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타이완(대만) 3박4일 답사기 (6)

김창집 2003. 11. 18. 00:45

 


 

(중정지넨탕의 정문인 다중지정먼(大中至正門)에서 기념 촬영)

 

◎ 2003년 10월 6일(월요일) 맑은 뒤 비

 

▲ 장제스 총통의 모든 것 - 중정지녠탕 ①

 

 '장제스'는 '장개석(蔣介石)', '중정지녠탕'은 '중정기념관(中正紀念堂)'의 현지어 발음이다. 중정(中正)은 장제스 총통의 본명인데, 개석(介石)으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주객이 전도되어 호처럼 사용된다. MRT 중정지넨탕 역 바로옆에 펼쳐져 있는 25만㎡나 되는 광대한 부지의 중전지넨궁위안은 중정기념관을 포함하고 있는 공원이다. 1975년 장개석 총통이 서거하자 국내의 각계인사들은 고인이 남긴 위업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을 모아 중정기념관 설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만든 후 정부에 건의, 1976년 10월 31일에 착수, 이듬해인 1977년 11월에 본격적 공사에 들어가 3년의 시공 끝에1980년 3월에 완공, 같은 해 4월 5일에 정식 개관하였다.

 

 중산난루(中山南路)에 면한 정문은 다중지정먼(大中至正門)이다, 중앙에 쓰여 있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은 '무슨 일에도 중용을 지키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는 장제스의 의지와 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그의 친필인데, 밤이 되면 조명을 밝힌다. 정문에서 이어지는 너비 40m, 길이 480m의 잔양다다오(膽仰大道)를 다 걸어가면 높이 70m를 자랑하는 중정지넨탕이 위용을 드러낸다. 장제스 기념당은 에메랄드 칠을 한 파란 기와와 대리석 하얀 벽의 아름다운건물, 색채는 청천백일 또한 팔각지붕 라인은 '사람 인(人)' 자를 모방한 것으로 중국 전통의 '천인합일(天人合一)'에서 디자인을 따왔다.

 


 

(수리중인 장제스기념당의 위용) 

 

 장제스기념당은 마침 외부 수리 중으로 사방이 온통 공사를 위해 얽은 쇠막대와 망사에 둘러싸여 있었다. 다중지정먼을 지나면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원이광창(文藝廣場)이 나타나고 왼쪽에는 세에산(歇山) 양식으로 지은 콘서트홀인 궈자인러팅(國家音樂廳), 오른쪽에 우잔 양식으로 지은 극장으로 쓰이는 궈자시쥐위안(國歌戱劇院)이 있다. 그리고 루이(如意) 화단을 낀 잔양다다오를 지나 장제스의 생존 연수에 맞춘 89개의 계단을 오르면 본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소가 있고, 한쪽 구석에 장제스가 타고 다녔다는 1972년식 캐딜락이 한쪽에 잘 닦여진 채로 세워져 있었다.

 

 거기서 이곳저곳 방을 돌며 생전에 장제스의 생애를 느낄 수 있도록 해놓은 전시물을 보았다. 총통부에 있던 그의 사무실을 재현한 '장제스 기념실'에는 실물을 쏙 빼 닮은 마네킹이 책상 앞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다. 벽에는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친히 그린 그림이 붙어 있어 둘 사이의 관계를 암시해 준다. 옆에는 장제스의 생애를 소개하는 문물전시실과 화랑, 영사실, 도서관 등이 있다. 한 전시실에서 장제스 총통이 외교 관계를 나타내는 여러 국가 원수와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한 때 아시아의 가까운 반공국가로 서로 오가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1992년 8월 한국이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1996년 현재 대사관이 아닌 대표부로 격하된다. 그로 미루어 국가간에는 영원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지휘봉을 잡은 장제스, 생전의 모습) 

 

▲ 장제스 총통의 모든 것 - 중정지녠탕 ②

 

