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타이완(대만) 3박4일 답사기 (3)

김창집 2003. 10. 30. 14:36


 

(국립 예류 해양 공원의 기묘한 바위)

 

◎ 2003년 10월 4일(토요일) 흐림

 

▲ 특효약 판매장에 들렀다 비행기로

 

 태로각 협곡에서 돌아와 비행기 탑승 시각인 18:45분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고, 가이드는 우리를 한 판매장으로 인도한다. 본토든 타이완이든 홍콩이든 한약 판매장에 들르는 일은 하나의 관행처럼 돼 있으니 굳이 나무랄 생각 없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따라 들어갔다. 입구에 조그만 사슴을 박제해서 걸어놓은 것을 보며 방으로 들어섰는데, 낮에 우리 가이드와 차를 몰고 역에 나왔던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차를 한 잔씩 돌린 다음 인천에서 왔다는 김씨가 나서서 차와 약에 대해 설명했다.

 

 차는 고산족이 뜯어온 자연산 동정(凍頂) 우롱차(烏龍茶)로 보통 포장에 미화로 10달러라기에 나를 데리러 온 인연도 있고, 두 봉지를 샀다. 다음, 대만에 다녀간 한국 사람이면 꼭 사간다는 무좀 특효약을 판매한다며 사용법을 얘기한다. 약장사가 다 그럴 듯하게 말하지만 한 가지 의심나는 점은 이 약이 대만 군대에서 몰래 나온다는 것이다. 마지막 비싼 약은 신경통 관절염약이다. 고산에서 나는 약재로 특별 조제한 것이라는데, 오래된 관절염도 완치 될 수 있다고 사용법을 힘주어 말한다. 그래도, 몇 분이 그 비싼 약을 구입했기 때문에 인사치레는 된 셈이다.

 


(약방 입구의 사슴 박제와 약장사 김씨)

 

 그곳을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항으로 갔다. 타이완섬은 폭은 그리 넓지 않지만 타이완 산맥이 높게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항공에 의존도가 높아 항공사가 7개나 된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역간에는 프로펠러가 달린 쌍발기가 운행되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19:20분에 타이페이 시내에 가까운 송산 비행장에 도착하기 때문에 35분간 나는 셈이 된다. 오전에 특급열차 편으로 3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이 시간이 비행기와 열차의 차이인 셈이다.

 

 나의 좌석은 창가에 있어 한 동안 화련 시가지의 불빛을 볼 수 있었으나, 곧 어둠에 묻혀버렸기 때문에 차 대신 받은 맥주 캔 하나를 홀짝이며,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였다. 옛날 포르투갈 선원이 처음 발을 딛었을 때 '포모사(Fomosa)' 즉 '아름답다'라고 탄성을 질렀다고 자랑하는 섬 타이완은 아름답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랫동안 중국 본토의 지배하에 있던 이 섬은 포르투칼 선원이 다녀간 후 서양 여러 나라가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던 이름 모를 꽃)

 

▲ 처절했던 식민주의 역사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타이완섬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중국 사람들이었는데, 3세기 중엽의 중국 문헌인 '임해수토지(臨海水土志)'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후 7세기 초 수(隋)나라 때부터 한민족이 타이완의 정찰정략(偵察征略)을 시도했는데, 원(元)나라 때에 이르러 1360년 펑후섬에 처음으로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한민족의 도래가 증가했고, 동시에 서구 열강들도 타이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앞서 말한 대로 1590년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여러 곳을 살핀 후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으로 포모사(Fomosa)라고 명명하고 서양 여러 나라에 알렸다. 그 후 서양의 국가로는 처음으로 네덜란드가 타이완 남부의 한민족을 누르고, 1624년 안핑[安平:臺南市]에 제란디아성(城)을 구축했다. 에스파냐도 1626년 지룽[基隆] 지방의 서랴오섬[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다시 3년 후에는 단수이항[淡水港]에 산토도밍고성을 축조하고 타이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네델란드는 1642년에 에스파냐를 몰아내고 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양밍산 곳곳에 서 있었던 야자를 닮은 큰고사리)

 

 1661년 명나라의 유신인 정성공(鄭成功)이 부하를 이끌고 타이난[臺南]에 상륙하여 제란디아성을 점령해서 네덜란드인을 항복시키고, 이곳을 항청복명(抗淸復明)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1683년 6월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 청(淸)은 타이완에 진격하여 정군(鄭軍)을 무조건 항복시켰으므로 정(鄭)의 타이완 지배는 불과 3대, 23년으로 끝난다. 다음해인 1684년 청은 타이완을 푸젠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타이완부(府)를 설치하였다.

 

 그 후 대륙으로부터 이민이 격증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신천지를 개척하고 1885년 타이완은 하나의 성으로 독립하였다. 청일전쟁(淸日戰爭) 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1895]에 의거 타이완은 213년간 계속되었던 청나라의 통치를 벗어나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에 복귀할 때까지 타이완은 51년 간 일본치하에 놓여 있었으며, 1949년에는 중국공산당의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國民黨)의 장제스(蔣介石) 정권이 타이완으로 이전하여 그 지배 체제가 유지되어 왔다.

