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욱 푸르러가는 한라산의 수목
▲ 빛을 발하는 제1횡단도로 숲 터널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이 지난 지 이틀째. 원래 예정되었던 서검은이오름은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한라산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19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이 참가했다는 점 이외에 유난히 맑은 날씨도 한 몫 했다. 나는 어제 11명의 작가들과 그 오름엘 다녀온 터라 변화가 있어 좋았다.
도심을 벗어나면서부터 온통 초록 세상이었다. 게다가 지금 가는 곳이 논고악(論古岳)이고 보면 벌써 신록(新綠)이 머릿속에 가득 차 오른다. 한라산을 관통하는 첫 도로인 제1횡단도로 최고점으로 남북을 가르는 성판악 휴게소를 넘어서 서귀포로 가는 길 오른쪽에 해발 843m, 비고 143m로 아담하게 솟은 논고악은 길에서는 도저히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숲이 우거졌다.
어느 해인가 5월 초순, 신탐라순력도를 그리고 있는 강 화백(畵伯)을 대동하고 이 오름을 오른 적이 있었는데, 신록이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이양하 선생의 '신록예찬(新綠禮讚)'을 여러 차례 암송하며 걸은 적이 있었다. 정상에서 분화구로 내려가려 할 때, 허가 없이 구역을 침범한 우리에게 주인인 노루가 내지르는 항의조의 울부짖음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내려올 때까지도 계속되었으리라.
* 숲터널 말고, 다시 얽혀져 가는 논고악 숲길
△ 이양하 선생의 '신록 예찬' 앞부분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萬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 미끈하게 신록을 두른 성판악
▲ 동전의 앞뒷면 같은 개발과 보존의 논리
첫 집합 장소인 성판악 입구를 지나 차를 세운다. 오늘은 5월 넷째 일요일-- 마침 한라산 철쭉제를 지내는 날이어서 차가 주차장을 가득 메우다 부족하여 양쪽 길가에 길게 늘어섰다. 이 달 들어 주말마다 비가 왔는데 처음으로 맞는 화창한 일요일이라 더욱 많이 몰려 든 것 같다. 9시가 다 된 시간인데 아직도 올라가지 않고 서성대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출발을 알리고 서귀포 쪽으로 내려가다 동수교 입구를 지나는데 3∼40명은 족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숲의 터널을 이룬 곳이다. 개설된 지 오래된 이 길은 도로 폭이 차 2대가 서로 교차해 지날 정도밖에 되지 않고 달리 인도(人道)가 없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다. 또 길이 지대보다 높아 옆으로 비켜설 곳도 마땅치 않아 교통사고 우려가 많다.
지금 이 길에 포함되는 서귀포 중산간 부분은 주민의 요구라며 환경 단체의 반대도 무릅쓰고 확장해 놓았다. 공사를 해놓은 곳을 보면 산을 함부로 절개하고 길가의 나무도 많이 베어버렸다. 이곳도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센데 그럴 경우 이 보물과 같은 숲 터널은 없어지고 만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길을 그냥 두려니 좁아서 불편하고, 넓히려니 아름다운 자연이 훼손되고…. 개발과 보전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 준다.
* 찬연하게 빛나는 바위수국 꽃
▲ 숲 속 저 빛나는 바위수국 꽃
차를 세우고 숲으로 들어간다. 제주 특산 초피나무인 속칭 죄피 향기가 가득하고 새로 돋아나는 나뭇잎이 싱그럽다. 이곳엔 삼나무도 없고 자연림인 때죽나무, 산딸나무, 서어나무, 참나무, 산벚나무, 팥배나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위에는 꽃이 막 시들기 시작한 넓은 잎의 천남성과 곰취가 부는 바람에 나부끼고, 태풍에 넘어진 나무들에는 버섯이 나기 시작했다. 홀아비꽃대와 제주 특산인 옥녀꽃대의 논쟁을 불식시키며 그 옆을 지나다 나리난초를 발견한다. 이 꽃은 색이 검고 옅은 흙빛으로 특이한 모습이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나무 사이로 보이는 성판악의 웅자(雄姿)! 새 잎으로 단장한 미끈한 산의 모습은 보는 이마다 감탄이다. 정말 침엽수가 안 섞이고 같은 초록으로 뒤덮인 것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소의 잔등 같다. 그 위로 사라악이 보이고 두 오름의 틈새로는 흙붉은오름과 돌오름이 다정하게 자리 잡았다. 키가 비교적 작은 나무들이 있는 능선에서 골무꽃을 발견해 사진 찍기에 바쁘다.
