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조냥 정신(精神)

김창집 2005. 9. 16. 00:26

♣ 김창집의 제주 전통문화 이야기 ③
 
 이 글은 제주민예총이 발간하는 '계간 제주문화예술' 2002년 겨울호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지역 문화를 얘기하는 것이어서 방언이 많이 들어갔는데 블로그에 '아래아( · )'를 넣을 수 없어서 대신 '오'로 바꿨음을 알려드립니다. 따라서 제목의 '조'도 '아래아( · )'가 들어간 글자입니다. 사진은 지난 일요일 오름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 마타리 꽃

 

▲ 제주도민 빚 1인당 69만원으로 전국 최고
 
 어깨가 무겁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렸는가? 지난 일요일 서울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휘황찬란한 불빛이 명멸하는 섬을 바라보고는 한숨부터 나왔다. 저 도깨비불을 삼켜버린 전등불은 상당 부분 외국에서 사온 석유로부터 얻어지는 전력에 의한 것들임이 분명한데…. 관광으로 먹고살려면 꼭 저래야 되나? 그런데 10월 3일부터 3박4일간 일본 큐슈지역을 답사하면서 보니까, 인구 44만의 나가사키(長崎)나 인구 65만의 구마모토(熊本) 같은 관광도시에서도 저녁 9시가 못 되어 가게가 거의 문을 닫아걸고, 필요한 곳만 불이 켜져 있었다. 따라서 주택가는 조용하고 어둑하여 숙면하는데는 쾌적한 분위기였다.   

 

 우리도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아낄 부분은 아껴야 한다. 한밤중 중산간 마을을 지나다 봐도 가로등이 여전히 켜져 있다. 골목마다 빛나는 가로등에 밤잠 설치기 일쑤다. 관광객이 아닌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업소나 점포인 경우도 밤새 상호를 밝히는 광고등 불빛이 켜져 있다. 도시든 시골이든 골목마다 자동차가 가득하고 가까운 곳에 갈 때도 승용차를 타고 간다. 애써 만들어놓은 자전거 도로는 예산만 낭비한 채로 있고, 시내버스는 텅 비어 있다. 신구간이면 내다버리는 쓸만한 가재도구와 옷가지들. 골목마다 음식물 찌꺼기가 악취를 풍기며 도둑고양이를 키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절약(節約)'이란 말을 잊어버렸다. 과거 척박한 섬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조상들은 '조냥'으로 근근히 버텨 나갔다. 거기다가 나라에 올리는 진상품을 마련해야 했고 위에서 내려온 관리들에게 수탈까지 당하는 형편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근래 들어 밀감나무를 심고 관광지로 각광 받게 되면서 한 때 반짝 풍요를 누렸다. 거기서부터 씀씀이가 헤퍼지기 시작했다. 제주도민 빚이 1인당 69만원으로 전국 최고고, 신용카드 씀씀이도 전국 1위라 한다.

 


 

* 고추나물 꽃

 

▲ 사라진 지 오랜 삼무(三無)의 전통

 

 보도에 따르면 제주지역 자치단체의 채무로 인해 도민 한 사람이 부담할 지방 채무액이 이자를 제외한 원금으로 따져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1위다. 행정자치부가 25일 2000년 말 기준으로 밝힌 전국 16개 시, 도의 지방채무 현황에 따르면, 제주도민 1인당 지방채무 부담액만 68만9천 원으로 전국 평균 32만8천 원에 비해 2.1배나 된다. 또 2002년을 기준으로 한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 재정자립도는 평균 54.6%인데, 제주도는 서울(95.6%), 경기, 인천, 대전, 부산, 대구, 울산, 광주, 경남에 이어 10번째로 33.8%로 나타났다. 

 

 한편, BC카드사가 올 1월부터 9월까지 지역별 신용카드 사용액을 조사한 결과, 이 부분도 제주도가 1위로 나타났다. 제주지역 회원 1인당 월 평균 19만1천 원을 써서 전국 평균 15만7천 원과는 3만4천 원이 차이가 난다. 물론 제주도는 생필품이 대부분 육지서 들어와 물가가 비싸고, 육지로 나들이 할 경우에 교통비가 더 들어 부담이 늘어날 수 있을 테지만, 외적인 영향도 크다. 일생에 한 번 또는 몇 10년을 별러 찾아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만들어놓은 시설이나 음식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는 일도 씀씀이가 헤퍼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고유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3무(三無)'는 깨지고 말았다. '대문 없고, 도둑 없고, 거지가 없다'는 건 옛말이 된지 오래다. 물론 거지가 없다는 데 대하여는 수긍이 안 갈지 모르지만, 따져 보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빚으로 견디는 사업소나 개인이 수없이 많다. 지방 재정 자체가 빚으로 유지되고 있질 않은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 미풍으로 전해지던 '조냥 정신'을 발휘할 때라고 본다. 감귤 값이 폭락하고 갈수록 관광 경쟁력이 위협을 받는 시기에 살아남는 법을 조상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 산비장이 꽃

 

▲ 속담에 나타난 선인들의 절약 정신

 