 


(아름다운 예류공원에 모여든 관광객들)

 

▲ 타이페이에서의 두 번째 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창밖을 바라보니 불빛이 환한 타이페이시다. 남쪽에서 오면서 시가지 북쪽에 있는 국내선 공항인 송산 비행장으로 가기 때문에 오랫동안 도시 위를 날지 않으면 안되었다. 수도 타이페이[臺北]는 타이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면적이 272㎢에 인구는 약 280만 명이다. 서울이 면적 605.52㎢에 인구 약 1,028만 명과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꽤 여유가 있는 편이다. 타이완의 인구는 산악지대를 제외한 온 섬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한다. 타이페이시는 급격한 근대화 속에서도 옛 모습 그대로의 사원과 거리, 고층 빌딩들과 패션가 등이 독특한 조화를 이루며, 지금은세계를 향한 정보 발상지인 국제도시로 컴퓨터 업계에서는 제일로 친다.

 

 저녁 식사는 도심지 현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의 불고기 백반이었다. 가끔 현지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식을 집어넣는 일이 있지만, 결코 장려할 만한 일이 못된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음식이란 그 나라 그 지역의전통과 문화를 축적해 놓은 것이어서 그 나라에 답사를 나가면 그 곳의 전통 음식을 먹는 것이 필수 코스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식으로 빙 둘러앉은 식탁 가운데 가스렌지를 놓고 불판에다 돼지고기 양념한 것을 올려놓았다. 콩나물이라든지 멸치 볶음, 파래 무침 등 흉내는 냈지만 아무래도 미흡하다.

 


(예류공원의 버섯을 닮은 여러 가지 바위들)

 

 시장이 반찬이라고 맛은 그런 대로 괜찮아 불고기와 밥을 더 청해 먹는 사람도 있었다. '8기 잉꼬'라고 별명이 지어진 60대 부부가 가져온 한라산 됫병에 남은 술 한 컵이 더욱 음식 맛을 좋게 하였다. 이곳 타이페이의 맛있는 요리를 먹어볼 기회를 가지려 해도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 없는 것이 아쉽다. 여기서도 본토의 요리인 북경의 오리구이 베이징덕이라든가, 광둥요리인 얌차는 물론, 입에 넣는 순간 할 말을 잃게 한다는 만두 샤오룽바오(小籠包),장어구이 만충(鰻重), 중화면의 본고장에서 먹을 수 있는 뉴러우멘(牛肉麵), 파이구멘(排骨麵), 단쯔멘(擔仔麵) 등 면 종류….

 

 내일을 기대해 보라는 가이드의 말만 믿고 숙소로 돌아와 보니, 어젯밤 잤던 방이 새 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저께부터 잠을 설친 룸메이트가 먼저 샤워를 하고 조금 눈을 붙이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는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와보니 너무나 곤히 잔다. 그냥 깨우는 것이 안타까워 어디서 전화나 오면 깨워야지 하고 드러누웠다가 나도 깜빡 잠들어 깨고 보니, 11시를 훌쩍 넘겨버렸다. 어떻게 됐는지 아무케나 술 멤버 방에 전화를 넣어보니 난리였다. 어제 잤던 방에 수 없이 전화를 했지만 받지도 않고, 가서 초인종을 누르다 못해 문을 두들겨도 감감 무소식이어서 우리만 어디 나간 줄 알고 있었다. 12시가 다 되어 김 원장을 부르니, 부부가 같이 왔기 때문에 왕따 당했다고 혼자 술 한 잔 하고 자려는 찰나였다. 아무튼 12시 넘어 불러낸 술꾼들과 얼려 편의점에서 사온 국물과 과일로 소주 파티를 끝내고 3시경에 잤다.

 


(유황 분화구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목의 억새)

 

◎ 2003년 10월 5일(일요일) 흐린 후 맑음

 

▲ 국립공원 양밍산 및 온천지대 관광

 

 이번에는 꼭 아침 운동을 하리라 결심하고 눈을 뜨니, 6시가 곧 지나 있었다. 룸메이트가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 간단히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길을 모르기 때문에 표적이 될만한 건물이나 장소를 머리 속에 입력하며 천천히 달리다 보니, 중화로가 곧게 일직선으로 펼쳐진다. 도심지이면서 양쪽을 공원처럼 넓히고 꽃을 심고 보도 블럭을 깔아 뛰기에 안성맞춤이다. 마침 일요일 이른 아침이어서 차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육교 로터리를 표적으로 하여 곧바로 뛰어 타이페이역 가까운 곳에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

 

 어제 아침처럼 호텔 뷔페식을 하고 오늘의 일정을 살핀다. 타이페이 근교에 있는 양밍산(陽明山)은 서울로 치면 북한산과 같은 시민들의 공원이다. 해발 1천m가 넘는 휴화산으로 나무나 숲 등 주위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워 돈 있는 사람들이 별장이 늘어서 있다. 양밍산 기슭에는 아직도 부글거리며 노란 유황 연기를 내뿜는 자연 온천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온천수는 특히 류머티즘, 위장, 피부, 부인병 등에 좋다고 하여 즐겨 찾는다. 우리 나라보다 조금 빠른 시기인 3월∼4월에는 진달래, 매화, 살구꽃 등 갖가지 꽃이 만발하기 때문에 타이완에서 꽃놀이 장소로 이름이 높다.

