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숲도 좋고, 바다도 좋고, 냇물도 좋고

김창집 2003. 7. 2. 16:05

이승악, 제지기오름, 성진이오름 답사기[2003. 6. 29.]

 

(이승악 숲)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장마 중에 후텁지근한 날씨. 원래는 사라오름에서 성널폭포로 내리는 비교적 힘든 계획을 세웠는데, 마지막 순간에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끔 우리 오름 모임에 나오는 나 산부인과 원장 부부가 모처럼 제주를 찾은 나이 드신 장인, 장모님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요즘 들어 부쩍 우리 모임에 열을 올리는 덕윤 씨도 초등학교 다니는 딸 슬기를 데리고 나오기도 했고…. 궤도 수정. 우리 회원들이 양보하기로 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과 인정 때문에 가고 싶은 길을 포기하고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럼, 오늘 같은 날은 시원한 숲길을 걷는 것이 좋겠다는 전제 아래 좁혀진 곳이 '보리악'과 '이승악'. 그 중에서 보리악은 비가 많이 오고 난 뒤, 더 더운 때를 대비해 남겨두기로 하고, 결국 평탄하고 긴 코스인 이승악으로 목표를 정하고는 미련 없이 출발했다. 성판악에서 서귀포로 가다 보면 누구나 좋아하는 숲길---길 양쪽에 있는 나무가 서로 어울려 하늘을 가린 숲 터널---을 지나 논고교 바로 못 미쳐에서 왼쪽 표고밭으로 난 길목에 주차하고 숲길로 들어서며, 이양하 님의 수필 '나무'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산수국)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는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이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화두(話頭)는 '이승악'이라는 오름 이름이 주는 동음이의어에서 유추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였다. 하지만, 이승악에는 무덤이 많아 오히려 저승악에 가까운데…. 하긴, 아무리 나에게 주어진 짐이 무겁긴 해도 오늘처럼 훌훌 털어버리고 이런 즐거운 시간도 가질 수 있으니, 그 말도 일리는 있다. 이 때 코끝을 스치는 진한 향기, 분명히 초피나무(제주 속명 '죄피')다. 이 녀석 길가에 자리해 있다 보니, 지나는 사람이 모두 잎사귀를 훑어버려 다시 어렵게 새순과 잎을 피워 올렸는데, 또 뜯어 볼품없이 돼버렸다. 저 쪽 안에 있는 건 그대로 싱싱하나, 이건 한두 번 꺾인 것도 아닌데,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남은 잎으로 묵묵히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이승악에서 찍은 노루발풀꽃)

 

▲ 깊은 산 속 오름까지 공원으로 만든 속셈

 

 누가 밟아버렸는지 길 가운데 아주 작은 몸집의 산꿩의다리가 꽃이 핀 채로 뭉개져 있다. 그래도 길섶에 있는 것들은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내며 앙증맞게 피었다. 옥잠난초나 새우난초, 은대난초는 꽃이 진지 오래고, 넓은잎천남성도 말라버린 꽃을 숙명처럼 달고 있는데, 산수국만 숲을 밝혀 왁자지껄 꽃을 피웠다. 양하와 차나무 군락이 이어지고, 어린 비자나무도 하나둘 보인다. 무엇 하러 심어 놓았을까 생각하며 삼나무 숲에 이르렀다. 일본에서나 볼 수 있는 1백년 훨씬 넘어 보이는 삼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숲을 이루었다. 같이 심었을 텐 데도 두 아름이 넘는 것도 있고, 아직도 굵어지지 않고 두 손으로 움켜 쥘만하거나 꺾인 채로 자라 기형이 된 것도 있다.

 

 삼나무 숲을 지나 자연림과 맞닿은 곳에 산수국이 쪼르르 피어 반기더니, 새로 만든 길이 나타난다. 산등성이로 오르는 길에 나무를 베어 통로를 만들었는데 비닐 끈까지 매어놓았다. 그 때문에 발길에 흙이 패이고, 그 위에 자라던 사철란이 짓이겨졌다. 모르고 지나간 등산객이 무심코 밟아버린 것이리라. 마을 가까이 있는 오름을 근린 공원으로 만들며 훼손시킨 것까지는 봐줄 수 있다.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깊숙이 자리한 원시림까지 공원으로 만드는지 이해가 안 간다. 관광객을 끌어들여 돈이라도 벌겠다는 속셈인가. 해도 너무했다.

