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산족 중 하나인
아미족이 춤추는 모습)
◎ 2003년 10월 4일(토요일) 흐림
▲ 미아(迷兒)가 됐던 1시간 50분(2)
차가 떠나자 나는 곧 내가 혼자 버려졌으며,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저 앞차의 일행과 합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옆에 역무원을 붙잡고 '나는 한국 제주에서 온 관광객인데, 차를 놓쳤다.'는 의미를 담은 한자를 써서 보여주며 조치를 부탁했다. 그는 귀찮은 듯이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 육교를 지나 역사(驛舍)의 여러 곳을 거쳐 어떤 사무실로 데려다 주고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는 어느 일가족으로 생각되는 일행이 큰소리로 따지고 있었다.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었는데, 개찰이 되자마자 들어 왔는데 차가 가버린 모양이었다. 한참을 따지다가 어쩔 수 없었는지 나가버린다.
나는 얼른 좀 전에 적었던 메모 용지를 내밀며 조치를 부탁했다. 그는 다음 차시간인 듯한 숫자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했는데, 거기에는 11:09라고 아마 다음 차시간인 듯 싶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30분도 더 뒤여서 너무 오래 기다리고 또 앞사람들과 도착시간이 너무 차이가 날 것 같아 '더 빨리 가는 것은 없는가'는 뜻의 글을 써 보였더니, '지금 가면 완행이 있을 것이라'는 뜻인 듯 "쉘라 쉘라"하더니 딴전을 피운다. 나는 기다리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아 얼른 나와 다시 육교를 건너 곧 도착한 화련행 화차를 탔다. 타이완에서는 기차를 화차(火車),버스를 기차(汽車)라고 하는데, 아직 관광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가는 길 곳곳에 피어 있던 나팔꽃도 같고 메꽃도 닮은 꽃)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 보고 놀란다'고 문이 닫칠까봐 서둘러 올라타고 승무원에게 도착 시간이 언제냐고 물어보았다. 그 승무원은 12:03이라고 써 보인다. 그렇다면 앞에 차가 3시간 걸린다고 했기 때문에 11:50에 도착하면 13분 정도 늦겠구나 하면서도 석연치 않았다. 반정도 왔다고는 하지만 직행이 걸리는 시간하고 완행이 걸리는 시간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주로 버스를 이용해 여행을 했기 때문에 사람이 다 타야 출발해서 이런 경우는 상상도 못했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차창 밖을 바라보니 풍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타이완 산맥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 험난한 산들이 바짝 다가서서 머리에 구름을 인 채 솟아 있고, 왼쪽으로는 바로 바다가 펼쳐졌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이 참에 차분히 지나간 삶이나 반추해보려 했지만 조바심 때문에 도저히 그렇질 못한다. 어쩌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로 내 인생길과 같다고 생각해본다. 애당초 잘못 몸을 실은 차에서 혼자 외롭게 조바심하며 앞에 편안히 간 사람을 쫓는, 그러면서도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주위를 살펴야 하는 삶이 지금의 내 인생이 아니던가? 어쩌면 주어진 환경에서 일탈(逸脫)을 즐길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다. 갑자기 왕따 당한 느낌이다. 천방지축으로 객실을 오가며 깝죽대다가 벌을 받은 것이다. 와락 외로움이 몰려와 필담(筆談)이라도 나누려고 차안을 살폈지만 손님이 꽉꽉 들이찼던 직행과 달리 이곳엔 한 칸에 두서너 사람밖에 없다. 승무원은 무엇이 바쁜지 쳐다보려고도 않고, 똑똑하게 생긴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남동생과 같이 타고 있어 메모지에 글을 써서 조심스럽게 보였지만 고개를 가로젓고 만다.
(태로각 대협곡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 미아(迷兒)가 됐던 1시간 50분(3)
다음 칸으로 옮겨가 한 쪽에서 열심히 신문을 더듬고 있던 샐러리맨 같은 아저씨에게 조심스레 글을 내밀었더니, 한번 흘깃 쳐다보고는 외면해버린다. 나는 아예 포기하고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 12시가 가까워진다. 이제는 간이역에 도착할 때마다 이정표를 보며 '화련(花蓮)'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말해준 12:03이 가고 10분, 20분이 지나도 '화련'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질 않는다. 차에서 내려 나를 기다리며 눈을 흘기고 있을 일행들을 생각하면 조바심이 나 견딜 수 없다. 더구나 일행을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는 내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뭉기적거리고 있는 걸 생각하면서 목이 탔으나 마실 것조차 없다.
아! 이럴 때 휴대폰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화를 걸어 '어디라도 뒤쫓아갈 테니, 내 걱정은 말고 예정된 순서대로 진행하라.'고 한다면 마음이라도 놓일 것을…. 아니, 승무원들이 조금만 친절하거나 우리 나라만 같았어도 역에 전화를 걸어 그렇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시30분이 지나도 역시 화련역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평지가 넓어지고 분위기로 봐서 도시로 진입하는 느낌은 들었다. 한 사람에게 40분씩 피해를 입힌다면, 70명에게 2,800분, 그래서 한 이틀을 허비하게 만들고 있다는 엉뚱한 계산도 해본다. 나를 믿고 예정된 일정표대로 그 시간에 식사나 하면 좋으련만….
