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문화보존회 대정읍 답사기[2003. 5. 18.]
(단산 자락 너머로 보이는 산방산)
▲ 마늘 냄새에 취해 그냥 지나쳐버린 도요지
5월 셋째 주, 탐라문화보존회에서 도내 답사하는 날이다. 결혼식이 유난히 많은 날
이어서 그런지 총인원 43명만 등록했기 때문에 한 대의 차로 갈 수 있어 좋다. 날
씨도 화창하기보다 적당히 흐려서 답사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목적지인 대정읍으
로 가기 위해 서부관광도로로 들어섰다. 5월의 벌판은 어느새 짙은 초록이다. 오늘
의 일정에 대해 대충 소개하고 나서 점심 예약을 했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만미식
당의 해물 전골. 한 상에 네 사람씩 해서 2만원 했던 것이 만원 올랐다고 5천원 깎
아 2만5천 원씩 내란다.
대정읍으로 나뉘는 길로 들어서 한 참을 가다가 서광리에서 우회전하여 구억리 쪽
으로 방향을 바꿨다. 구억 마을 몇 군데 흩어져 있는 도요지를 보기 위함이다. 제주
의 도요지는 선인들의 생활도구의 하나인 물허벅, 항아리 같은 옹기를 굽던 곳이다.
제주에서도 고려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대접, 병, 접시 등 분사청자와 분사편병 또는
흑유(黑釉) 등을 많이 산출했으나 당시의 도요는 알 길이 없고, 속칭 노랑가마와 검
은 가마라 하는 옹기 가마만 살필 수 있다.
(요즘 제주도 전역에 향기를 뿌리고 있는 감귤꽃)
대정읍 중산간 지대는 대토로 이용할 수 있는 흙이 풍부하고 물이 좋은 관계로 도
요지가 많았다. 여기에서 생산한 것은 주로 옹기로서 자라병, 기름병, 허벅, 물항,
단지, 고소리 등 일상생활 용구들이었다. 대정읍과 한경면 지역의 가마는 거의 대부
분 김기홍 씨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하며, 1968년 구억리 서쿠지 노랑굴에서
마지막 작업이 있었다. 구억리에는 속칭 '포제동산'과 '서쿠지', '폭낭굴'을 비롯하
여 7∼8곳에 가마가 있었으나 지금은 '서쿠지'와 '포제동산' 두 곳뿐이다.
마침 밀감 꽃이 피어 곳곳에 마늘 캐는 밭에서 나는 냄새와 어울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곳 대정읍은 마늘 주산지다. 누군가가 "마늘 냄새 때문에 제아무리 기
세 등등한 사스(SARS)인들 쉬 들어올 수 있겠느냐."고 농담을 하는 바람에 모두
웃는다. 그 바람에 도요지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길이 좁아 차를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오다가 보자고 양해를 구하고 바로 단산으로 달렸다. 이런 유적은 마을 입
구에 안내판을 세우고, 현장으로 인도하는 표지판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잘 알
려진 관광지는 멀리서부터 요란스레 이정표를 세우는데, 이런 곳은 소홀하다.
(전날 예비 답사 때 찍은 단산의 석양)
▲ 동심의 세계로 이끈 5월의 단산(簞山)
좁은 길을 굽이돌아 들어가 향교 앞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벌써 타작을
마친 맥주보리를 주차장 구석 아스콘 위에 널어놓았다. 언제나 눈에 익은 단산이
눈앞에 웅장하게 펼쳐진다. 단산(簞山)은 '바굼지오름(破軍山)', '바구미오름'으로도
불리며,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해 있는 오름이다. 표고 158m, 비고 113m,
둘레 2,566m, 면적 339,982㎡. 응회구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 침식에 의
해 분화구의 일부만 남아 있다. 바굼지오름의 응회구는 제주도의 지질학적 층서 구
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쇄설성 퇴적이다.
