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읍 거린악(巨人岳) 답사기
(큰뱀무)
□ 2003년 12월 7일 일요일 눈발 날리고 몹시 추움
▲ 글쎄, 전조(前兆)가 이상하드라니
오늘은 대설(大雪). 폭풍경보까지 내릴 정도로 바람이 세차고 추운 날씨에 눈발까지 날리는 절기(節氣)와 조금 어울리는 날이다. 그래도 출발 시간까지 모두 12명이 전사들이 모였다. 이런 날씨에는 한라산이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남원읍의 오름에 가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어, 우선 거린악을 목표로 남조로로 달렸다. 중간 집결지인 육성마 목장에 이르렀을 때, 길옆에 희끗희끗 눈이 쌓여있다. 이곳이 결빙지역이어서 자주 곤욕을 치르는 곳인데, 혹시 돌아올 때 눈이 와서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수망리에 이르렀을 때는 날씨가 포근해지고 하늘도 제법 열려 있었다. 한남리에서 한라산 쪽으로 올라가 거린악 입구에 다다랐는데 공사 때문에 길이 어수선하다. 워낙에 이 길은 공유지와 사유지가 번갈아 있어 기부체납이 안된 사유지는 포장이 안되었기 때문에 거친 부분이 많았었다. 평탄 작업을 한 곳으로 제법 갈만하여 한 밭 거리쯤 들어가고 보니, 포크레인이 막아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에 경운기가 들어오면서 길을 내달라고 야단이다.
마침 옆 목장 밭에 문이 잠겨 있질 않아 후진시켜 목장에 세우는데 다시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왕 세워 놓은 것 그냥 두고 가자고 했으나 민폐는 끼쳐서 안 되겠기에 설득해서 공사 시작하는 곳까지 돌아가 차를 세워 두고 오도록 설득했다. 덕분에 먼길을 걸어가야 했지만 어차피 걷자고 온 길이 아니던가? 서중천 계곡은 언제 보아도 좋다. 구실잣밤나무, 조록나무, 식나무 등의 상록수 아래로 정금나무가 곱게 물들어 있어 사진기를 들이대지 않고는 못 배긴다.
여름에 와서 새끼발가락 수술 때문에 산에 오르지 못하고 고슬기와 놀았던 냇가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 때는 모든 나무들이 물이 올라 짙은 녹음을 자랑했었는데 계절은 속이지 못하는지 잎이 져버려 뚜렷이 나타나진 않으나 어딘지 쓸쓸하다. 돌 홈통에 고인 물에 낙엽이 떨어져 포르르 떨고 있는 것이 보여 얼른 사진을 찍고 고개를 드니, 여기서도 산딸나무가 새싹을 피웠다가 미쳐 자라지 못해 빨갛게 물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메꽃)
▲ 선구자, 선구자여
남쪽 작은 봉우리로 올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기로 하고 앞장서 걸었다. 표고 493.2m, 비고 123m로 제법 큰 이 봉우리 남쪽 사면으로 삼나무가 커다랗게 자라고 있어 그 그늘로 오르면 쉽겠기에 그 방향으로만 숲을 헤치며 걸었다. 가끔 자금우 빨간 열매가 보이더니, 오름 자락은 백량금 군락이다. 삼나무 숲이 시작되는 곳의 커다란 나무들이 한꺼번에 10여 그루 넘어져 있어 다시 한 번 태풍 매미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민오름으로 뻗은 길이 옅은 안개 때문에 폭포로 보인다.
잠시 길을 멈추고 인원을 점검해 보니, 아홉 사람뿐이고 세 사람이 간 곳이 없다. "오름! 오름!" 하고 외쳐 보아도 공허하게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분명히 남쪽으로 돌아와도 보일 때가 되었는데 이상하다. 요즘 오름에 제법 다닌 회원들이 길을 조금 안다고 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수가 있는데, 먼저 갔나 싶어 그대로 오른다. 남쪽 기슭이고 나무 아래여서 산수국이 아직도 노랗게 잎을 물들인 채 그대로 있다. 정상에 올라 다시 "오름! 오름!"을 외치는데, 북쪽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만나서 확인해보니, 자주 다니는 가파른 길로 올라왔다 한다. 뭐라고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 앞장서서 무리를 이끄는 사람의 고충을 알만하다. '다른 사람에 앞서서 어떤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 일을 실행한 사람'을 선구자라 하는데, 어렵고 힘든 일이다. 길이 험하다고 아무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앞장선 사람은 너무 외롭고 힘들 것이다. 앞으로는 길이 좋든 안 좋든 간에 앞장서기로 한 사람이 가는 길을 꼭 따라 가도록 해야겠다. 정 이상해 보이면 모여 의논한 후 진로를 수정하는 일이 있드라도.
이름이 '나뉘다'의 뜻을 가진 제주어 '거리다'에서 '거린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지만, 사실은 나뉘어진 것이 아니고 두 화산체가 다른 방향으로 등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두 오름이 이어진 삼나무 아래에는 나도은조롱 군락이 있어 짙은 초록색 잎에 눈을 곱게 이고 있다. 그곳을 지나 표고 532.7m, 비고 153m의 북쪽 봉우리로 올라갔다. 능선에 이르러 서쪽 봉우리에 가보자고 그 쪽으로 향한다. 수령이 100년은 훨씬 넘어섰을 구실잣밤나무가 간간이 보이고, 가끔씩 커다란 기암괴석이 나앉았다.
