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특집]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 답사 (6)

김창집 2002. 12. 17. 11:47

 돌아오면서 - 훼리에서

 

2001년 6월 5일(월요일) 맑음

▲ 고대 우리 나라와 중국을 연결했던 항로

: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 태산(泰山) 갓흔 놉흔 뫼, 집채 갓흔 바윗돌이나
: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 따린다, 부슨다, 문허 바린다
: 텨─ㄹ썩 텨─ㄹ썩 , 튜르릉 콱.
: (중략)

: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 됴그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 (하략)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은 개화기 때인 1908년 <소년>지 창간호를 내면서 맨 앞에 새로운 형태의 시를 빌어, 당시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이 좁은 영토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안주(安住)하지 말고 사나운 파도를 헤치며 과감히 해외로 떨쳐 나가자."는 내용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실었다. 벌써 1세기 전에 우리가 해외로 진출하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는 해상왕 장보고의 무언의 가르침을 전했다고나 할까.


: 우리를 태운 배는 칭다오 항을 벗어나 뒤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힘차게 달려나간다. 나흘 동안의 산둥성 답사는 우리들에게 해상왕 장보고라는 위대한 인물을 머리 속에 각인(刻印)시켰고, 아울러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 글을 쓴 육당 선생도 "우리 나라를 구원하는 자는 바로 한국을 바다의 나라로 일으키는 자"라고 전제하고, "경제의 보고, 교통의 중심, 문화 수입의 첩경, 물자 교류의 대로(大路) 내지 국가 발전의 원천, 국민 훈련의 도장인 이 바다를 내어놓고 더 큰 기대를 어디서 찾을 것이냐"고 역설했다.


: 일찍이 저녁 식사를 끝낸 우리는 조 순서에 따라 선장실을 방문, 배의 시설을 관람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중국 어선에 방해가 되고 배의 운행에 지장을 준다고 말도 못하게 하고,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선실에서 가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다른 배의 불빛과 형광 물질처럼 푸르스름하게 움직이는 레이다 화면, 그리고 묵묵히 잡고 서 있는 배의 커다란 핸들을 보며, 잠시 옛날 장보고 당시 이 항로를 생각해 보았다.


: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고대의 항로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우리 황해의 연안을 따라서 북으로 압록강 하구와 랴오둥[遼東] 반도의 남쪽 섬들을 경유하여 산둥반도로 향하는 서해북부 연안항로이다. 이 항로는 기원전 109년에 한무제가 우리 나라를 침공할 때 누선장군 양복(楊僕)이 수군 5만 명을 거느리고 왔던 항로로, 그 후 598년에 수 문제(隨文帝)가 고구려를 치러올 때나 612년, 614년 수 양제(隨煬帝)의 수군이 우리 나라를 침략할 때 역시 이 항로를 이용했다. 당나라의 가탐(賈耽)은 등주를 기점으로 노철산수도, 요동반도 남쪽연안, 압록강 하구, 대동강 하구, 황해도 연안, 경기만, 남양만 등으로 이어지는 이 항로의 노정(路程)을 상세히 기록해 놓기도 하였다.

 

: 다음의 항로는 서해안의 옹진반도 남쪽 연안에서 곧바로 서쪽의 산둥반도로 향하는 서해 중부 횡단항로이다. 오늘날의 지도상으로 보면 황해도 장산곶에서 산둥반도의 성산두까지는 너무도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항해술로는 결코 쉽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까지 인당수의 전설이 살아 있어 심청전에 등장했던 게 아닐까? 백제나 신라인들은 고구려의 영토를 거치지 않으려고 주로 이 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군대가 산둥반도 끝 성산을 출발하여 경기만의 덕적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셋째 항로는 서남해안에서 양자강 하구 쪽으로 향하는 남부 사단(斜斷) 항로이다. 같이 갔던 윤명철 교수는 현대인들의 의문을 풀어주고, 동아지중해 모델의 타당성을 실험하기 위해 뗏목을 만들어 타고 표류 항해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대나무 뗏목을 마련하여 고대인들처럼 남서풍을 이용하기 적절한 시기인 6월 하순 8,000여년 전 선박 유적이 발견된 남중국 절강성 해안을 출발해서 중간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17일 만에 동중국해를 횡단하여 흑산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 그 항로는 고려와 송나라 때 사람들이 이용하던 항로와 거의 일치한다고 덧붙였다.