이는 주변의 산방산 용암돔과 용머리 응회암층의 형성연대와 직접 대비되는 것으
로, 제주화산도의 기반형성과 옛 지도 복원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기생화산체의 위치 결정과 함께 오름의 노두는 오랜 세월 파식(波飾), 풍식(風飾)에
의하여 지금은 골격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바위봉우리가 중첩된 북사면은
수직의 깎아지른 벼랑을 이루고 있으며, 남사면은 다소 가파른 풀밭에 소나무, 보리
수나무가 서있다. 대정읍 지역 답사인데도 굳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오래된 대정향
교가 있기 때문이다.
(한약재로 쓰는 인동덩굴 꽃)
도착한 시각이 09:50. 11시 반까지 버스에 돌아오기로 하고 앞장서서 향교를 지나
샘이 있는 산골짜기로 들어섰다. 인동덩굴이 꽃을 피워 향수를 자극한다. 꽃을 따서
약재로 판다고 보리 베는 밭에 가서 아기를 보살피다 너무 정신이 팔려 욕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애를 들쳐업고 밭 구석을 헤매다 뱀에 물릴 뻔한 적도
있었다. 벌노랑이, 미나리아재비, 엉겅퀴꽃, 찔레꽃을 일별하고 나니, 상동나무마다
시커멓게 익은 열매가 매달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나무에 매달려 입술이 꺼매지는
줄도 모르고 잘도 따먹는다.
정상 북쪽으로는 너무 가파라 다가서면 위험하다고 풀밭으로 인도하여 막걸리를
펼쳐 놓았다. 바다 위로 가파도, 마라도, 형제섬, 그린 듯이 무늬진 벌판과 마을, 그
리고 멀리 오름들…. 어디를 보아도 싫지 않은 풍경이다. 게다가 물이 오를 대로 오
른 오름 숲과 그 사이에서 빛나는 찔레꽃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좋다고
마냥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내려오기 싫어하는 일행의 앞에서 서사면 태고종 단산
사(壇山寺) 입구 쪽으로 내려왔다. 대정으로 뺀 길 때문에 이 오름과 나뉘어진 금산
자락이 다정하게 다가온다.
(나비와 벌을 불러모으는 엉겅퀴 꽃)
▲ 엉겅퀴와 찔레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방황하던 삶은 길눈이 어둡다고
다시 찾아들었다 한철 내내 무성한 자줏빛,
하루종일 달라붙는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며 가슴 조이던 엉겅퀴,
풀숲이 마른 소리를 낼 때마다 달아올라
아프도록 제 몸을 찔러댄다
아픔은 견딜 만하면 잊혀지는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뿌리내린 그 속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밤새 쏟아진 폭우로 굽은 목덜미를 세운다
눈물이 아득한 곳으로 떠날 때 덤불 속에서
알몸을 다 보여주는 것 같다고 밤을 설친다
아직은 무성하게 피워야 할 젊은 꿈,
빛을 잃어 가는 푸르름 앞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오래도록 피운 봄날을 뿌리에 묻었다
아직도 말 못하는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는 오솔길,
두런두런 바람은 분다
---노미경 '엉겅퀴 꽃' 전문
오름엘 다니면서도 이렇듯 많은 엉겅퀴 꽃을 본 적이 없다. 배고프던 어린 시절
뒷동산이나 오름 오르던 길목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자줏빛 꽃. 거기엔 온갖 나비
들이 날아다녔고, 가끔씩 길을 가로지르며 뱀이 나타나 머리털이 곤두선 적도 있다.
그 뱀이 사라져버린 길섶엔 뱀딸기가 빨갛게 익어 있기도 하였다. 돌담을 뛰어넘는
순간, 기척에 놀란 꿩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라 "꿩, 꿩, 꿩, 꿩……"하고 건너 산으
로 사라질 즈음에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제법 푸르러지기 시작할 때 넓은
들판에 피어나는 짙은 향기의 찔레꽃. 꼭 슬픈 사연이 깃들여 있는 것처럼 소복 단
장하고 피어 있는 꽃.
