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바다 하나, 섬 세 개

김창집 2003. 4. 3. 10:48

탐라문화보존회 서귀포시 지역 답사기

 



(이중섭 기념관에서 바라본, 그가 살던 초가집)


▲ 이중섭이 살던 초가집의 은방울꽃 닮은 이름 모를 꽃


'이중섭전(李仲燮展)'

그가 세상을 떠난
1956년 9월 6일
서울 적십자병원 무료병동 옆
영안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이 지난
1999년 3월 이른봄
국립박물관 옆 현대화랑 앞길에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죽은 이중섭을 만나러,
그가 은박지 위에 남긴
몇 마리의 닭과 소와 게 그리고
그의 두 아들과 아내에게 쏟았던
눈물겨운 사랑의 흔적들을 만나러
사람들이 연일 줄을 서 있다

세상은 살아 있는 자에게는 냉혹하고
떠나간 자에게는 관대한가?
사람들은 아직 이 땅에 살아 있는
많은 이중섭은 못 알아보고
죽은 이중섭만 보고 있다.

--- 임보의 '이중섭전' 전문




(이중섭이 살았던 집에 핀 은방울을 닮은 꽃)

 예술이 뭔지.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던가? 지난 3월 6일 강화백과 함께 들렀던
이중섭 기념관의 '이중섭과 친구들' 전시회장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130명의 탐문회
회원을 동반하고서다. 그 때 받은 감동이 너무 커서 도저히 혼자 삭일 수 없었기 때문
에 일행을 맨 먼저 이곳으로 안내한 것이다. 이중섭 거리 입구에 내려 앞장서 휘적휘적
걸었다.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사람 모양. 옛날에 그도 고픈 배를 움켜잡고 이 거리를
이렇게 걸었겠지. 옛 자리에 새로 지은 그가 세 들어 살던 초가집은 아직 때묻지 않아
생경한 채로 있었다. 정낭도 좋고 송악도 좋은데, 은방울꽃을 닮은 저 꽃의 이름은 무
엇인가? 깜빡 속을 뻔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가족과 함께 피난을 와 1년여 동안 머물렀던 곳. 서귀포시가
그를 기리기 위해 이중섭 거리를 만들고 이곳에 전시관을 개관해 마련한 첫 기획전시회.
이는 서울 가나 아트센터 이호재 대표가 화랑 개관 20주년을 맞아 이중섭의 원화 8점과
그의 친구들인 권옥연 김병기 김환기 박고석 박생광 박수근 윤중식 이응노 장리석
장욱진 전혁림 정규 중광 최영림 하인두 한묵 한봉덕 황염수 황유엽 등의 작품 등 모두
65점을 기증한 걸 계기로 마련된 것이다. 세상 인심이 각박하다지만 저렇게 멋있는 사람
도 있다. 원화 없이 복사본만 걸려 있는 전시관이 너무 애처로워 그와 절친하게 지낸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기증했다 한다.



(전시관에 걸려 있는 이중섭의 친구, 손용성의 '석류')


▲ 고근산에 올라 바라보는 서귀포 시가지와 섬들

 서귀포 신시가지 위에 우뚝 솟은 표고 396.2m의 오름. 이 오름에 오르면 서귀포 시내는
물론 서귀포 앞바다에 떠있는 지귀도, 섶섬, 문섬, 범섬이 다 보인다. 어디 그 뿐이랴.
맑은 날이면 저 멀리 송악산 너머 가파도, 마라도까지 볼 수 있다. 그래서 '산(山)'이란
이름이 붙었는가? 산남의 모든 오름을 호령하는 기세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옆에는
장딸기 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다. 벚꽃은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개나리꽃 옆에 새잎이
소복이 돋아났다. 비스듬히 오름으로 나있는 길을 걸으며 자주괴불주머니, 제비꽃, 민들
레꽃, 양지꽃 등 해맑은 얼굴들을 만난다.

