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오름

김창집 2004. 1. 20. 16:32

 

▲ 구좌읍 돝오름

 

 누가 저 오름을 '돝오름'이라 이름했을까? 통통하게 살오른 돼지가 연상되는 돝오름 등성마루엔 지금 계절의 변화가 일고 있다. 온 산을 수놓았던 개민들레와 개망초가 서서히 시들면서 바야흐로 섬잔대와 쥐손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정상에 서면 눈앞에 질펀하게 펼쳐지는 푸른 숲은 비자림이다. 비자림을 건너온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들면 적당한 거리에 앉아 있는 다랑쉬오름이 정답다. 오름은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는 맛도 있지만 멀리서 조망하는 즐거움도 그만이다. 이 넓은 섬에 오름이 없이 한라산만 덩그마니 있었으면 얼마나 쓸쓸했으랴?

 

 대천동사거리에서 송당쪽으로 가면 중산간도로인 16번 도로와 만난다. 그 길로 송당초등학교를 넘어서서 수산리쪽으로 진행하다가 왼쪽 비자림으로 가는 포장도로에 들어서면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돝오름을 만날 수 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가 목장 철문을 지나면 삼나무 숲으로 비스듬히 정상으로 통하는 길이 보인다. 
 
 몇 년 전 늦가을엔 보랏빛 꽃향유가 온 산을 덮었더니, 지난주에 올랐을 때는 드문드문 돌가시나무, 솔나물, 타래난초가 오름을 수놓고 있었다. 정상 아래쪽으로 등성이를 따라 돌며 정원수처럼 자리잡은 소나무를 감상하다 망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도 보고, 풀밭을 뒤져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들꽃들을 찾는 기쁨을 만끽한다. 들꽃! 아무 돌보는 이 없어도 때를 알고 스스로 피어나는 생명의 외경(畏敬)이여!  2003-07-12

 

 

▲ 애월읍 이달봉 

 

 나그네 선생님은 이 오름을 '대지에서 솟아오른 아름다운 젖가슴'이라 했다. 아무 두려움 없이 부풀대로 부풀어오른 열아홉 살 숫처녀의 젖무덤. 감성이 메말라지기 쉬운 계절, 이달봉에 올라 가슴을 터놓고 얘기라도 나눈다면….

 

 가슴으로 산다. /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산다. / 가슴을 부비며 산다. / 가슴을 애태우며 산다. / 가슴을 활짝 열어놓고 산다. / 때로는 가슴을 열어 놓기 위해 사랑을 한다. / (중략) / 요즘처럼 가슴이 잘 안 열릴 때도 없나 보다. / 가슴이 잘 열리지 않을 때는 술을 마신다. / 죽음보다 더 독한 술을 / 병든 사람이 약수터에 가서 물을 마시듯이 (배인환의 '가슴'에서)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서부관광도로로 가다가 '들불 축제장'인 새별오름 앞쪽으로 들어가면 얼마 안가 나인브릿지 골프장 입구가 나온다. 이 때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이달봉인데 내려가면 바로 오름 옆구리에 이른다. 거기서 바로 쳐 오르는 수도 있지만 제대로 오르려면, 오름 못 미쳐 오른쪽 새별오름 공동묘지로 가는 길로 들어가 차를 세우고 흙길을 걸어 버려진 중장비 있는 곳 옆 철조망을 열고 통과한 뒤 왼쪽 능선길을 따라 오른다.

 

 해발 488.7m의 이달봉엔 소나무가 자라고, 곳곳에 타래난초와 범부채가 자태를 뽐낸다. 서쪽 능선으로 내려가다 오른쪽 456m 이달이촛대봉 쪽으로 비스듬히 하산하여, 풀밭으로 돼 있는 촛대봉을 오르며 기묘한 화산암의 경치도 감상하고, 정상 무덤에 이르걸랑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얘기를 나누어 보자. 2003-08-01

 

 

▲ 한림읍 비양봉(飛揚峰)

 

 섬인가 하면 오름이고, 오름인가 하면 섬이고. 협재해수욕장 앞 바다에 둥둥 떠있는 오름. 불과 천년 전인 고려시대에 4개의 불기둥이 5일 동안 솟아오르며 만들어낸 비양봉은 지금 언제 그랬냐는 듯 의연하다.