(지금 한창 오름을 장식하고 있는 찔레꽃)
마음만으로는
사랑을 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 살의 가슴앓이
사어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 집 담벼락 밑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황산벌 황사바람 속에서도
바래지 않던 추억
수시로 가시처럼 날카롭게
되살아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들던 아픔이여
그래도 세월은 가고 있었네
제대해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쓰려는데
그대는 하늘나라 먼 길을 떠났다던가
보름달은 환하게 밝아 있고
편지를 잘게 찢어 묻은 그 자리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이유를
비로소 알아내고 혼자 울었지
--- 이외수 '찔레꽃' 전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를 닮은 대정향교의 나무들)
▲ 대정향교에서 맛보는 유교의 전통
단산사에서 내려와 100m쯤 떨어진 향교로 오는 오솔길 양쪽에도 엉겅퀴와 찔레,
인동덩굴 꽃은 이어지고, 산딸기와 수영이 숨어 피었다. 길옆 석천(石泉)이라 불리
는 속칭 '새미물'에 들어가 손을 씻다 보니 1급수에만 자란다는 다슬기 새끼들이 여
저기 붙어 있다. 중간에 가뭄이 들 때는 깨끗하지 못했는데 올 봄 비가 많이 와서
물줄기가 터졌나 보다. 옛날 심한 가뭄 때는 성안에서도 길어다 먹었다는 샘이다.
샘물이란 것은 닦아 쓸수록 수량이 많아지고 물도 깨끗해진다. 우리 인간들도 이렇
듯 멈추지 말고 수양을 할 때 비로소 고매한 인격이 형성되리라.
대정향교(大靜鄕校)는 유형문화재 제4호로 제주에 있는 3개의 향교 중 가장 원형
에 가깝다. 1408년(태종8)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
과 교화를 목적으로 대정현 성내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북성 안에 있었으나 중간
에 동문 밖으로 옮겼고, 다시 서성 안으로 갔다가 1653년(효종 41) 이원진(李元鎭)
목사 때 지금의 위치인 단산 아래로 이건(移建)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대성전은
네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고, 명륜당은 1772년(영조48)에 중건하였다. 이렇듯 여러
차례의 증,개축을 거친 뒤, 1993년에 남제주군에서 마지막으로 중수한 것이다.
(대정향교 주변의 밭에서 찍은 감자꽃)
'명륜당(明倫堂)' 액자는 순조 때 변경붕(邊景鵬) 현감이 주자필(朱子筆)을 본받아
걸었고, 대정현 훈장 강사공(姜師孔)은 이 고장에 유배 왔던 추사(秋史)에게 요청하
여 '의문당(疑問堂)'이라는 액자를 받았다. 현재 대정향교에 보관되어 있는 이 액자
는 향원 오재복의 새긴 것이다. 강사공은 1811년(순조11)에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소
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대성전 뜰에 심었는데, 지금은 거의 고사되어
몇 그루만 남았다. 경내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명륜당, 동재를 비롯하여 서재와 4
개의 문이 있다.
대성전에는 정위인 공자와 배형 4성위(안자, 증자, 자사, 맹자), 후형 22위(송나라 4
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다른 관람객이 없는 낮 시간이어서 일
행을 데리고 가서 자세히 보여 줄 수 있었다. 같이 간 학생이 문에 머리를 부딪쳤
는지 문의 높이가 낮은 이유를 묻길래 이곳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낮춰야 하
는 장소라고 얘기하며 웃었다. 정말 과거에는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곳이었
는데, 문화재로 등록되는 바람에 웃으며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추사의 '세한도'
의 나무를 빼 닮은 소나무의 인사를 받으며 사계리 만미식당으로 간다.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안에서 보는 감자밭과 섯알오름)
▲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와 섯알오름 4. 3 학살터
알뜨르 비행장은 2차 대전 당시 남제주군 대정읍에 만든 일본의 비행장 시설이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결7호작전'이라는 군사
작전으로 제주도를 자신들의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고 관동군 등 일본
군 정예병력 6만∼7만여 명을 제주도에 불러들인다. 이들은 각종 군사기지와 비행
장, 용이한 작전수행을 위한 도로 건설 등 각종 군사시설 확충에 나서는 한편, 제주
섬사람들에게 부역과 식량지원을 요구했다. 이 때 오름과 해안가에 굴을 파고 군사
시설을 하여 본토 사수를 위한 '옥쇄'지역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송악산 일대와 사
계리, 화순항, 월라봉에 이르는 해안에 연합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해안특공기
지를 마련해 포대 및 토치카, 벙커 등을 설치했다.