(땅나리)
▲ 감(感)으로만은 안 된다
북서쪽 정상이 너무 추워 바람 의지가 되는 남쪽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가지고 온 요깃거리를 꺼내 입가심을 하고 떠났다. 11시 30분. 이번에는 능선을 걸어 북동쪽 봉우리까지 가다 동남쪽으로 하산하기 시작하였다. 버섯 무리도 보이고 이끼 무리도 보이고 거미줄에 눈을 소복이 인 꽝꽝나무도 있다. 늦게 돋아난 잎이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에 이르러 하산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사진을 찍느라 제일 뒤에서 따라갔다. 콩짜개덩굴이 붙어 비늘이 돋은 철갑산 같은 것도 찍고, 빨간 열매가 달린 자금우와 이끼 위에 곱게 내려앉은 눈을 찍으며 따라갔더니, 마구 파헤쳐 놓은 길이 나타났다.
이제 와서 판단하건데, 여기서 아무 의심 없이 길을 따라 간 것이 잘못이었다. 오른쪽 오름에서 나왔으니까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나가다 보면 얼마 없어 우리가 오름으로 진입했던 길목이 나올 걸로 생각했다. 질퍽거리는 길을 걷기도 하고, 그게 싫어 숲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면서 겨우 파헤쳐진 길에서 벗어났을 때, 거기 세워진 공사 안내 간판에는 한남리 수림(樹林) 개발을 위한 임도(林道) 공사라고 표기되었다. 아직도 한남리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데 안도하면서 계속 같은 방향으로 진행했다.
아무튼 거린 오름은 좀 독특한 오름이다. 두 오름이 등을 맞대고 다른 방향으로 돌아앉은 것도 그렇고, 여느 산 못지 않은 깊은 계곡을 거느린 것하며, 나무가 울창하여 사방을 분간 못한다는 것 때문에 우리 오름 모임에서도 세 번이나 와서야 완전 등반에 성공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주위를 분간할 수 없어 길을 잃을 경우에는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숲 속으로 들어서면서도 이 오름은 좀 어려워 주의를 요한다는 얘기까지 했는데, 냇가를 벗어나 결국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잡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왕 방향을 정하였으니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는 일. 내려가는 길이니까 계속 진행하면 어느 길이든 나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냥 밀고 나갔다. 실수를 하려고 그랬는지 해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감(感)으로 남서쪽 방향이다 싶은 곳으로 간다는 생각으로 외길을 고집스레 밀고 나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 조금 이상하다 싶을 적에 보고 진로를 수정해야 하는데, 그것도 모른 채 기회를 잃고 만 것이다.
(금불초)
▲ 내 인생길 같은 생각이 들어
사실 처음에는 외길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계속 이어지는 길은 새로 만든 길이 아니고 제법 오래 된 길로 구비마다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 웬만한 차가 오갈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오르막도 없이 한적한 숲길이어서 걷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아니, 여유만 있다면 하루종일이라도 걸으며 즐길 수 있는 길이다. 다만 흠이 있다면 끝을 모르는 것이 초조하고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믿음을 줄 수 없는 게 불만이었다.
나는 갈래 길이 나오면 변 총무에게 내가 가는 방향을 일러주고 한 시라도 빨리 끝을 보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어쩌면 내 인생길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군대에 다녀오고 복학했다 졸업할 무렵에는 다른 길이 없어 운명처럼 교사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 생각에는 이 길을 가다가 내가 원하는 길이 나타나면 미련 없이 가던 길을 버리고 원하는 길을 가려 했는데, 결국은 다른 길이 나타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지금도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붉은사철란)
마침 길가에 승합차 두 대가 서 있어 사람이 있는가 싶어 달려가 보았더니, 사람이 없어 어딘지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차가 올 수 있었던 걸로 보아 얼마 안 가 큰 길이 나타날 것으로 믿고 힘을 내어 더 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제주도의 모든 숲길이 그렇지만 어딘지 눈에 익어갔고 내리막길은 점점 좋아진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차를 탔던 사람들은 마은이오름에 간 걸로 밝혀졌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차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보고 전화를 해서 알아낸 것이다. 나는 붉은 오름 입구 아저씨가 지키는 산불감시 초소에 와서야 드디어 남조로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초소에 들어가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쉬면서 기다리라는 걸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담배를 하나 얻어 핀 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우선 휴대전화가 통하는 남조로에 나가 김녕에서 동물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후배가 혹시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어 빨리 와달라고 부탁한 후, 안심시키기 위해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마중 나갔다. 상당한 거리까지 갔을 때 일행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이미 전화로 위치를 확인한 뒤여서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남조로에 도착한 시간이 3시 20분. 곧 후배의 차가 와서 차를 가지러 한남리로 갔지만 미등을 켜 놓았기 때문에 시동이 안 걸리는 차가 있어 그 뒤로도 추위에 떨며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누구의 표현을 빌리지 않드라도 오름 등반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사건이었다. 일부러 그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리더로서 부끄럽게 생각한다. 길이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을 때 모두 모여 지혜를 짜냈어야 했는데…. 감만 믿고 결행한 일이 이처럼 후회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결국 고생 끝에 얻은 교훈은 '아는 길도 물어 가라'였다. 이 기회를 빌어 나를 믿고 불평 한 마디 없이 따라준 회원들에게 고마운 말을 전한다. 그리고, 부탁 한 마디에 불원천리 김녕에서 급하게 달려 와준 동생 재호에게도….
(하늘타리)
'오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사랑하는 오름 (0) | 2004.01.20 |
---|---|
제주인의 삶과 오름 (0) | 2004.01.20 |
'오름 이야기'의 시작 (0) | 2004.01.20 |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0) | 2004.01.20 |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 (0) | 2004.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