 2층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건물 같으면 4층 높이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그곳에는 높이 6.3m나 되는 장제스의 거대한 청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뒷벽에는 삼민주의(三民主義)의 본질인 논리(論理), 민주(民主), 과학(科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양쪽에 하얀 제복을 입은 위병이 M16 총에 착검을 하고 그린 듯이 서있다. 기념 촬영을 하고 있으려니까 가이드가 다가와서 마침 10시에 위병 교대가 있으니까 보고 가자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3명의 위병이 총을 들고 입장하여 지휘자의 신호에 따라 직각으로 절도 있게 걸어가 교대할 위병 앞에 서서 신호에 맞춰 천천히 간단한 절차를 행하고 교대해서 돌아간다.

 

 장제스는(1887∼1975)는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바오딩(保定) 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일본에 유학하였다. 그 무렵 중국 혁명 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한다. 1918년 쑨원(孫文)의 휘하에 들어가 주로 군사면에서 활약하고, 1923년 소련을 방문 적군(赤軍)에 대해 연구한다. 1924년 황푸군관학교 교장,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북벌을 개시하였다. 1927년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였으며, 1928년 베이징(北京)을 점령한다. 난징(南京) 국민정부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이 되어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광둥(廣東)과 광시(廣西)의 군벌들과 펑위샹(玉祥), 옌시산(閻錫山) 등 지방 군벌을 누르고, 1930년부터는 5회에 걸쳐 대규모 중국공산당 포위전을 수행하였다.

 


 

(장제스가 탔던 차, 1972년식 캐딜락)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선 내정을 안정시키고 후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세워 군벌을 이용, 오로지 국내통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내전정지(內戰停止) 일치항일(一致抗日)'을 외치는 여론이 높아진 가운데 1936년 독전(督戰)을 위하여 시안(西安)에 갔다가 장쉐량(張學良) 군대에 감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1937년 국공(國共)합작으로 육해공군 총사령관의 책임을 맡고 전면적인 항일전을 개시하였다. 항일전쟁 중에는 국민정부 주석, 국민당 총재, 군사위원회 주석, 육해공군 대원수 등의 요직을 겸직하여 최고권력자로 군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다시 중국공산당과 결별하고 내전을 개시한다. 처음에는 우세하였으나 1949년 12월 완전히 패퇴하여 본토로부터 이곳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겨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자유중국', '대륙반공'을 제창하며 중화민국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서 타이완을 지배하였다.

 

 그 곳을 나온 우리는 시간을 정해 공원의 여러 곳을 구경하였다.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화단에는 여러 가지 꽃을 심어놓았다. 그 중에도 화단 양쪽으로 윈한츠(雲漢池), 광화츠(光華池)의 못을 조성하여 중국식정원을 꾸며 놓았고 산책로와 건강보도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마침 광화츠못에는 왜가리 3마리가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고, 철판 위에는 자라 4마리가 나와 한가로이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목이 말라 주변에 있는 자판기에서 병에 든 녹차를 뺐는데 가당(加糖)이어서 개운치 못하다. 다중지정먼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밖으로 나왔다.

 


 

(거대한 장제스의 동상 앞에서 근무 교대를 하는 장면)

 

▲ 장제스를 구한 여인 쑹메이링(宋美齡)

 

 우리가 중국을 다녀오고 이 글을 연재하는 도중인 10월 24일(한국 시간),장제스 총통 부인인 쑹메이링 여사가 향년 106살의 나이로 뉴욕에서 숨졌다는 뉴스가 있었다. 현지 언론들은 "중국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 우아함으로 미국을 사로잡은 여인, 중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송 여사가 숨졌다."는 보도를 했다. 1927년 장 총통과 결혼한 송 여사는 화려한 외모와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퍼스트 레이디이자 외교 고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75년 장 총통이 서거한 뒤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한 아파트에서 외롭게 생활해 왔는데, "뉴욕 근교의 묘지에 묻어달라."는 유언만을 남겼다는 보도다. 답사 도중 가이드에 의해서 몇 차례 송 여사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만 체계적으로 그녀의 생애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광둥성(廣東省)에서 저장(浙江)의 재벌 송씨가(宋氏家)의 3자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미국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장제스와 결혼한다.