대정읍 알뜨르 평야에 건설했던 일본 해군항공대 비행장은 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26년 계획된 비행장 건설은 1930년
대 중반까지 10여 년에 걸쳐 이뤄졌고, 1937년에 확장 계획을 세워 기존 20만 평에
서 1945년까지 80만 평으로 비행장을 확장해 사세보 해군항공대 2500여명과 전투기
25대를 배치했다. 가미가제호 조종사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주민들이 지금
밭으로 사용하는 알뜨르 평야에는 당시 건설된 20여 개의 격납고가 자리잡고 있다.
인근에 대공포 진지와 정비고, 막사로 사용했던 건물들의 흔적도 있다.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필자)
일제가 탄약고로 썼던 섯알오름은 6.25 후 예비검속된 한림, 대정 지역의 백여 명
의 인원을 대정읍의 고구마 창고에서 이송시켜 무차별 학살한 통한의 학살지이다.
정부는 6.25가 발생하자 무고한 양민들과 보도연맹원, 4. 3항쟁 시 체포되었다가 석
방된 사람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분으로 검거해서 대량 학살을 한다. 당시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을 보면, 군경은 검속자들을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서 돌덩이를 매달
고 수장시켜버리기도 하고, 집단 총살을 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는 오랫동안 손을 못 대게 했다.
희생된 지 7년이 지난 1957년 여름, 유족들이 모여 시신을 수습하러 갔지만 뼈만
남아 있어서 시신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머리, 팔, 다리뼈를 맞추어 장사를 지내기
는 하였으나 정확하지가 않았다. 유족들은 132개의 무덤을 사계리 공동묘지 옆에
만들고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란 뜻으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 부르고
있으며, 해마다 7월 칠석날 아침에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1993년 8월 24일 제주
도 4. 3 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가 제주도의 지원을 받아 제대로 된 위령비를 세
웠다. 모두 모이게 하여 영혼을 위로하는 묵념을 올리고 뒤쳐져 걸어나오는데, 50년
이 지났는데도 원혼들의 울부짖는 환청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백조일손지묘에 보관되어 있는 5. 16때 조각난 비석)
(단산 자락 너머로 보이는 산방산)
▲ 마늘 냄새에 취해 그냥 지나쳐버린 도요지
5월 셋째 주, 탐라문화보존회에서 도내 답사하는 날이다. 결혼식이 유난히 많은 날
이어서 그런지 총인원 43명만 등록했기 때문에 한 대의 차로 갈 수 있어 좋다. 날
씨도 화창하기보다 적당히 흐려서 답사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목적지인 대정읍으
로 가기 위해 서부관광도로로 들어섰다. 5월의 벌판은 어느새 짙은 초록이다. 오늘
의 일정에 대해 대충 소개하고 나서 점심 예약을 했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만미식
당의 해물 전골. 한 상에 네 사람씩 해서 2만원 했던 것이 만원 올랐다고 5천원 깎
아 2만5천 원씩 내란다.
대정읍으로 나뉘는 길로 들어서 한 참을 가다가 서광리에서 우회전하여 구억리 쪽
으로 방향을 바꿨다. 구억 마을 몇 군데 흩어져 있는 도요지를 보기 위함이다. 제주
의 도요지는 선인들의 생활도구의 하나인 물허벅, 항아리 같은 옹기를 굽던 곳이다.
제주에서도 고려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대접, 병, 접시 등 분사청자와 분사편병 또는
흑유(黑釉) 등을 많이 산출했으나 당시의 도요는 알 길이 없고, 속칭 노랑가마와 검
은 가마라 하는 옹기 가마만 살필 수 있다.
(요즘 제주도 전역에 향기를 뿌리고 있는 감귤꽃)
대정읍 중산간 지대는 대토로 이용할 수 있는 흙이 풍부하고 물이 좋은 관계로 도
요지가 많았다. 여기에서 생산한 것은 주로 옹기로서 자라병, 기름병, 허벅, 물항,
단지, 고소리 등 일상생활 용구들이었다. 대정읍과 한경면 지역의 가마는 거의 대부
분 김기홍 씨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하며, 1968년 구억리 서쿠지 노랑굴에서
마지막 작업이 있었다. 구억리에는 속칭 '포제동산'과 '서쿠지', '폭낭굴'을 비롯하
여 7∼8곳에 가마가 있었으나 지금은 '서쿠지'와 '포제동산' 두 곳뿐이다.