: 이로 미루어 선사시대에도 이런 자연 조건을 이용하면 양지역간 교류가 가능했었다는 가설을 입증한 셈이다. 동아시아 해양에는 필리핀 북부에서 발원해 북동진하는 쿠로시오(黑潮) 해류가 있는데 그 일부가 한국의 서해연안을 타고 올라가 황해 북부를 돌아 남하 하다가 상하이만 부근에서 돌아 한반도 쪽으로 물길이 흐른다. 늦봄부터 초여름까지는 남풍계열의 계절풍이 북상, 자연스럽게 흘러온 배로부터 동남아 문화나 중국의 남방문화가 한반도 남부에 쉽게 상륙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본인들

: 이번 답사를 통해서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일은 법화원에서 일본인들이 저질러 놓은 만행을 목격한 사실이었다. 1등 문화 국민을 자랑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인간들은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어김없이 파고들어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연출한다. 요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동남아 전체가 들썩이고 있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 이 같은 사기극에 의해 우리와 충돌이 되었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로부터 광개토대왕비 조작 사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가 하면, 이번 교과서에는 우리 제주도민을 해적의 집단으로 매도해 원성을 사고 있다. 이왕 왜곡시키는 거 왜 제주도를 자기네 땅이라 하지, 해적의 집단으로 몰아 세우고 마는지 날아가는 새가 웃을 일이다. 왜냐? 자신의 조상들이 우리 나라를 마음껏 노략질해 간 왜적들의 후손들이니까. '왜적=자신들의 조상'이라는 등식은 성립 안되나?


: 특히 김성훈 교수의 '미래사 시각에서 본 장보고 해양 경영'이라는 글을 찾아 읽으면서는 끌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 1988년 2월까지만 해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실질적으로 한국 국적을 가진 학자들은 중국을 방문할 수 없었다. 이러한 외교 공백기를 틈타 중국에 먼저 발을 들여놓은 일본인 사학자와 언론인들에 의해 장보고 대사와 신라인들의 본거지였던 산동성 적산 법화원에 엄청난 역사 왜곡이 시도되고 있었다 한다.


: 당시 UN/FAO 자문 자격으로 중국의 왕래가 자유로웠던 그가 1988년과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처음엔 무등일보, 다음엔 이맹기, 박종규, 양재원씨 등 선주협회 회장단의 지원 아래 산동성 신라소 유적지인 적산을 찾았을 때는 벌써 법화원의 원 주인인 장보고 대사의 절터는 그의 식객(食客)이었던 일본인 승려 엔닌의 절터로 바꿔져 있었다고 한다. 1987년 1월 일본의 적산 법화원 연구회에서 이 곳을 방문하여 영성현에 '중수적산 법화원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그 이듬해 재차 방문하여 법화원 복원을 지원하면서 그 경내에 16개의 비석을 세워 놓고 그 중 두 번째로 큰 비석에 다카스미쓰유키 명의로 "배나무 밭 시원한 그늘 아래 엔닌의 옛 절터"라고 버젓이 새겨 놓은 것이다.이쯤 되면 주객의 전도(顚倒)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천백여 년 전 장보고 대사의 도움 없이는 당나라에서의 구법(求法)은커녕 생명도 부지할 수 없었고 귀국마저 불가능했던 엔닌의 후손들이 그 은혜를 역사 왜곡으로 갚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채만한 자연석을 깎아 세운 기념비에 장보고 대사와 신라원의 내력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엔닌의 위대함만을 높이 치켜세운 다음, 밑도 끝도 없이 한·중·일 3국의 우호의 원류라고 새겨 놓았다. 우호의 원류는커녕 분쟁의 시발점이 아닌가.