 "생이 한 마리로 일뤠 잔치 호당 남앙 사둔칩이 졍 들어가당 이문에 걸린다"는 속담은 "새 한 마리로 7일 잔치하다가 남아서 사돈집에 지고 들어가다가 대문에 걸린다"는 뜻으로 검약(儉約)의 극치를 이루는 속담이다. 과거 대사(大事)의 하나인 결혼 잔치는 아무리 절약하더라도 돈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혼기를 앞둔 집안에서는 잔치를 치르는데 가장 비중이 큰 돼지는 집에서 길렀다. 아무리 큰 잔치라도 돼지 한 마리면 충분했다. 피와 내장을 이용하여 순대를 삶고 돼지기름으로 여러 가지 전을 부친다. 돼지고기 삶은 국물로는 몸국을 끓였다. 많은 사람을 대접하려면, 고기는 얇아질 수밖에 없다. 고기 잘 써는 도감은 고기 점에서 달 그림자가 비칠 정도의 실력을 뽐냈다.

 

 "노리 또려난 막뎅인 3년 동안 등겁나"라는 속담은 "노루를 때려잡은 몽둥이 3년 우려먹는다"는 뜻으로 전국에서 통용되는 속담과 비슷하지만 자린고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행위다. 어디 노루 때린 몽둥이 뿐이겠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옷은 대물려 떨어질 때까지 입는 것으로 알았다. 갈옷은 일할 때 아무나 갈아입어도 되었고, 명절 옷들은 뜯어 곱게 빨아 풀한 다음 다시 만들어 입혔다. 형이 입던 교복은 동생이 입는 경우가 보통이고, 떨어져서 못 입었지 요즘처럼 유행이 바뀌어 못 입은 경우는 없었다.


 


 

* 나비나물 꽃

 

 "혼 돌에 게역 시 번, 조베기 시 번 호민 집안 망혼다"는 "한 달에 미시가루 세 번 수제비 세 번 하면 집안 망한다"는 뜻의 속담으로 식량난을 극복해온 삶의 모습이 선연하다. 밥을 주축으로 했던 당시, 미시가루와 수제비는 간식으로 여기고 이것마저 맘대로 해 먹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선친께서는 보리 이삭을 주워오면 그것으로 미시가루를 해주었다. 사실 미시가루는 그 자체를 물에 타 먹어 점심을 때우거나 식은 보리밥에 버무려 먹었고, 수제비도 국 대신 먹거나 그것으로 저녁을 때우는 일이 많았다. 

 

 "3월 보름 물찌엔 하우장각씨도 책갑졍 얼른다"는 "3월 보름 무수기에는 선비 부인도 책갑(冊匣) 지고 다닌다"는 뜻의 속담이다. 사실 사방의 바다인 섬에 살았던 조상들에게 자신의 노력만 하면 얻어질 수 있는 해산물은 반찬 걱정을 덜어주면서 모자란 단백질의 공급원이 되었었다. 인구가 비교적 적었을 당시 오염이 안 된 바다는 제주 사람들의 생명을 지탱해준 삶의 터전이었다. 물이 나간 다음에 채취할 수 있는 미역, 톳, 모자반, 청각, 우뭇가사리, 패, 파래 등의 해초를 비롯하여 전복, 소라, 오분제기, 보말, 매홍이, 대합, 삿갓조개, 가막부리, 조개 등의 패류와 문어, 낙지, 성게, 해삼, 군소, 게, 군부 등은 밥상을 풍성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 중대가리나무 꽃

 

▲ 지금이야말로 '조냥 정신'을 발휘할 때
    
 흔히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제품이 안 팔리면 기업은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고, 그러면 실업은 늘어난다. 실업자가 많아지면 소비가 더욱 둔화되고 결국 구매력을 잃게 된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면 소비를 많이 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나온 말인 것 같다. 더욱이 요즘의 무역은 일방적인 것을 허용하지 않은 구상무역 형태가 많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상대국의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들여오는 물건이 소비재인 경우 그걸 소비시켜주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소비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낄 것은 아껴야 되고, 줄일 것은 줄여야 한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돈을 풀어 없는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소비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은 진짜 미덕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비싼 돈을 주고 사들여오는 기름이나 소비재인 경우는 '조냥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고장에서 나는 것으로 충당할 수 있는 것들은 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이용해 주어야 한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행심을 조장하는 데에 뛰어드는 어리석은 행위도 멈출 때다.

 

 우리 지방 재정이 이렇듯 빚이 많아진 데는 도로 개설하면서 쓴 비용도 한 몫 단단히 거들었다고 한다. 지금 섬 곳곳을 다녀 보면 불필요한 길이 많다. 더욱이 길이 새로 생김으로써 아름다운 자연이 파괴되고 오염이 가속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걸어가서 볼 것이 있고, 그냥 놔두어야 더 빛날 것을 애써 돈을 들여 개발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경우도 있다. 무작정 시설만 해놓는다고 관광객이 몰리는 것은 아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필요한 '조냥'은 섬 자체를 아껴두는 게 아닐까?

 


 

* 물레나물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