(돌의 집에 전시된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
걱정을 하는 사이에도 차는 달려 12:35에 드디어 '화련 5km'라는 이정표가 나오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어디 있다 왔는지 승무원이 나타나 나를 데리고 맨 앞간까지 가서 도착하자마자 내리라고 한다. 내려보니 맨 앞간이라 역에서 멀어져 있어, 뛰어 가는데 기다리고 있던 세아여행사 사장과 나중에 알았지만 고산차와 무좀약을 파는 가게 아저씨가 기뻐서 손을 흔들며 맞는다. 나는 몇 년 동안 헤어져 있던 사람처럼 깊게 포옹을 하고, 빨리 타라는 성화에 따라 승용차를 타고 일행이 점심 식사하는 곳으로 달렸다. 사장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앞차도 늦게 도착하여 불과 20분밖에 안 늦었다는 것이다. 식당에 가보니 모두 식사를 마치면서 식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장과 다 식은 식사를 대충 마치고 나왔을 때 일행은 바로 옆 대리석 공장을 견학하고 나와 석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는 '돌의 집(石之屋)'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전시품을 구경하고 있던 일행이 너무 반가워 달려와 악수하는 사람, 살짝 꼬집는 사람 등 야단들이다. 거의가 나와 같이 답사를 다녔던 분들이어서 모두 마음속으로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기 짝이 없었고, 나의 실수를 나무라지 않고 눈감아주는 이들이 고마웠다.
처음 내가 없어진 것을 현지 가이드에게 알렸을 때 나의 소지품을 검사했는데, 여권이나 돈은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벗어놓은 점퍼에 여행 일정과 안내 유인물이 그대로 있어 내가 바로 호텔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여행사 사장이나 탐문회 강영철 회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곧 뒤따라올 것이라고 했다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면 가이드 중 한 사람이 데리러가야겠지만 '김 선생'이니까 지구 끝에 내버려도 찾아 올 것"이라고 믿고 기다려 준 점에 대해서는 이 기회를 빌어 감사 드린다.
(돌의 집에 전시된 옥으로 만든 달마상)
▲ 돌 공예품 전시장, 고산족 민속 쇼 관람
우리 나라의 석공예 솜씨도 뛰어나지만 중국에는 옥을 비롯한 대리석이 많이 나기 때문에 일찍이 그 기술이 발달했다. 대리석과 옥으로 못 만드는 것이 없고 그 규모도 웅장하다. 병풍이나 그림까지도 진열되었다. 이어지는 보석 가게에는 소품으로부터 대형까지 없는 보석이 없다. 3분의 2나 되는 여회원들은 신이 나서 평소 갖고 싶던 보석을 실컷 만져보기도 하고 싸니까 기념으로 사기도 한다. 원석(原石)의 무늬와 결을 잘 살려 만들어놓은 커다란 제품 중에는 배추가 있는가 하면, 각종 벌레 모형, 하다 못해 와이셔츠까지 만들었다. 나의 무사 귀환을 축복이라도 하는 듯 옥으로 만든 커다란 달마대사의 미소를 뒤로하고 민속 쇼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생각해 보면 나 자신 큰 경험을 한 셈이다. 타이완의 원주민 격인 고산족은 3,000m 이상 봉우리가 133개라는 타이완산맥 깊숙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요즘엔 이렇게 극장에 고용되어 민속쇼를 벌이기도 한다. 그들의 고유한 풍속으로는 사이샤트족의 대제(大祭), 부눈족의 타이제(打耳祭), 추오족의 수수제(首狩祭), 퓨마족의 성인식, 아미족의풍년제 등이 있는데, 우리가 볼 남도문화극장의 민속 쇼는 아미족의 풍년제라고 한다. 아미족의 축제 중 가장 중요한 풍년제는 음력 8월 15일 중추절을 전후하여 7일 동안에 걸쳐 열린다. 한해의 풍작과 평안을 감사하는 이 축제에서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춤을 추며 붉은 색을 중심으로 한 의상을 걸치고 손발에 방울을 달고 깃털로 머리를 장식하여 커다란 원을 만들며 춤을 춘다.
(아미족의 민속 춤 모습)
이 축제 때에는 적령기의 남녀가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3일간으로 기간이 줄어들었으며, 이 때만은 마을을 떠난 많은 젊은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축제에 참가한다고 한다. 쇼를 벌이는 여자들은 대부분 30∼40대였고, 남자들은 비교적 어린 10∼20대였다. 모두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활달한 동작으로 춤을 추었다. 우리들의 박수소리가 커지자 더욱 신나는 모습으로 실연하며 자신들의 어떤 긍지까지 보이는 듯했다. 마지막 결혼식 축제 때는 우리 일행 중에서 신랑, 신부를 뽑아 의상을 입히고 장식을 달아 참가시켰다. 술 한잔하고 앞에서 졸고 있던 남 사장은 졸지에 신랑으로 뽑혀 어리둥절한 가운데서도 분위기에 동화되어 판을 더욱 재미있고 신나게 했다.