: 김성훈 교수의 노력으로 산둥성 당국은 1990년에 적산 법화원을 중건하면서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들을 모두 절 밖으로 내몰고, 그 앞줄에 한국 측에서 마련한 '장보고대사 적산법화원 기념비'가 세워지게 됐다는 얘기다. 중국 측도 확실하게 신라인 장보고 대사가 건립한 절이라는 증거 비석을 세워 놓았다. 장보고 대사 기념비의 비문은 장보고 해양경영사연구회와 중앙대 중국연구소가 지었고, 글씨는 장전 하남호 선생이, 소요 자금은 한국선주협회가 지원한 연구비의 일부로 충당하였다. 이것은 모두 한·중 외교관계가 이루어지기 전에 뜻 있는 인사의 노력으로 얻어 낸 성과였다.


: 그리고, 중국 현지에서의 일본인에 의해 유사한 역사 왜곡 행위가 다른 유적지에 되풀이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서 그 해 산동성과 강소성 해당 지방정부의 동의를 얻어 당시로는 한·중간 외교 관계가 없기 때문에 지난 국제여행사 이름을 함께 넣는다는 조건으로 산동성 문등현의 유산포와 강소성 연운항의 숙성촌 두 곳에 추가로 장보고 당시의 신라인 유적지임을 기념하는 돌비석[石碑]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 같은 해 10월 8일에는 장씨 종친회를 앞세워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실물 크기의 장보고 대사 영정을 새로 중건한 적산 법화원에 봉안했다. 그보다 앞서 일본인들이 안치한 엔닌 화상 그림 자리에 그 원주인인 장보고 대사 영정을 모신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그만 역사는 한·중 사이에 전혀 외교관계가 없었던 때 '장보고연구회'가 현지에서 연구 조사를 수행하면서 교섭하여 이룩한 순전히 민간 외교 차원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정말이지 너무 오래되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장보고 대사의 유적을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건지 당국의 성의 있는 답변을 듣고 싶다.

△해상왕 장보고 시대의 청해진을 상상한다

: 배는 여전히 물살을 가르며 힘차게 나아간다. 이런 속도로 가드라도 내일 오후가 돼서야 인천항에 도착하는 것이다. 혼자 배 뒷전에 앉아 맥주 캔 하나를 따서 홀짝이며 김성훈 교수가 쓴 글의 도움을 얻어 천백여 년 전으로 돌아가 청해진을 여행하는 상상의 나래를 편다. …당시 인구가 겨우 백오십여 만을 헤아리는 한반도 신라국의 서남해안 최남단, 청해진에는 이른 새벽부터 수백 수천의 뱃사공들과 현지인들이 부산을 떨며 동양 세계 각국으로 떠나고 들어오는 떠들썩한 소리로 생동감이 넘친다.


: 서라벌의 감포, 일본 규슈의 하카다,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을 비롯 산동성의 적산포, 유산포 및 밀주, 강소성의 연운항, 회안 연수향, 양주, 소주, 그리고 절강성의 영파, 항주, 복건성의 천주 및 복주, 나아가 광동성의 광주 등으로부터 온 신라인, 일본인, 중국인, 심지어 중동 페르시아인들이 한창 어우러져 흥정과, 환영과 석별을 나누노라 야단이다. 범선 항해시대의 청해진 완도 해역은 나·당·일 3국 항로의 요충지가 아니었던가.