 

 비양도 앞 바다는 너무도 아름답다. / 칠색(七色)의 띠를 두르고 있다. 하늘로 솟구치다 / 주저앉은 비양도가 이젠 할 수 없이 / 바다에 펼치는 화려한 꿈이다. / 그리하여 지금은 하늘의 천사(天使)들이 / 오히려 이쪽을 그리워하고 있다. --- 박희진(朴喜璡)의 '비양도 앞 바다' 전문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비양도에 가보자. 제주시에서 한림항까지 약 40분. 거기에 가면 아침 9시와 오후 3시에 비양도를 오가는 도항선이 뜬다. 소요 시간이 15분이면 아무리 뱃멀미를 하는 사람도 거뜬하다. 가족끼리, 또는 연인끼리, 친목끼리 나들이 계획을 세우고 아침에 건너가서 오후에 온다.

 

 먼저 마을 쪽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 해발 114.1m의 비양봉을 오른다. 오른쪽으로 천천히 등대까지 가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라산 아래로 펼쳐진 본섬을 살피다 지치면, 사방에 펼쳐진 바다를 즐긴다. 조심조심 분화구 주위를 보고 내려와, 해안을 두른 도로를 걸어서 한 바퀴 돈다.

 

 찾아볼 것 - 비양도 특산 비양나무, 황근(黃槿), 애기 업은 돌, 해녀 콩,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화산탄…. 점심을 먹고 배를 빌려 낚시를 하는 것도좋다. 왜? 섬을 떠나야 섬이 보이므로. 2003-08-22  

 

 

▲ 구좌읍 다랑쉬오름

 

 잘 생긴 것도 죄이런가? 무자년 난리에 마을이 송두리째 타버리는 것을 보고도, 아니 다랑쉬굴에 숨어든 무고한 양민이 시커먼 연기에 질식해 죽는 것을 켜보고도 묵비권을 행사한 죄이런가? 시정잡배들의 발길질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오름.   날아 올라라 / 날아 올라라 // 가장 아름다우나 / 가장 슬픈 오름 / 그 슬픔 응어리져 / 가시와 억새풀의 / 억센 바람 // 하늘 끌어안은 / 깊고 높은 웅덩이 / 오십 년을 내내 / 굴속에 갇혔다가 / 어둠에 묻혔다가 // 불꽃으로 날아라 / 별떨기로 날아라 -- 배경숙 '다랑쉬'

 

 내일 모레가 추석인데,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명절인데, 이 슬픈 사연을 털어놓아야 하나? 하늘로 비상하고 싶은 이들, 오늘도 커다란 짐을 지고 허위허위 기어오른다. 그 옛날 고성에 살던 효자 홍달한(洪達漢)이 숙종 임금의 승하를 애도하며 3년 동안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올라 망곡(望哭)한 끝에 충효의 자리에 올랐듯이.

 

 다랑쉬오름 가는 길은 사방으로 뚫려 있다. 송당리 사거리에서 16번도로를 따라 성산쪽으로 가다가 용눈이오름 앞 세거리에서 왼쪽 종달리로 가는 길 들어서자마자 왼쪽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가면 다랑쉬마을 터가 나오고 다랑쉬와 아끈다랑쉬 사이에 이르게 된다. 비자림에서 갈 때는 입구에서 오름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간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다랑쉬오름에 올라 골 깊은 상처를 어떻게 치료했으면 좋을지 생각해보자.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떠오르는 달을 우러르자. 2003-09-05

 

 

▲ 구좌읍 용눈이오름 

 

 오름을 에두른 곡선이 너무도 부드러워 풀을 뜯는 소도 비켜 가는 설문대할망의 걸작품. 소의 입술이 지나간 자국마다 보랏빛 꽃향유가 비명을 지르며 수줍게 피었더이다. 아무도 거부하지 않은 가을의 나부(裸婦).

 

 사실 말이 났으니 하는 얘기지만, 오름을 아는 사람 치고 용눈이오름 한 번 안 올라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을이 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주말, 푸른 하늘 아래 옷을 벗고 오롯이 누워 있는 용눈이오름을 찾는 사람은 그 곡선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다시 한 번 탄성을 발할 것이다.

