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안개 속의 그 뻐꾸기[2004. 5. 30.]

김창집 2004. 5. 3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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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내리는 소록산, 대록산

 

▲ 특별한 제주 자연 사랑, 서재철 씨

 

 비가 내려도 너무 내린다. 아무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지만 그렇게 정신 못 차리게 올 때는 우선 피하고 봐야 한다는 생각에 갤러리 '자연사랑'을 떠올렸다. 이곳 소록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표선면 가시리 마을 안 옛 가시초등학교를 빌려 아담하게 꾸며놓은 전시장에 가면 오름을 비롯한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이 다 있지 않은가?

 

 서재철 씨는 제주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은 다 아는 사진기자 출신 작가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오름 모임에서 같이 오름에 올랐다. 1966년 한라산 등반 길에 피어 있는 영산홍이 너무나 아름다워 카메라를 빌려 처음 찍은 것이 사진의 매력에 흠뻑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1972년 제주일보 사진 기자로 입사하면서부터 그야말로 발로 뛰는 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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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철의 작품 중에서 '말과 오름'

 

 그는 제주도를 너무 사랑한다. 한라산의 노루 식구가 불어나면서 한동안 노루를 쫓아다니느라 '숫노루'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후 한라산과 오름을 뛰어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정리 '제주도 야생화', '제주도 버섯', '제주도 새'라는 사진 설명집을 발간한데 이어 지난 28일에는 '제주도 곤충', '제주도 말, 노루'를 냄으로써 5권의 책이 시리즈가 되었다.  
 
 '제주의 자연은 어디든 찍으면 그대로 하나의 사진 엽서가 된다.'는 지론을 펼 정도로 고향 제주에 대해 자긍심이 대단하다. 8년 전 신제주에 '자연사랑(自然寫廊)' 갤러리를 내더니, 올해에는 풍광이 수려한 이곳 가시초등학교를 빌려 아기자기하게 두 번째 사랑을 꾸며 놓았다. 그의 부지런은 한국기자상, 서울언론인상, 송하언론상, 현대사진문화상, 대한사진문화상을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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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철의 작품 중에서 '비양도에서 찍은 한라산'

 

▲ 예술혼 속에 빛나는 작품들

 

 옛 초등학교 정문 조금 못 미쳐 한창 피어오르는 마삭줄로 뒤덮인 울타리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상록식물이지만 2년생 잎은 지금 떨어질 시기에 이르러 새빨갛게 변했다. 한 달 전에는 퇴근길 냇가에서 빨간 것이 보여 무슨 꽃인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가섰는데, 이 마삭줄 잎이었다. 운동장 구석에서 나한송 꽃을 처음 접했다.

 현관 앞에 기증 받은 돌하르방이 마침 노랗게 핀 돌나물꽃과 잘 어울린 채로 서 있고 학교 종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한 번 울려보고 싶은 심정을 누르면서 들어가니 사모님(?)이 반겨 맞는다. 우리 모임에서 오름엘 같이 다녔었는데 요즘은 이런 저런 일로 못 나오는 바람에 오랜만에 만난 회원들과 정 나누기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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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철의 작품 중에서 '차귀도와 안개, 포구'

 

 입구에는 액자에 담아 파는 3만원 정도의 소품 사진과 엽서, 여러 가지 제주도나 사진 관련 책들을 진열해 놓고 팔고 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김영갑 씨가 삼달분교를 빌어 낸 갤러리와 비슷한 형태다. 양쪽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는 '따라비'라고 명명하여 주로 오름 풍광으로 꾸미고, 다른 쪽은 '바람자리'라 하여 자연 풍광 사진을 전시했다.     


 사진 앞에서 너무 좋아하는 회원들을 보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날씨, 구름,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현상을 보며, 사진에 나온 오름과 들꽃 이름을 맞춰보기도 하면서 비가 개기를 기다렸다. 우리들은 이렇게 편하게 감상하는데, 작가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이 돌아다녔을까? 그리고 이른 새벽 저 풍경을 찍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추워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을 찍고 났을 때 작가의 느꼈던 희열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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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속 소나무 위에 앉아 우는 뻐꾸기

 

▲ 모구리오름 입구에서 만난 뻐꾸기

 

 11시가 지나면서 비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이른 점심을 먹어두기로 하고 전시장을 떠나 성읍민속마을로 달린다. 부싯돌 식당에서 돼지고기 불고기(?)에다 좁쌀막걸리로 회포를 풀며 날씨가 개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비는 시원하게 걷히질 않아 할 수 없이 가까운 곳, 야영장으로 만들어 정상까지 길이 나 있는 모구리오름엘 가기로 했다.

 

 맨 앞에 서서 안개 자욱한 오름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살피니 안개 속 소나무 꼭대기에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몸집이 꽤 큰 편으로 소리를 낼 때마다 꼬리가 위로 솟구친다. 일행들에게 알려 사진을 찍게 했는데, 눈치를 챘는지 안개 속으로 날아가 버린다. 좀더 자세히 못 본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오랜만에 흡족한 비를 맞는 청미래덩굴이 호기롭게 자란다. 하늘을 향

해 활개를 펴고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꼭 용트림하는 것 같다. 올해 처음으로 타래란도 만나고, 꿀풀꽃, 노루발풀꽃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비가 멈추면서 흥겨워진 일행은 다음에 오를 오름을 고르고 있었다. 구석진 밭에서는 늦은 장마에 솟아오른 고사리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고개를 쳐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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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촉히 젖어 있는 꿀풀꽃

 

▲ 부드러운 안개 속의 용눈이오름

 

 안개도 걷히질 않고 땅이 질어 결국 돌아가는 길에 용눈이오름에 오르기로 했다. 금년 2월 늦은 눈이 하얗게 쌓였을 때의 감동이 푸른 풀밭으로 바뀌었으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용눈이오름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어느 해인가 가을에는 온통 꽃향유로 덮여 자줏빛으로 빛나는 오름이더니, 올 2월에는 그렇게 눈으로 하얗게 변했지 않았는가?

 

 초록색 카펫이 깔린 오름의 곡선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외국에서 날아온 개민들레가 미운 털처럼 박히지만 않았으면 누어 빙글빙글 딩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분위기에 취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 우리는 우리끼리 모여 안개로 사방을 두른 채로 우리의 세상을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다. 안개 저 편 속세의 모든 인연에서 잠시 벗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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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속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는 없는 것
시간이 지나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류시화 '안개 속에 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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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속의 용눈이오름, 그리고 개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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