: 완도 앞바다는 당나라와 일본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동북아 항해의 길목이었다. 청해진 앞바다는 완도군에 속하는 2백여 개의 섬과 암초, 밀물과 썰물의 변화, 흑조대, 그리고 계절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해류, 해풍 등으로 변화무쌍한 곳이다. 그럼에도 완도 앞바다가 3개의 극동항로의 중심부가 된 것은 안전 항해가 자연적 변수에 의해 좌우되었던 범선시대에 육지나 섬에 가까이 접근하여 항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당시 또 하나의 국제항로는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와 중국 동남부를 연결하는 이른바 남양항로였다. 이 항로에 의해 광동성, 복건성, 절강성, 그리고 강소성의 양주가 남방무역권의 접촉지역이 되었다. 금세기의 세계무역항로가 미국을 향한 태평양항로와 대서양항로라고 한다면 장보고 시대를 전후한 7∼10세기 세계 주력 항로는 앞에 든 극동항로와 남양항로였다. 이 두 항로가 9세기에 이르러 장보고 상단에 의하여 서로 연결돼 비로소 남북무역망의 결정적인 통합고리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 완도 청해진은 단순히 극동항로의 중심부일 뿐만 아니라, 남양항로와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고리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나·당·일 문헌기록이 공동으로 인정하는 백제계 신라인들의 탁월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장보고 상단의 조직력에 크게 기인한다. 완도해역은 특히 조류가 복잡한 곳이다. 장보고는 바로 이런 해풍·해류·조류·다도해 등의 자연조건을 잘 살려 완도에다 청해진을 설치, 동양 3국의 바다를 호령하면서 황해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동양 3국의 항로를 장악한 청해진 종합상사의 취급 품목 또한 다양했다. 장보고 시절 신라의 수출 대종 상품은 견직물·마포·금·은·인삼·약재·마피·모피류·공예품이고, 당의 주요 수출품은 주단·약재·공예품·도자기·서적 등이었다. 여기에 페르시아 상인들이 가져온 각종 향료와 악기·상아·보석류·카펫·유리제품 등이 추가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산인 자단 ·심향·비취모·대모·공작미 등이 있다.

 

: 특히 장보고 상단이 일본에 싣고 간 박래품의 인기는 대단했다. 일본에서는 박래품에 대한 값을 비단·금·소뿔 등으로 결제했는데, 요즘말로 하면 부등가 교환으로 인한 무역 역조현상이 뚜렷했던 듯하다. 일본 조정은 귀족사회의 사치풍조에 대해 수차제동을 걸었으나 청해진 상단이 제공한 부증품(일종의 사례금)에 의해 치부를 한 다자이후 관헌들이 적극적 단속을 기피, 큰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신라 흥덕왕도 서방세계의 사치품·전래품 등에 대해서는 한 때 수입금지 조치를 단행한 기록이 있다.


: 해상왕 장보고 따뜻한 인간애와 정의감, 그리고 동포 사랑과 국제화 정신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계 동포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한편, 당나라가 당시 비록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고는 해도 무령군 중소장직에 이어 대사라는 직명을 부여했을 만큼 중국에도 큰공을 세운 듯하고, 영향력도 막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한편, 신라 본국으로부터 대번에 군사 1만 명을 거느리도록 허락 받은 사실이라든지 감의 군사, 진해장군을 제수 받고 식읍 2천호를 하사 받은 배경, 그리고 두 나라에서 공히 행정상 자치권을 누렸다는 사실은 오늘날로 말하면 장보고 대사가 두 나라 국적을 초월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치외법권을 부여받고 활동하였음을 뜻한다.


: 또 하나 장보고 지휘하의 청해진 그리고 재당 신라인들은 대부분 상공업과 해운·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나·당·일의 경제이익에 공히 기여함으로써 실제 공무역과 그를 대신한 사무역 행위를 전적으로 주관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오늘날 다국적 종합상사나 초국경 기업도 감히 행하기 어려운 거래 형태이다. 정경일체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이 같은 거래 행태는 당시 나·당 또는 나·일의 정치경제 관계가 불편했을 때, 또는 조공무역이 종종 형평성을 결여하여 어느 한 쪽의 불평의 대상이 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이럴 경우 관련국 서로에게 편리한 반관반민의 무역형식, 즉 장보고 상단에 의한 견당매물사와 대당매물사 방식이 성행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 새로운 장보고의 출현을 기다리며