나무에 기대어 한라산 정상까지 실컷 훑고 나서 분화구로 내려간다.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여기저기 바위수국 꽃이 보인다. 햇빛을 한껏 쪼이기 위해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무더기무더기 피어 반공(半空)에 머무른 채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저걸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다 태풍 매미로 쓰러진 산딸나무에 매달린 꽃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찍었는데 밝기 조정이 안돼 저렇게 빛을 반사해 버렸다.
* 점점 푸르러가는 한라산과 구름
△ 이어지는 '신록예찬'의 중심 부분
그러나 이러한 때―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는 이 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授受)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라도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란― 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 칠정(汚辱七情)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에 영일(寧日)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卑小)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汚點) 또는 한 잡음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서,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씨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 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의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에도 신록이다. 주객 일체, 물심일여(物心一如)라 할까, 현요하다 할까, 무념무상, 무장무애(無障無碍), 이러한 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스럽고, 또 이러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도 없고, 심정의 고갈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의 유열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汚辱)과 모든 우울(憂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상극(相剋)과 갈등(葛藤)을 극복하고 고양(高揚)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 논고악 능선 위로 떠오르는 구름
▲ 외계(外界)의 이색 정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늦은 가을이었는데, 완전히 충격 그 자체였다. 내 나름대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다큐맨터리도 제법 보아 그 부분에서는 별다른 세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름이 형성된 뒤 오랫동안 산정호수였다가 늪지를 거친 흔적으로 비올 때 물이 고이는 곳이 남아 있는 것이라든지, 일부 나무가 물에 잠겨 동화작용이 안되었음인지 뿌리에서 기둥 같은 줄기가 솟아 괴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느낌을 '외계의 이색 정원'이라는 제목으로 산행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나사처럼 생긴 나무가 하나밖에 안 남아 있는데, 그 때는 주위에 그런 나무가 4∼5개 목격되기도 하였다. 간간이 딱다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린다. 색다른 것도 자주 보면 평범해진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서쪽 능선 너머로 색다른 구름이 일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쥐 모양의 조금만 것이었는데 점차로 소처럼 커졌다가 호랑이처럼 사나워진다.
두 사진 작가가 그 구름에 심취되어 아예 삼발이를 세우기 시작한다. 먼저 내려간 회원들을 생각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내려 오라 이르고는 내려오다 바위틈에 숨어 있는 홍로도라지를 발견했다. 지금 걷는 곳이 한라산 국립공원 안이고 보면, 그런 대로 더러 특산식물이 남아 있는 편이다. 푸른 신록 사이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 아직은 녹음(綠陰)이 짙어지지 않기에 이런 꽃들이 피어나는 것이리라.
* 독특한 색조의 나도난초 꽃
△ 빛나는 '신록 예찬' 마지막 부분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이 없다.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고 새 움과 어린잎이 돋아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한다면, 삼복 염천(三伏炎天)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淡綠)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혹 2, 3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 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서지 아니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 또는 낙엽송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 하면, 이즈음의 도토리, 버들, 또는 임간(林間)에 있는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신한 자색(姿色), 그의 보드라운 감촉, 그리고 그의 그윽하고 아담한 향훈(香薰), 참으로 놀랄 만한 자연의 극치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를 드릴 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 숲 사이로 피어오르는 구름
▲ 언제나 변함없는 맛, 공천포 자리물회
차를 세워둔 길가에 나왔을 때까지도 5월 하늘의 구름 쇼는 계속 되고 있었다. 길 때문에 모처럼 열려 있는 나무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독특한 모양의 구름은 나뭇가지와 어울려 기묘한 색의 대조를 보인다. 한참 동안 공중에다 대고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낌새를 알아차린 회원들이 합세한다. 5월의 하늘을 바탕으로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구름이 모습은 신록을 배경으로 했기에 더욱 빛난다.
잠시 아래로 눈을 돌리니, 구름처럼 피어난 한 무더기 노란 꽃 무리--. 분명히 씀바귀였다. 만세력에는 24절기의 하나인,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 태양의 환경이 대략 60°에 있을 때인 소만(小滿)에 씀바귀가 고개를 내민다고 되어 있는데, 이곳엔 이렇게 앞서 눈부시게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이걸 보면 24절기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어떻든 점심 때 무얼 먹느냐가 관건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기사들 미안해서 20여km 떨어진 공천포까지 가느냐? 제주시로 넘어가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회원들이 뜻을 굽히지 않아 시원한 자리물회를 위해 공천포로 향했다. 공천포 앞 바다도 그림처럼 고운 5월 바다 본연의 모습이다. 새로 지은 식당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때문에 자리물회나 한치물회 역시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죄피 향기가 진동한다. [2004. 5. 23.]
* 너무 빨리 피어난 길섶의 씀바귀 무리
♬ 들꽃 / 조용필 * 제공 :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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