 승용차를 두고 오름에 오르는 초입에 섰다. 이 고장 출신 시인 한기팔의 시와 뒤에
김소월의 '산유화'가 새겨진 나무판을 보며 오름엘 오른다. 이곳 역시 아침저녁 운동과
산책을 하게끔 등산로를 정비해 놓았다. 철도 받침목으로 사용했던 나무를 박아놓아서
발을 딛는 촉감이 그만이다. 상수리나무와 밤나무엔 아직 물이 오르지 않았는지 싹이
트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 오름 남동사면 중턱에는 예전에 국상을 당했을 때
올라와 울며 절하였다는 '머흔저리'라는 곳에 곡배단(曲拜壇)이 있고, 남서사면 숲에는
꿩 사냥하던 개가 빠져 죽었다는 '강생이궤'라는 수직동굴이 있다. 전에 산책길이 이곳에
나 있지 않았을 때는 그곳 억새밭으로 즐겨 오르곤 했는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침 산책을 하듯 땀을 흘리며 한 달음에 올라 시가지를 바라본
다. 아무래도 봄이어서 황사현상의 흔적이 남아 선명하게 보이진 않으나 오히려 신비스
러운 느낌을 준다. 전설에 의하면, 제주섬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거대한 여신
설문대할망이 한가한 시간이면 곧잘 한라산을 베개 삼고 이 오름 분화구인 굼부리에 궁
둥이를 얹어 앞바다 범섬에 다리를 올려놓고 누워 발로 물장구를 쳤다는 얘기가 있다.
한라산은 여기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볼 정도로 가깝게 보이는데, 아직도 곳곳에 허연
눈을 이고 있다. 배낭에 넣고 온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서귀포 시인 김용길을 생각한다.
대학 강당에 있는 신문사 비둘기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토해내던 젊은 날의 언어들….




(고근산에서 만난 제비꽃)

오너라, 그대들이여
여기 남국의 하늘 끝 수평선 닿은
포구의 마을 서귀포로 오너라

동방의 영산 한라산
뻗어내린 산줄기 오름들이
둘레둘레 마을을 에워싸고

전설처럼 흘러내리는 계곡들
천년 숲 용소를 끼고
방아찧듯 펑펑 쏟아지는 물줄기
그 우레 같은 굉음(轟音)
항상 마을을 깨우고 있음이니

일출의 바다에는
둥글둥글 원무하는 금빛 물살
하나, 둘, 셋 돌섬들이
의좋은 형제처럼
줄다리기하듯 물살 차내고
파도가 가르며 달리는 어선들
풍어의 깃발들이 찢어질 듯 펄럭인다

여기 돌섬 밑 벼랑에 서 보아라
아니면, 고근산 정상 하늘 짚고 서 보아라

--- 김용길 '서귀포 서시(序詩)' 앞부분



(서귀포에서 본, 잎이 많이 돋아난 개나리)

▲ 컨벤션센터와 고원방고(羔園訪古)의 현장 염돈과원

 이번 답사는 정기총회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회의장이 필요했다. 그것도 버스 1대에
탈만한 인원 같으면 서귀포 시내에서 식당을 이용할 수도 있는데 버스 3대에 가득한
131명이 되다보니 할 수 없이 큰 회의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국제회의장인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식당을 빌게 되었다. 지난 3월 22일 개관한 컨벤션센터는 제주도
를 국제회의 중심도시로 육성하기 위해서 도민 출자금 437억 원 등 모두 1,806억 원을
투입헤서 지은 5만4,876㎡의 부지에 지하 2층, 지상 5층, 연건축 면적 6만2,125㎡ 규모.
6천원 짜리 해물탕은 깔끔하기는 했지만 밑반찬이 조금 약하다고들 야단이다.