 

(산딸나무 꽃)

 

 숲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야 건강하다.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 묻혀있는 보물에 왜 흠집을 내어 가치를 떨어뜨리려는지…. 이곳은 한라산에서 동남쪽으로 많이 떨어진 곳이어서 아무래도 상록수가 많이 자라고 있다. 능선을 따라 박혀 있는 바위를 의지해서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구실잣밤나무가 자리하고, 그 아래로 동백나무도 많이 보인다. 태풍에 쓰러진 아름드리 종가시나무가 뿌리를 송두리째 드러낸 채 벌렁 드러누워 있다. 그 외에도 조록나무와 광나무, 식나무가 푸르름을 더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노루발풀이 마른 낙엽 위로 줄기를 솟아 올려 은방울 같은 꽃을 쪼르르 매달았다.

 

 정상은 더욱 가관이었다. 시계를 넓히기 위해 나무를 베어버리고 왜철쭉을 심어놓았는가 하면, 잔디까지 깔았다. 왜 여기에다 그런 걸 심어야만 하는지, 이걸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예산도 꽤 썼을 것이다. 한라산에 케이불카를 놓아야 산이 보호된다는 제주도지사의 논리를 따랐나? 자연에 인공을 가미해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내놓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자연을 훼손시키는 행위다. 공원은 나무가 하나도 없는 주택가에 새로 조성할 때에 빛나는 것이지, 이런 깊숙한 숲 속에 있는 오름을 이렇게 절개해 놓다니. 한라산 쪽으로 산딸나무꽃이 몸부림을 치듯 하얀 꽃을 피워대고 있다.숲 때문에 그 윤곽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분화구를 가운데 두고 능선으로 길을 낸 것도 부족해 한라산 쪽으로도 길을 뺐다.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채로 내려가, 오른쪽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두갈래로 나뉘었다. 먼저 왔다가 이곳에서 길을 잃어 헤매었다는 회원들의 말을 쫓아 얼른 나침반을 꺼내 확인하고, 오른쪽으로 난 길이 옳은 방향이라 생각되어 앞장서 걷는데, 올 때 거쳐간 삼나무 숲이 나타난다. 시야가 탁 트인 산길은 사방에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 있어 잠시 길을 잃어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이런 숲길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는 문제가심각하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 자기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자리에서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사람들이야 속도만 조절하면 되지만, 중간에 자신의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방향감각을 잃고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꼭 다시 오름 쪽으로 가는 것 같아 발자국을 찾아보니, 우리가 오름으로 갔던 자국이다. 역으로 추적해 숲 가운데 길을 찾고 갔던 길을 되돌아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옥잠난초)

 

▲ 제지기오름에서 바다도 보고

 

 애초에 한라산 진달래밭 대피소 바로 밑에 위치한 사라오름에 가기로 했었기 때문에 많은 간식을 가지고 온 것을 처분하느라 즐거웠고, 그 때문에 점심 생각은 별로 없다. 그래서 점심을 먹기 전에 오름 하나를 더 오른 뒤 공천포로 가서 물회를 먹자고 해서 가는 길에 들른 곳이 바닷가에 위치한 제지기오름. 일주일 전에 '자리축제'를 벌였던 보목리 포구가 환히 들여다보인다. 자리돔은 일찍부터 제주도에서 많이 잡히는 고기이기 때문에 작은 고기이지만 여러 가지 요리법을 개발하여 이제는 향토 음식의 대표적인 재료가 되었다. 돔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맛이 좋아 회로부터 무침, 횟국, 구이, 조림,젓 등 못하는 요리가 없다.