 


(노랗게 유황이 뿜어져 나오는 소유갱의 분화구들)

 

 오를수록 기생화산체들이 오름처럼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나무만 아니었으면 제주도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 중에 몇몇 아는 나무를 제외하고는 모른 것 투성이다. 열대이면서 고산지대이다 보니까 내가 모르는 풀과 나무가 너무 많아 우물안 개구리의 실력이 탄로 날까봐 입을 꼭 닫았다. 유황을 내뿜는 분화구가 가까워지자, 빗방울이 떨어지며 안개가 퍼진다. 억새 동산을 지나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으로 가보니 가마솥 만한 곳에서 흙과 유황이 범벅되어 들끓는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손을 대니, 뜨겁다. 빗방울이 커지고 멀리 있는 유황 구멍이 흐려져 사진만 몇 장 찍고 나왔다.

 

 사무실에 들러 자료를 보니, 이곳은 칠성산 소유갱(小油坑)으로 여러 곳에이런 갱들이 있다. 나오면서 보니까 일요일을 맞아 등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오다가 들른 곳은 조그맣게 노천온천 시설을 해놓은 마조농촌(馬槽農村)이라는 곳이다. 기념 삼아 수건을 한 장 사고 들어가 좁은 탕에 몸을 담갔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위쪽 동산으로 가서 좀더 낮은 온도의 물로 들어갔다. 이곳저곳 다 경험하자고 팩을 할 수 있는 농도 짙은 탕에 들어가 한동안 유황 냄새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는 맛사지실을 제외한 모든 곳을 들락거리다가 나와 할머니가 파는 오메기떡 비슷한 것을 사먹었다. 아쉬운 것은 사진을 못 찍은 점인데, 노천이기는 하지만 이곳저곳 모두 붉고 시커먼 것들뿐이어서 사진기 들이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노천온천 주변의 기생화산체 즉 오름들)

 

▲ 너무도 특이하고 아름다운 예류공원

 

 원래 오늘의 일정은 오전에 타이페이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인 국립 예류(野柳) 해상공원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점심 식사를 한 뒤 양밍산을 들렀다가 온천욕을 실컷 하고 돌아와 중국 요리를 먹고 용산사와 야시장을 견학하는 것이었는데,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아무래도 처음 예정됐던 목요일∼일요일 코스가 하루씩 순연 되는 바람에 월요일에 박물관 들르게 된 계획은 잘못이라는 게 나의 주장이었다. 세상에 큰 박물관 치고 월요일에 문을 여는 곳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확인됐다고 하길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 오후로 앞당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늦게 온천욕을 가면 사람이 너무 붐비기 때문에 바꿨다는 것도 이해가 되어 먼저 양밍산행을 하고 온천욕을 한 것이다. 차에서 내릴 때부터 잘려나간 바위가 예사스럽지 않아 조심조심 들어서는데 해양수중공원에서는 마침 고래들이 쇼를 하며 튀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다 쪽으로 발을 옮겨 놓는 순간 혹시 다른 혹성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곳에는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 마치 외계인들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가가 보니 버섯 같은 형태로 솟은 바위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예류공원의 두부바위. 돌이 꼭 두부를 썰어놓은 것 같다.)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누르며 전진하니, 한쪽에는 젖꼭지 모양의 바위들이 모여 있다. 이름도 유두(乳頭)바위라 명명되었다. 푸른 바다에서 몰아오는 흰 파도가 오랜 세월 무른 돌을 깎아 성질이 다른 비교적 강한 바위가 얹혀 있는 곳만 남겨 놓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된 것이리라. 아무리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하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빚어낸 자연의 힘이야말로 외경(畏敬)스럽다고나 할까?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겠다. 여왕의 머리를 닮은 것, 구두를 닮은 것, 계란을 닮은 것, 구두를 닮은 것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바위도 있다.

 

 두부바위라 이름한 것은 돌을 같은 크기로 썰어놓은 것 같았다. 원래 3시간 코스인데, 시간이 부족하여 끝까지 가보지 못하고 중간에 서 있는 산같은 바위 꼭대기까지만 갔다가 발길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알록달록한 복장에다 카메라까지 위장을 한 일행이 바위 끝에 가서 물새를 찍고 오는 것이 보여, 오는 길에 다가서 보니 가만히 앉은 물새 한 마리를 찍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여 맞춰놓은 카메라 렌즈 속을 들여다본 순간 거기에는 도요새로 보이는 하얗고 앙증맞은 새가 곱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약속된 시간이 임박해 있어 눈총을 받을까봐 뛰었다. (계속)

 


(유두 바위 앞에 선 필자)

 

♬ 장국영, 오천련  '야반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