: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본토를 중심으로 파문이 일듯 주위로 번지며 살고 있다. 중국에 200여만의 동포가 있고 연해주 등 러시아와 구 소련에 50여만 명, 일본, 미국 등에 250여만 명, 그리고 남북한에 6∼7000만 명, 도합 7,500만 명의 우리 민족이 주로 동북아지역에 밀집해 있다. 9세기 장보고 시대의 고구려, 백제 유망민과 신라인들이 중국대륙 곳곳에 퍼져 있던 양상과 비슷하다. 더구나 지금 중국 동포들이 모국으로 찾아와 어떻든 돈을 벌어 살아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나, 북한에서의 어려움을 못 견뎌 중국으로 탈출하려는 동포들이 늘고 있다. 이는 당시 백제나 고구려, 신라의 유민들이 중국에 흩어져 살던 때와 매우 유사한 상황.


: 이럴 때 이 같은 인적 자원을 어떻게 장보고 대사처럼 동북아경영의 소중한 자산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동북아경제권 구상은 겨레와 조국의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우리의 과업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장차 동북아 경제협력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실현함에 있어 우리의 자본력과 기술수준이 어떻게 주도적으로 제몫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며 민족적 단결을 이루어 낼 것인지 연구해야 한다.


: 이번에 1차 답사반에 교수 자격으로 참가했던 황상석 동호회장은 그의 저서 '장보고를 알면 세계가 열린다'에서 "이제는 개인이든 기업이나 국가든 국제 경쟁력을 갖추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맞고 있다. 변화에 앞서 변신을 시도하는 기업은 살아남지만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경제환경이다. 이 같은 개방화 시대에서 생존하려면 무엇보다도 장보고가 시행했던 해상무역 활동을 면밀히 연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장보고는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대외 지향적 사고를 갖고 우리 나라의 무역을 개척한 선각자였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해 해상왕 장보고 같은 역할을 담당할 인물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 황상석 교수가 강의 시간에 우리들에게 강조한 내용이 담긴 글을 옮겨 본다.『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은 오늘날 '세계 경영'과 일치하는 측면이 많다. 그는 오늘날 세계 경영을 추구하는 최고 경영자가 가져야 할 자질인 리더쉽·기획력·자금 동원력·섭외력 등을 갖고 있으며, 더불어 탁월한 국제적 식견과 해외 개척 정신까지 갖췄다. 그의 해외 개척 정신은 벌서 20대 초반에 후배인 정년과 함께 당나라 쉬저우로 건너갔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 모험심만 있는 게 아니라 용맹성도 갖추었다. 두목은 <번천문집>에서 "장보고가 싸움도 잘하며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면 그들의 본국에서는 물론 서주에서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게다가 호걸다운 인간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그가 노예로 매매되는 신라인의 참상을 목격한 뒤 '고급장교'에서 '국제 무역상'으로 인생의 진로를 바꾼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아울러 흥덕왕을 배알하고 청해진을 설치하라는 허락을 받아낸 것만 봐도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언변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 그리고, 장보고는 오늘날 세계경영의 핵심인 네트워크 형성에 발군의 실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21세기는 네트워크 경영시대이다. 세계경영에 성공하려면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신속한 의사전달과 정보 교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판매의 현지화, 금융의 복합화, 자원확보의 세계화, 기술과 정보의 네트워크화 전략을 적절히 구축해야 한다.


: 특히 모든 생산 수단을 기업 내에서 소유할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생산시설을 찾아 네트워크한 뒤 생산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장보고는 재단 신라인과 신라 무역상단이 연계한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가 한·중·일을 잇는 국제교역에 필요한 선박들과 항해술이 뛰어난 선원들은 물론 통역관과 조선, 운수 등 국제무역에 종사할 인재들을 충분히 활보할 수 있었던 것도 신라 본국과 재외 신라인 조직을 네트워크화했기 때문이다.