 

 우선 동부산업도로 대천동 사거리에서 송당으로 가거나, 봉개에서 16번 도로를 타고 송당으로 진입한다. 마을을 지나 동남쪽 성산읍 수산리로 통하는 16번도로를 타고 3㎞ 정도 가다보면, 왼쪽으로는 구좌읍 종달리로 통하는 길이 나오고, 그 사이에 용눈이오름이 자리해 양쪽으로 오르는 길이 마련되어 있다.

 

 지금 그 오름에는 새끼를 밴 암소들이 있어 놀라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조심해서 올라야 한다. 가급적이면 가족이나 연인끼리 가서 물매화, 미역취, 꽃향유, 섬잔대, 자주쓴풀, 쇠서나물 등을 찾아 꽃과 이름을 확인해보기도 하고, 오름이 빚어내는 유려한 곡선을 감상하며 마지막 남은 가을의 정취를 즐겨보자.  2003-11-07

 

 

▲ 조천읍 서우봉

 

 바람이 솔잎을 스치는 청아(淸雅)한 소리…. 몇 해 전이던가. 12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오름 모임에서 서우봉으로 납회(納會)를 간 적이 있었다. 같이 걷던 김순이 시인이 솔바람 소리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오름 옆구리에 와 닿는 파도 소리까지….

 

“외로울 때마다/바다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나는 바닷가 태생/구름에서 일어나 거슬러 부는/바람에 쥐어 박히며 자랐으니/어디에서고 따라붙는 소금기/비늘 되어 살속 깊이 박혔다/떨치고 어디론가 떠나보아도/되돌아오는 윤회의 파도가/내 피 속에 흘러/원인 모를 병으로 몸이 저릴 때마다/찾아가 몸을 담그는 나의 바다/깊은 허망(虛妄)에 이미 닿아/더이상 잃을 것도 없는/몸이 되었을 때/나는 바다로 가리라/소리 쳐 울리라/제주바다는/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김순이의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에서.

 

 주민들이 보통 서모봉이라 부르는 서우봉 가는 길은 아주 쉽다. 일주도로를 따라 함덕해수욕장에 가서 동쪽 끝을 보면 오르는 길까지 보인다. 모래에 빠지고 길이 가팔라 차로 가기는 힘들고, 공터에 세우고 올라가면서 바다도 보고 섬도 보고, 해수욕장 너머 펼쳐진 마을 풍경과 한라산까지 볼 수 있다.

 

 해발 113.3m의 오름에 오르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나는데, 오른쪽은 소나무 숲 산책길이고 왼쪽은 바다를 보며 놀 수 있는 풀밭이다. 진입로가 좀 어질러져 있으나 지금 한창 보리수열매가 익었고, 눈 아래 펼쳐진 달여도가 그림처럼 곱다.  2003-12-12

 

 

▲ 제주시 사라봉 

 

 올 한 해도 다 저물어간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시간을 내 저녁 무렵의 사라봉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 해를 정리해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산책로를 따라 망양정(望洋亭)에 오르면 눈높이로 다가서는 한라산의 은근한 미소. 동쪽 능선으로 오름들이 빚어내는 곡선은 멀리 지미봉에 가서야 바다와 만난다. 수평선에 걸린 추자군도의 섬들과 큰관탈, 작은관탈섬을 일별하고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바다!

 

 해가 점점 수평선에 가까워지며 이글이글 타오를 때는 영주십경의 제2경 사봉낙조(紗峰落照)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빼더라도 가슴의 울렁거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때맞춰 제주항을 떠나는 여객선이 “부웅~”하고 뱃고동이라도 울리면 가슴이 터질지도 모른다.

 

 해가 수평선에 사라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산지 등대가 천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시내에는 전등이 하나둘 켜진다. 침묵 속에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야경이 휘황해지걸랑 이방인이 되어 명멸하는 전등 속에 나를 기다려 켜놓은 불빛도 있을까 생각해보고, 혹 초생달이라도 보이면 다가오는 해의 소망을 빌자.

 

 가까운 거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차를 버리고 걸어서, 좀 먼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버스를 타고 갔다가, 생각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불러내어 추억을 들춰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동문시장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 나눠 마셔도 좋으리라.  2003-12-26

 

▶ 모임에서 돌아와 컴을 열면서 생각하니, 칼럼이 세 돌이 되는 날이네요. 그 동안 제주일보에 실었던 오름 소개 글 일곱 개를 두서없이 뽑았습니다. 3년 동안 제 글을 읽어 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아래 사진은 사라봉의 낙조와 제주시가지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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