마침 밀감 꽃이 피어 곳곳에 마늘 캐는 밭에서 나는 냄새와 어울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곳 대정읍은 마늘 주산지다. 누군가가 "마늘 냄새 때문에 제아무리 기
세 등등한 사스(SARS)인들 쉬 들어올 수 있겠느냐."고 농담을 하는 바람에 모두
웃는다. 그 바람에 도요지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길이 좁아 차를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오다가 보자고 양해를 구하고 바로 단산으로 달렸다. 이런 유적은 마을 입
구에 안내판을 세우고, 현장으로 인도하는 표지판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잘 알
려진 관광지는 멀리서부터 요란스레 이정표를 세우는데, 이런 곳은 소홀하다.
(전날 예비 답사 때 찍은 단산의 석양)
▲ 동심의 세계로 이끈 5월의 단산(簞山)
좁은 길을 굽이돌아 들어가 향교 앞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벌써 타작을
마친 맥주보리를 주차장 구석 아스콘 위에 널어놓았다. 언제나 눈에 익은 단산이
눈앞에 웅장하게 펼쳐진다. 단산(簞山)은 '바굼지오름(破軍山)', '바구미오름'으로도
불리며,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해 있는 오름이다. 표고 158m, 비고 113m,
둘레 2,566m, 면적 339,982㎡. 응회구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 침식에 의
해 분화구의 일부만 남아 있다. 바굼지오름의 응회구는 제주도의 지질학적 층서 구
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쇄설성 퇴적이다.
이는 주변의 산방산 용암돔과 용머리 응회암층의 형성연대와 직접 대비되는 것으
로, 제주화산도의 기반형성과 옛 지도 복원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기생화산체의 위치 결정과 함께 오름의 노두는 오랜 세월 파식(波飾), 풍식(風飾)에
의하여 지금은 골격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바위봉우리가 중첩된 북사면은
수직의 깎아지른 벼랑을 이루고 있으며, 남사면은 다소 가파른 풀밭에 소나무, 보리
수나무가 서있다. 대정읍 지역 답사인데도 굳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오래된 대정향
교가 있기 때문이다.
(한약재로 쓰는 인동덩굴 꽃)
도착한 시각이 09:50. 11시 반까지 버스에 돌아오기로 하고 앞장서서 향교를 지나
샘이 있는 산골짜기로 들어섰다. 인동덩굴이 꽃을 피워 향수를 자극한다. 꽃을 따서
약재로 판다고 보리 베는 밭에 가서 아기를 보살피다 너무 정신이 팔려 욕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애를 들쳐업고 밭 구석을 헤매다 뱀에 물릴 뻔한 적도
있었다. 벌노랑이, 미나리아재비, 엉겅퀴꽃, 찔레꽃을 일별하고 나니, 상동나무마다
시커멓게 익은 열매가 매달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나무에 매달려 입술이 꺼매지는
줄도 모르고 잘도 따먹는다.
정상 북쪽으로는 너무 가파라 다가서면 위험하다고 풀밭으로 인도하여 막걸리를
펼쳐 놓았다. 바다 위로 가파도, 마라도, 형제섬, 그린 듯이 무늬진 벌판과 마을, 그
리고 멀리 오름들…. 어디를 보아도 싫지 않은 풍경이다. 게다가 물이 오를 대로 오
른 오름 숲과 그 사이에서 빛나는 찔레꽃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좋다고
마냥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내려오기 싫어하는 일행의 앞에서 서사면 태고종 단산
사(壇山寺) 입구 쪽으로 내려왔다. 대정으로 뺀 길 때문에 이 오름과 나뉘어진 금산
자락이 다정하게 다가온다.