 

 그후 장제스의 통역으로 활약, 대미관계 조정에 수완을 발휘하며 국민정부 입법위원, 항공위원회 위원, 비서장, 부녀협회 실생활 운동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폭넓게 활약하였는데, 이재(理財)에도 밝다는 평을 들었다. 1936년 시안(西安)사건 때는 강경파의 의견을 제지, 시안으로 들어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단독 면담을 한 끝에 장제스를 석방시켜 역량을 과시한다. 항일전과 공산당과의 내전 중에는 상이병 간호, 난민 대책 등을 지휘하는 한편, 1942년 미국 각지를 돌며 지원 강화를 호소하였다. 1943년 카이로회담 때는 장제스를수행하였다.

 


 

(광화츠 못에서 한가로이 햇볕을 쪼이고 있는 자라들)

 

 1950년 타이완으로 건너간 후에는 국민당 중앙평의위원, 타이완 부녀 반공항소연합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75년 장제스 사망 이후 10년간 미국에서 살면서도 타이완과 미국과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1986년 장제스 탄생 100주년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귀국, 이후 타이베이에서 살다가 1991년 장기요양을 위하여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6년에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기도 했다. 중국 현대사를 얘기할 때는 으레 송가(宋家)의 쑹아이링(宋愛齡), 쑹칭링(宋慶齡), 쑹메이링(宋美齡) 3자매가 등장한다.

 

 둘째인 쑹칭링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통하는 쑨원(孫文)의 아내로 나중에 중국의 부주석 자리까지 올랐고, 첫째인 쑹아이링은 국민당 시절 돈줄을 거머쥔 재정부장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했다. 1997년 제작된 영화 '송가황조'에서는 3자매의 아버지인 쑹야오루(宋如耀)가 "나에게는 세 딸이 있다. 하나는 돈을 사랑했고, 또 하나는 권력을 사랑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나라를 사랑했다"고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제스가쑹에게 청혼했을 당시 형부인 쑨원은 물론이고 언니도 극구 반대했다. '인민혁명'이라는 쑨원의 뜻을 거역할 뿐만 아니라, 장제스는 아이가 셋이나 딸린 기혼남으로 나이가 너무 많은데다 출신마저 비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결혼을 감행했다. 쑹의 과단성은 단신으로 장제스를 구출한 시안(西安)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녀가 죽자 미국, 중국, 타이완 정부에서는 묘지 유치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쑹아이링(宋愛齡)과 오빠 쑹즈원(宋子文) 부부가 묻혀 있는 뉴욕주 펀클리프 묘지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자유중국을 이끌어간 장제스에게는 그녀의 내조가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이다.

 


 

(부드러운 색 계통의 부속 건물 국가희극원)

 

▲ 짧은 일정 속에 많은 것을 느끼게 한 타이완

 

 중정지녠탕을 나온 우리는 쇼핑을 위해 면세점 '승항창고빈 유한공사'로 갔다. 아직도 타이완은 관광에 대해서는 뒤져 있는 형편이지만 본국의 특산물이나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 제품도 제법 갖춰져 있었다. 우선 오름오름회 회원들을 위해 중국산 술을 파는 코너로 가서 고량주 한 병을 샀다. 작년 일본규슈 답사 때도 그랬지만 이번 타이완 답사기간에도 한라문화제의 일환으로 마련한 제4회 '오름오름 축제'를 진행하여야 함에도 계획만 세워 회장에게 일임하고 왔기 때문에 회원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더욱이 총무까지 동행했기 때문에 일부 회원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고량주는 본토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 제일 비싼 것(비싸 봤자 300원 짜리지만)으로 50% 복패(福牌) 특급 고량주 한 병을 구입하고 나왔다. 점심을 먹고 천천히 공항으로 가면서 타이완에 대해 정리해 본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다 못한 나라에 가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하지만 잘 사는 나라는 잘 사는 대로, 못사는 나라는 못 사는 대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배울 점이 많다. 특히 우리와 가까이 있는 나라들은 오랫동안 문화를 같이 했기 때문에 비유를 할 수 있어 좋은 공부거리다.