: 그는 무역의 대동맥인 대운하변의 추저우, 렌수이현, 양저우, 밍저우, 취안저우, 광저우 등지에서 교역활동에 종사하던 신라인을 조직화하였다. 당과 일본에 살고 있던 재외 신라인들을 규합하는 해외 자치 조직과 모국을 연계해 '한민족 경제공동체'를 추구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인적·물적·교류를 추진했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문예부흥을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보고의 세계경영은 먹고 먹히는 정글의 경쟁이 아닌,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윈-윈(win-win) 경쟁'을 추구했다. 그는 또 오늘날 재벌처럼 수직 계열화를 통해 '독식'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아웃소싱(외부조달)'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었다. 예를 들면 중국 연안의 해운·무역업자, 일본의 무역상인과 연계하되 독식한 게 아니라 필요한 업무를 아웃소싱해서 공동 이익을 추구했다.


: 이런 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세계화의 교재로 삼아야 한다. 앞서 '장보고 해상 무역'은 '세계경제의 조류'와 일맥 상통한다고 밝혔다. 세계화를 달성하려면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창적인 이론을 정립하는 것도 시급하다. 육의전에 앉아 편히 장사하는 시전상인의 안이함이 아니라 빗 하나, 장신구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던 보부상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필요가 있다. '행상'은 백제가요인 '정읍사'에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한국의 고유한 유통시스템이다.


: 행상은 고을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소비자들이 원하는 생필품을 파고 대신 식량 등 필수품을 사줬다.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은 행상 등 직접방문판매이다. 육상 유통조직의 총아인 행상은 사실 당나라에서도 맹활약했다. 재당 신라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화이허와 양쯔강등 대운하 연변을 왕래하며 숯, 소금 등 각종 필수품을 사 모으는 행상에 종사했다고 엔닌은 그의 일기에서 적고 있다. 어쩌면 장보고가 3국간 해상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동부연안을 돌아다니며 생필품을 수집, 판매하는 재당 신라인 출신 행상과 선박 및 선원들을 보유한 해운업자, 연안 무역업자들이 연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 장보고 무역상은 모든 분야에 진출하는 백화점식 경영이 아니라, 핵심분야가 아닌 자원은 외부에서 조달하고 필요할 경우 경쟁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결론적으로 장보고의 해상무역은 오늘날 세계경제의 요체를 담고 있다. 그는 진정한 개방주의자이며 자유무역주의자의 면모를 갖췄다. 또한 세계 최초로 국제 민간 교역을 행한 주인공이며 국경을 초월한 세계화를 맨 먼저 실천에 옮긴 '국제무역상'이었다.


: 따라서 신라와 당, 일본 등 3국 무역을 독점한 장보고를 알면 오늘날 국제무역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할 수 있다. 특히 장보고 해상활동에는 인터넷 교역시대에 맞는 네트워크 시스템 경영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개무역 활성화, 해외동포와 연계된 무역 네트워크 구축, 동북아 경제권 구축, 세계화 대응전략, 국제무역의 진흥방안 등 한국 경제의 난제를 해결할 지혜와 교훈을 장보고에서 찾을 수 있다.』 (황상석 교수의 저서 「장보고를 알면 세계가 열린다」에서 뽑음)


: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새로운 장보고의 출현을 기다린다. 아니 기다릴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야 한다. 당국에서는 심혈을 기울여 외교적 역량과 경영적 수완이 남다른 인물을 발굴, 적극적으로 예산을 투입하고 외교적으로 뒷받침하여 마음껏 활동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경제 소생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답사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살 길을 찾는데 획기적인 발상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우리 선생님들께서는 해상왕 장보고를 통해서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진취적인 기상을 심어주는 한편,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넌지시 알려줄 필요가 있다.

*우리들에게 이런 소중한 기회를 주신 (재)해상왕장보고 기념사업회와 동아일보사,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해양수산부, 협찬을 해주신 위동항운 유한공사와 (주)지학사, 그리고 진행을 담당한 (주)굿모닝 차이나 팀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또, 재미없는 글을 끝까지 읽고 성원해주신 독자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