(나비와 벌을 불러모으는 엉겅퀴 꽃)
▲ 엉겅퀴와 찔레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방황하던 삶은 길눈이 어둡다고
다시 찾아들었다 한철 내내 무성한 자줏빛,
하루종일 달라붙는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며 가슴 조이던 엉겅퀴,
풀숲이 마른 소리를 낼 때마다 달아올라
아프도록 제 몸을 찔러댄다
아픔은 견딜 만하면 잊혀지는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뿌리내린 그 속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밤새 쏟아진 폭우로 굽은 목덜미를 세운다
눈물이 아득한 곳으로 떠날 때 덤불 속에서
알몸을 다 보여주는 것 같다고 밤을 설친다
아직은 무성하게 피워야 할 젊은 꿈,
빛을 잃어 가는 푸르름 앞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오래도록 피운 봄날을 뿌리에 묻었다
아직도 말 못하는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는 오솔길,
두런두런 바람은 분다
---노미경 '엉겅퀴 꽃' 전문
오름엘 다니면서도 이렇듯 많은 엉겅퀴 꽃을 본 적이 없다. 배고프던 어린 시절
뒷동산이나 오름 오르던 길목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자줏빛 꽃. 거기엔 온갖 나비
들이 날아다녔고, 가끔씩 길을 가로지르며 뱀이 나타나 머리털이 곤두선 적도 있다.
그 뱀이 사라져버린 길섶엔 뱀딸기가 빨갛게 익어 있기도 하였다. 돌담을 뛰어넘는
순간, 기척에 놀란 꿩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라 "꿩, 꿩, 꿩, 꿩……"하고 건너 산으
로 사라질 즈음에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제법 푸르러지기 시작할 때 넓은
들판에 피어나는 짙은 향기의 찔레꽃. 꼭 슬픈 사연이 깃들여 있는 것처럼 소복 단
장하고 피어 있는 꽃.
(지금 한창 오름을 장식하고 있는 찔레꽃)
마음만으로는
사랑을 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 살의 가슴앓이
사어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 집 담벼락 밑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황산벌 황사바람 속에서도
바래지 않던 추억
수시로 가시처럼 날카롭게
되살아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들던 아픔이여
그래도 세월은 가고 있었네
제대해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쓰려는데
그대는 하늘나라 먼 길을 떠났다던가
보름달은 환하게 밝아 있고
편지를 잘게 찢어 묻은 그 자리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이유를
비로소 알아내고 혼자 울었지
--- 이외수 '찔레꽃' 전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를 닮은 대정향교의 나무들)
▲ 대정향교에서 맛보는 유교의 전통
단산사에서 내려와 100m쯤 떨어진 향교로 오는 오솔길 양쪽에도 엉겅퀴와 찔레,
인동덩굴 꽃은 이어지고, 산딸기와 수영이 숨어 피었다. 길옆 석천(石泉)이라 불리
는 속칭 '새미물'에 들어가 손을 씻다 보니 1급수에만 자란다는 다슬기 새끼들이 여
저기 붙어 있다. 중간에 가뭄이 들 때는 깨끗하지 못했는데 올 봄 비가 많이 와서
물줄기가 터졌나 보다. 옛날 심한 가뭄 때는 성안에서도 길어다 먹었다는 샘이다.
샘물이란 것은 닦아 쓸수록 수량이 많아지고 물도 깨끗해진다. 우리 인간들도 이렇
듯 멈추지 말고 수양을 할 때 비로소 고매한 인격이 형성되리라.
대정향교(大靜鄕校)는 유형문화재 제4호로 제주에 있는 3개의 향교 중 가장 원형
에 가깝다. 1408년(태종8)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
과 교화를 목적으로 대정현 성내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북성 안에 있었으나 중간
에 동문 밖으로 옮겼고, 다시 서성 안으로 갔다가 1653년(효종 41) 이원진(李元鎭)
목사 때 지금의 위치인 단산 아래로 이건(移建)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대성전은
네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고, 명륜당은 1772년(영조48)에 중건하였다. 이렇듯 여러
차례의 증,개축을 거친 뒤, 1993년에 남제주군에서 마지막으로 중수한 것이다.