나도 뽑혀 나가 머리에 장식을 한 후 결혼 축하객으로 분장하여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시작하기 전에 잠시 양옆에 바짝 붙어서 즉석카메라로 사진을 찍더니 나중에 옥돌 속에 넣고 와서 200원(7200원 상당)을 받아갔다. 고산족 사회는 부족마다 다르지만 여전히 모계사회를 고수하고 있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부계 사회와 귀족 종실 사회도 존재한다. 모계사회의 가장은 집안의 장녀가 계승하며, 가장은 재산 관리 및 가정생활, 노동 등을 다스릴 권리를 소유한다. 일부 부족 중에는 이빨을 뽑기도 하고 문신,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풍습이 남아 있다. 결혼 후 3∼4년이 지나면 자신들의 특기를 과시하기 위해 주로 얼굴이나 턱밑 부분에 문신을 넣는다고 했다.
(필자가 불려나가 같이 어울려 휘나래를 장식하는 모습)
▲ 태로각 협곡을 울리는 신음소리
태로각(太魯閣, Taroko) 협곡은 동해안 중심에 자리잡은 화련(花蓮) 외곽지에서 섬 서쪽의 중심지인 타이중(臺中) 방향으로 뻗어있는 계곡을 말한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다 했던가?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타이완 산맥의4천m 급에 이르는 3884m의 쉐산(雪山), 3833m의 슈구완산(秀姑巒山), 최고봉 3997m의 위산(玉山)이 버티고 있는 높은 산맥의 계곡은 수억 년이 흐르는 동안 깊게 패여 절경을 이룬다. 아니, 절경이라기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발 아래로 직각을 넘는 천길 낭떠러지, 머리위로 역시 거의 직각을 넘나드는 절벽, 다만 계곡을 흐르는 시멘트를 탄 물 수준의 시커먼 냇물과 머리 위 양쪽 바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만이 이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곳임을 말해준다.
태로각 협곡은 중부횡단도로(中橫公路) 동쪽 끝까지 19㎞에 이르는데, 타이페이의 고궁박물원과 함께 타이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승지이다. 태로각계곡을 따라 끝까지 이어진 중부횡단도로는 타이완산맥 때문에 남쪽이나 북으로 돌아다니며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보다 못한 장개석 총통이 이 계곡을 이용, 산맥을 뚫고 동서를 관통하는 길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1956년7월, 아들 장경국의 주도로 시작된 공사는 퇴역군인과 민간인 약 450만 명을 동원해 1960년 5월에 완공하기에 이른다. 장비가 시원치 못했던 당시였기에 정과 망치를 가지고 이 대리석을 쪼아 터널이나 길을 만들 때의 그 어려움이 어떠했을까? 수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거나 지치고 병들어 죽어나갔다.
(길을 만들 때 죽어간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원 장춘쓰)
협곡에 들어서 약 2km 정도 들어갔을 때, 계곡 넘어 감색 빛이 감도는 지붕의 절 같은 게 보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 때 죽어간 공식적인 인원 212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놓은 창춘쓰(長春祠)라는 사원이다. 차를 세워 잠시 휴식 시간을 주기에 얼른 계곡으로 내려가 폭포 위에 있는 사원을 찍고, 그 위 반공중에 아슬아슬하게 지어놓은 부동밍왕먀오(不動王廟)를 바라보며꼭 저기에 저런 걸 지어야 했나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 제주도민들도 일제말기에 일본군의 최후 격전지를 만드는데 강제 동원되어 정과 망치, 그리고 괭이와 삽으로 오름과 해안 절벽을 뚫으며 매맞아 죽고 지쳐죽고 수많은 희생을 당한 적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곡을 돌아 나오는데, 내 귀에서 신음소리 같은 이명(耳鳴)이 한 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이 길은 동서를 연결하게 되어 있으나, 실제 산업이나 교통 소통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길이 좁고 험하며 3천m 고도까지 위치해 있어 특별히 모험가들이 차를 가지고 횡단을 모색하는 경우밖에 이용이 안되고, 이곳 태로각 협곡 부분만이 길을 넓히고 보완하여 관광 코스로 이용하고 있다. 국민당의 퇴역과 함께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군인과 민간인을 어르고 달래며 공사한 이곳이 뒤에 타이완 최고의 관광지로 남게 된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슬아슬한 절벽 옆구리를 타고 가며 간혹 나타나는 폭포, 제비가 살았다는 석회굴 옌츠커우(燕子口)를 살피고, 주취등(九曲洞)의 기암괴석을 바라보며 녹수산장까지 가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돌아왔다. 오다가 얼마동안 차를 버리고 걸으면서 계곡의 절경을 바라본다. 폭포가 보이는 곳에는 여러 가지 글귀가 있었는데, 석회의 농도가 짙어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어약용문(魚躍龍門)', 즉 '고기가 뛰놀고 용이 드나드는 문'이란 글을 보며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읽었다. (계속)
(올라가 쉬었다 되돌아온 태로각 협곡의 녹수산장 표지석)
♬ 매염방 - '夕陽之歌(영웅본색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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