 개관에 앞서 인기 절정의 드라마 SBS TV '올인'의 촬영 장소로 사용되었던 컨벤션
센터는 중문 대포리 바닷가 주상절리로 유명한 곳에 위치해 있다. 작품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유리창 너머로 바다가 시원히 내다보이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이
속에는 회의실과 이벤트홀, 비즈니스센터 등으로 꾸며졌는데, 회의실인 탐라홀은
3,5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으며, 8개 국어 동시 통역 시설과 대형 콘서트를 소화할
수 있는 전기 음향시설도 갖췄다. 다음달부터 15개의 국제회의와 4개의 국내회의 유치를
확정했으며, 27건의 국제회의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2004년 5월에는 3,500명이 참가하는
아시아개발은행총회(ADB)가 개최될 예정이다.

 오다가 들른 고둔과원(羔屯果園) 터는 순력에 나선 이형상 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가
1702년(숙종 28) 11월 초6일부터 나흘간 쉬었다 간 곳이다. 순력도에 왕자구지
(王子舊地)라고 표기되어 있는 이곳은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에 나오는 고득종이
별장터로도 알려져 있다. 그림에는 과원 한쪽에 위치한 왕자 옛터에서 기녀들이 거
문고를 연주하는 가운데, 풍악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과원의 방풍림으로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과원 밖에는 참나무 밭과 매화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운랑천(雲浪泉)으로
추정되는 물과 논이 나와 있다. 순력도에 나오는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데, 다만
시원하게 흘러나오는 샘 아래쪽에서 빨래하는 아낙네의 손길만 바쁘다.



(중문 시내에 한창인 활짝 핀 벚꽃)


▲ 서귀진의 현장과 배를 타고 본 서귀포 앞 바다

 1702년(숙종 28) 11월 초5일 이형상 목사가 순력하는 그림인 서귀조점(西歸操點)의
현장인 서귀진터는 솔동산에 있는데, 그 자취가 뚜렷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대한예수
교 장로회 서귀포 제일교회 내 제일유치원 옆에 있는 1필지와 황소고기 뷔페를 팔고
있는 '탐라성' 위 1필지는 도에서 구입했는지 임시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2001년
11월에 제주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55호로 등록되어 있다고 새긴 표석이 애처로울
정도로 성 굽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림에는 진성이 바다에 바짝 붙어 있는데
지금에는 떨어져있는 것으로 미루어 해방 후 많은 매립이 이루어졌겠다.

 순력도에는 서귀진의 위치와 주변 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으며, 서귀진내의 건물로
병고(兵庫)와 창고, 객사(客舍)등이 보인다. 이 날 행사에는 정의현감과 더불어 대정
현감이 함께 참석하였는데, 이는 다음 순력(巡歷)지역이 대정현 지역이기 때문에 목사
를 배행하기 위해 이곳까지 나온 것이다. 당시 서귀진의 조방장은 원덕전(元德全)이었
으며, 성정군 68명과 군기 그리고, 목자(牧子)와 보인(保人) 39명과 말 237필도
아울러 점검하였다. 서귀진 소속이 봉수는 자배(資盃) 호촌(狐村) 삼매양(三每陽) 봉수,
연대는 금로포(金路浦) 우미(又尾) 보목(甫木) 연동(淵洞) 연대이다.

 마지막으로 배를 타고 돌아본 서귀포 해안은 황홀 그 자체였다. 한국해양 레저개발
전경택 대표의 협찬으로 우리가 탔던 낭만의 유람선 '로맨틱 크루즈'는 1시간 20분
동안 정방폭포 앞바다를 거쳐 문섬과 섶섬, 문섬과 범섬을 돌면서 섬의 아름다운 모습
과 맑은 바다 위로 미끄러지며 만들어놓는 물보라로 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동양에서 하나뿐인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인 정방폭포 앞에서 흐르는 물의 곡선을
감상할 수 있다니. 또 한라산을 중심으로 바퀴처럼 구르는 오름들, 그리고 서귀포 시
가지가 들썩거리는가 하면, 세 개의 섬의 둥둥 떠다니고. 비단 손에 든 시원한 캔맥주
가 아니라도 꼭 신선이 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2003. 3. 30.)



(문섬과 섶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