(대정향교 주변의 밭에서 찍은 감자꽃)
'명륜당(明倫堂)' 액자는 순조 때 변경붕(邊景鵬) 현감이 주자필(朱子筆)을 본받아
걸었고, 대정현 훈장 강사공(姜師孔)은 이 고장에 유배 왔던 추사(秋史)에게 요청하
여 '의문당(疑問堂)'이라는 액자를 받았다. 현재 대정향교에 보관되어 있는 이 액자
는 향원 오재복의 새긴 것이다. 강사공은 1811년(순조11)에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소
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대성전 뜰에 심었는데, 지금은 거의 고사되어
몇 그루만 남았다. 경내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명륜당, 동재를 비롯하여 서재와 4
개의 문이 있다.
대성전에는 정위인 공자와 배형 4성위(안자, 증자, 자사, 맹자), 후형 22위(송나라 4
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다른 관람객이 없는 낮 시간이어서 일
행을 데리고 가서 자세히 보여 줄 수 있었다. 같이 간 학생이 문에 머리를 부딪쳤
는지 문의 높이가 낮은 이유를 묻길래 이곳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낮춰야 하
는 장소라고 얘기하며 웃었다. 정말 과거에는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곳이었
는데, 문화재로 등록되는 바람에 웃으며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추사의 '세한도'
의 나무를 빼 닮은 소나무의 인사를 받으며 사계리 만미식당으로 간다.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안에서 보는 감자밭과 섯알오름)
▲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와 섯알오름 4. 3 학살터
알뜨르 비행장은 2차 대전 당시 남제주군 대정읍에 만든 일본의 비행장 시설이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결7호작전'이라는 군사
작전으로 제주도를 자신들의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고 관동군 등 일본
군 정예병력 6만∼7만여 명을 제주도에 불러들인다. 이들은 각종 군사기지와 비행
장, 용이한 작전수행을 위한 도로 건설 등 각종 군사시설 확충에 나서는 한편, 제주
섬사람들에게 부역과 식량지원을 요구했다. 이 때 오름과 해안가에 굴을 파고 군사
시설을 하여 본토 사수를 위한 '옥쇄'지역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송악산 일대와 사
계리, 화순항, 월라봉에 이르는 해안에 연합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해안특공기
지를 마련해 포대 및 토치카, 벙커 등을 설치했다.
대정읍 알뜨르 평야에 건설했던 일본 해군항공대 비행장은 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26년 계획된 비행장 건설은 1930년
대 중반까지 10여 년에 걸쳐 이뤄졌고, 1937년에 확장 계획을 세워 기존 20만 평에
서 1945년까지 80만 평으로 비행장을 확장해 사세보 해군항공대 2500여명과 전투기
25대를 배치했다. 가미가제호 조종사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주민들이 지금
밭으로 사용하는 알뜨르 평야에는 당시 건설된 20여 개의 격납고가 자리잡고 있다.
인근에 대공포 진지와 정비고, 막사로 사용했던 건물들의 흔적도 있다.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필자)
일제가 탄약고로 썼던 섯알오름은 6.25 후 예비검속된 한림, 대정 지역의 백여 명
의 인원을 대정읍의 고구마 창고에서 이송시켜 무차별 학살한 통한의 학살지이다.
정부는 6.25가 발생하자 무고한 양민들과 보도연맹원, 4. 3항쟁 시 체포되었다가 석
방된 사람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분으로 검거해서 대량 학살을 한다. 당시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을 보면, 군경은 검속자들을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서 돌덩이를 매달
고 수장시켜버리기도 하고, 집단 총살을 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는 오랫동안 손을 못 대게 했다.
희생된 지 7년이 지난 1957년 여름, 유족들이 모여 시신을 수습하러 갔지만 뼈만
남아 있어서 시신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머리, 팔, 다리뼈를 맞추어 장사를 지내기
는 하였으나 정확하지가 않았다. 유족들은 132개의 무덤을 사계리 공동묘지 옆에
만들고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란 뜻으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 부르고
있으며, 해마다 7월 칠석날 아침에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1993년 8월 24일 제주
도 4. 3 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가 제주도의 지원을 받아 제대로 된 위령비를 세
웠다. 모두 모이게 하여 영혼을 위로하는 묵념을 올리고 뒤쳐져 걸어나오는데, 50년
이 지났는데도 원혼들의 울부짖는 환청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백조일손지묘에 보관되어 있는 5. 16때 조각난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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