 

 타이완은 오랫동안 아시아의 대륙문화와 태평양의 해양문화가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타이완은 중국의 한(漢)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한 때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도 했으며, 서유럽의 영향을 깊게 받아왔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높은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타이페이시 중심부)타이완의 주요 도시들은 전통적인 중국식 건축물과 20세기초의 일본식 건축물 및 근대 서구식 건축물 등 어떤 형태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혼합 양식의 건축물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타이난이나 루캉곽 같은 타이완의 오래된 도시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건축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중국의 건축은 유럽의 고딕식 사원이나 일본의 정원양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건물의 기본구조가 전형적인 U자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1층 또는 2층의 건물로 처마가 매우 가파른 기와지붕의 중국 고대양식 건축물들이 지방에 산재되어 있다. 타이완에는 또 주로 청대(1644∼1911)에 건축된 사원의 양식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이 남아 있다. 한 때 '아시아의 4룡'으로 일컬어졌던 타이완의 경제는 제조업, 무역, 서비스업에 기초한 시장경제가 발달하였으며, 자철석, 황철석, 구리, 금 등이 소량으로 채굴되고 장석, 석회석, 활석, 백운석, 고령토 등이 다량으로 생산된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 등이 생산되기는 하나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료와 광물은 수입한다. 중공업은 1965년 수출가공지대로 건설된 가오슝(高雄)에 집중되어 있으며, 경공업은 타이베이와 그 주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전자장비, 의류 등이 수출을 주도하고 있으며 약품, 정밀기계, 전자기기 분야의 첨단산업도 발달하였다.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공존하는 타이페이 거리)

 

 타이완의 정치는 최고기관인 국민대회 및 총통 아래 입법원(국회), 행정원(내각), 사법원, 고시원, 감찰원의 5권 분립제를 택하고 있다. 국민당 1당 지배정치를 펴온 타이완 정부는 1949년이래 계속 실시된 계엄령을 1987년 7월에 해제하였으며, 1988년 1월 13일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사망한 후 부총통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1989년 1월에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고, 1991년에는 타이완 수비사령부을 해체하고 진먼섬계엄을 종식하는가 하면, 1992년 사상경찰제 폐지 및 타이완 경비사령부 폐지, 1993년 11월 최초의 지방선거 실시, 1994년 7월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던 총통직선제 개헌안 승인을 거쳐, 1996년 3월 총통 리덩후이가 최초의 직선총통이자 제9대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3월에는 야당인 민진당의 후보인 천수이볜(陳水扁)이 리덩후이를 꺾고 총통으로 선출되어 50년 이상 계속되어온 국민당 체제가 종식되었다.1971년 UN을 탈퇴하였고 29개국과 수교(2001년 통계)하고 있으며, 2001년11월에는 중국과 함께 WTO에 가입하였다. 병역제도는 징병제로 20세의 남자는 2년간 복무한다. 병력은 정규군 37만 6천명, 예비군 165만 7천명이다.

 

 타이완은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의 푸젠성(福建省)과 마주하고 있다. 섬의 면적은 한반도의 6분의 1 크기인 36,190㎢. 이렇게 작은 면적으로도 그 동안 수백 배 크기의 중국 본토와 대치하면서 잘 견뎌 왔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비행기가 뜨고, 구름에 막혀 타이완은 보이지 않게 돼버렸다. 우리 나라도 통일 문제가 골치지만 점점 비대해져 가는 중국에 맞서 타이완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걱정이 앞선다.

 


 

(오랜만에 보는 청천백일기 나부끼는 중정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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