걸어 아끈다랑쉬로 향했다. 밭 구석에 심어 놓은 유채 잎사귀 위로 누가 노란 물감을 토해 놓았다. 찬바람 속에서 보아서 그런지 그 빛깔이 너무도 처연해 보인다. 봄의 징후를 찾으러 기웃거리는데 쑥이 무더기로 나 있다. 쑥떡 해 먹기는 어리고 쑥국거리로 그만이겠다. 오랑캐꽃으로 불리는 제비꽃도 앙증맞게 보라색 꽃잎을 내밀고 있다.
본토에 비해 우리 제주도는 산나물 문화가 덜 발달되어 있다. 육지부에서도 요즘은 비닐 하우스가 있어 사시사철 없는 채소가 없을 정도가 돼버렸지만, 푸성귀가 귀했던 옛날에는 독성만 없으면 봄철 푸른 것은 모두 캐어다 먹었다. 심지어는 보리까지 뽑아다 먹을 정도였으니까. 제주도에서는 겨울에도 우영팟(텃밭)에 배추며 무가 청청 한데 군색하게 산나물을 뜯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보리밭에 김매는 일을 비롯해서 들일, 바다일 좀 바빴을 것인가.

▲ 축구장을 연상시키는 굼부리의 구조

아끈다랑쉬는 비고가 58m여서 쉽게 오를 수 있는 오름이다. 서사면으로 난 길 양쪽 우거진 덤불 곳곳에 새우란이 보인다. 정상으로부터 움푹 패인 둘레 1,454m의 굼부리(분화구의 제주어) 안은 기계로 꼴을 베어 버려 마치 축구 경기장을 연상케 한다. '조금 손질해서 월드컵 경기장으로 쓴다면 비용도 절감되고 뒤에 관리비도 필요 없고 좋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본다. 세 경기 치르려고 서귀포에 짓는 경기장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두고두고 애물단지로 남는다면 정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오름 위에는 간혹 새우란이 보일 뿐 밋밋한 풀밭인데, 다만 남쪽 정상부에 장식처럼 담을 두른 무덤이 하나 외롭다. 다가서 비문을 보니, 위치가 '소월랑봉(小月郞峰)'으로 표기되어 있다. 본래 '아끈다랑쉬오름'을 이두식으로 음과 훈을 빌어 표기한 것이다. '아끈'은 제주어인데 '작은'의 뜻으로 '아끈줴기'(음력 이레와 스무이틀날의 조수)같은 데 쓰이는 말이다. '다랑쉬'의 뜻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평효 박사는 '다랑'을 '높다(山高)'는 뜻의 고구려어 '달(達)'과 같은 계열로 해석하나 그 근거가 확실치 않다.
남쪽을 바라보니,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용눈이오름과 한라산의 손자처럼 생긴 손자봉이 두렷하다. 서쪽엔 이 아끈다랑쉬의 아버지 뻘인 다랑쉬오름이 우뚝 서 있다. 2년전 겨울, 동쪽 경사면으로 이 오름을 오르는데 볼래(보리수 열매)가 지천으로 열려 있어 그것을 따먹노라 상당 시간 지체했던 생각이 난다. 오름 전체 둘레가 3,391m에 이르고, 산 자체의 높이인 비고가 227m나 되다 보니, 엄청난 몸집이다. 게다가 나무가 없는 중간부 위쪽으로 무척 가파라 섣불리 덤볐다가는 낭패 보기 일쑤다.
산 정상부에는 크고 깊은 깔대기 모양의 원형 분화구가 있는데, 바깥 둘레가 1,500m로 깊이는 백록담과 같은 115m라 한다. 어떤 사람은 어림잡아 이곳이 산굼부리보다 깊다고 우기나 산굼부리는 깊이가 200∼380m로 나와 있고 왕이메는 101.4m로 이곳보다 조금 얕다.
이렇듯 높고 특이한 지형이어서 그런지 고성 사람 홍달한(洪達漢)이 올라와 임금의 승하를 슬퍼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조선조 헌종(憲宗) 때에, 남제주군 성산읍 고성리에 홍효자가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남다른 부모 공양에 칭송이 자자했다. 그는 아버지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매일 아버지의 변을 맛볼 정도로 효자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 헌종 임금이 승하했다. (1720년 숙종 임금이 승하했을 때라는 기록도 있다.) 그는 이곳에 올라와서 분향하고 북향사배를 한 뒤 통곡했다. 어떻게 극진했던지 서울 장안에까지 그의 충효 사실이 알려져 그에게 효자비를 내렸다. 그 효자비가 지금도 고성에서 수산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져 있다.
아끈다랑쉬 양지 바른 남쪽 사면을 자세히 살피니 할미꽃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숙인 채 두서너 송이 피어 있고, 양지꽃이 송이송이 별같은 모습으로 햇볕을 즐기려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 4·3의 원혼들이어, 편안히 잠드소서

가까운 벌판 쪽에는 '무자년 난리'*로 사라져버린 다랑쉬마을 흔적이 허허롭다. 1992년 3월말,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다랑쉬굴에서 4·3 희생자 시신 11구가 44년 전 처참하게 몰살당한 모습으로 발견되어 우리를 경악케 했다. 제민일보 4·3 취재반과 4·3 연구소 공동 조사로 밝혀진 이 현장엔 구좌읍 하도리 출신 3명의 부녀자와 아홉 살 난 어린이가 끼어 있었다 하니 실로 아연할 수밖에. 더구나, 어두운 굴속에 오랜 세월 갇혀 있었던 유해들은 한이 채 풀리기도 전에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지고 말았다.
그 때 여기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죽어갔으며, 그들의 남긴 한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여, 나는 연작 소설 <섬에 태어난 죄>② '해원(解寃)' 편을 썼다. 그 속의 한 주인공은 귀양풀이** 때 무당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슬프구나 사십사년. 너무하구나, 사십사년. 우리가 못 다한 원(寃)을 풀어, 시원한 해결을 바랐는데. 세상 인심 야박도 하다. 자기들 생각만 하는구나.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시오. 당신이였으면 어떻게 했을지. 한 줌 재로나 안겨 봤으니, 그것으로나 위안할까? 우리 어머니 날 낳을 적에 태(胎)를 바다에 던져버리던데, 이제야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다로 돌아가네.
서러운 도민들이어, 마지막 소원입니다. 우리 누명 벗겨 주세요. 이대로 저승에 가면 제대로 행세를 못합니다. 겁결에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왔으니, 어서어서 오해 풀고 저승길 가기 편케 해주십시오. 굴러다니던 돌멩이가 굴속에 들어갔다고 옥(玉)으로 변합니까. 오늘날 밝은 세상에 못할 일이 뭐 있습니까. 청와대 들쑤시려던 김신조도 넓은 아량으로 용서했고, 비행기 폭파시키려던 김현희도 이제 다 용서를 했는데. 설령, 그때 우리가 잘 살아보고자 손들고 외쳤다 한들 그것이 무슨 큰 죄입니까.
하늘같은 마음으로 도민의 화합을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괴롭게 죽어간 흔적은 하나도 내다버리지 말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사람들에게 구경시키세요. 섬에 태어난 죄는 우리가 다 지고 갈 테니까. 그러면, 우리가 저승에서 힘을 모아, 도민들 편안하게 해서 공을 갚겠습니다. 난 이제 저승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돌아서노라. 분부웨다."

[주] *무자년 난리 - 1948년에 있었던 4·3을 말함.
**귀양풀이 -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원을 푸는 굿의 하나.
***한 줌의 재 -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유골들은 어떤 연유에선지 화장한 뒤에 바다로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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