 

 서귀포시 보목동 산1번지에 자리한 제지기오름은 표고 94.8m, 비고 85m, 둘레 1,012m, 넓이 77,023㎡의 아담한 오름이다. 마을 포구 동편에 자리잡아 포구 앞 바다 1km 지점에 위치한 섶섬(숲섬)과 마주보고 있다. 조면암질 화산암과 일부 화산쇄설성 퇴적층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인 모양은 용암원정구(lava dome)의 형태. 북사면은 완만한 등성이가 뻗어 내리면서 여러 갈래로 얕게 패어 있고, 남사면은 매우 가파른 벼랑을 이루며 중턱에 바위굴과 절터를 거느린다. '용암원정구'는 화산 활동으로 분출한 용암이 넓게 흐르지 못하고 화구상이나 주위에서 굳어져서 생긴 용암 언덕인데, 오름 곳곳에 해송이 울창하고 울퉁불퉁 바위들이 노출되어 절경을 이룬다.

 

 3년 전 밀레니엄 해돋이가 유행처럼 번졌을 때, 이곳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폐기 처분한 철도 받침목을 가져다가 계단도 만들고 정상에 나무를 베어 운동 시설도 마련했다. 마침 오름에 원추리 꽃이 피어 부는 바람에 손짓한다. 참나리는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릴 것 같은 자세다. 특히 양치식물 고사리목 고란초과의 석위가 무리지어 빽빽이 자라고 있다. 정상에 올라 한참 동안바다를 바라보며 땀을 식힌다. 포구엔 자리돔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얕은 바다는 속살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며 파도를 머금었다. 섶섬은 안개로 더욱 신비로운 자태다. 10여분 동안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고는 공천포로 가서 입맛대로 자리물회, 한치물회, 소라물회를 시켰다. 늦게라도 합류하고 싶다고 전화했던 이 교수 부부는 벌써 와 있었다.

 

(박새 꽃)

 

▲ 성진이오름에 들러 냇물에 발을 담그다

 

 성찬을 끝내고는 배가 불러 도저히 이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가는 길에 비교적 오르기 쉽고 시원한 성진이오름에 들러가기로 했다. 흔히 5.16도로라 일컬어지는 서귀포시↔제주시간 제1횡단도로로 오다가 교래리로 빠지는 길목을 넘어 견월악으로 오르는 길이 환히 내다보이는 왼쪽 공터에 차를 세우고 일행을 기다린다. 이곳은 물장오리나 테역장오리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견월교 다리를 건너 오른쪽에 자리한 비고 75m의 나지막한 성진이오름에 올랐다. 오름으로 오르는 길목엔 산수국이 가득 피어 우리를 반긴다. 이 오름은 왕벚나무 자생지에 포함되는 곳이어서 50년은 훨씬 더 돼 보이는 사오기 몇 그루가 보이고, 커다란 산뽕나무도 확인된다. 성진이오름에도 여지없이 제주조릿대가 깔려 있다. 벼과에 속하는 이 식물은 한라산 해발 400∼1,000m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계속해서 세력이 확장되면서 지금은 해발 1,800m까지 진출해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국내 식물 자원의 보고로 알려진 한라산의 생태계가 들불 번지듯 퍼져가는 이 식물 때문에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 뿌리가 엉키며 불어나면 다른 초본과 식물은 자라기 힘들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제주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는 보리알 크기의 열매를 맺어 구황식물로 먹는단 이야기인데, 산엘 그만큼 다닌 나도 도대체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식물은 대부분 가뭄이 들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면 꽃을 많이 피워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 종족을 보존한다. 그래서 과거 가뭄이 심했던 한라산의 조릿대는 씨를 맺은 뒤 말라죽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적당선을 유지했고, 지금은 기후의 변화로 한라산에 가뭄이 없어져 겉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는 것이다.

 

(한라산에서부터 오름까지 퍼진 제주조릿대)

 

 이곳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푸르고 싱싱하다. 졸참나무부터 시작해서 서어나무, 단풍나무, 사오기, 산뽕나무, 때죽나무, 산딸나무, 고로쇠나무…. 숲을 걸어 천천히 내려와 산 속 맑게 고인 냇물에 발을 담가본다. 정말 내려가기 싫다. 아! 나도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볼까? 하여 이양하 님의 수필 '나무'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린다.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 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온갖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중략)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그늘 속 습기 있는 곳에 자라는 고사리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