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을 보고 나서 (4)
▲ 원삼국시대 논란
우리가 배울 때는 원삼국시대란 말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자연스레 불리는 시대가 돼버렸다. 고구려가 BC 37년, 백제가 BC 18년, 신라가 BC 57년에 나라를 세웠지만 완전한 국가 체재를 이루기는 300년경에 들어서였다는 것이고, 문화도 확연히 구분된다는 데서 출발했다. 연합 뉴스에는 새 용산 국립박물관에 '원삼국실'을 따로 둔 것에 대한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원삼국'이라는 시대 설정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 전 김정배 고려대 교수를 비롯한 일부 연구자에 의해 간헐적으로 제기됐으며, 최근에는 서울대 최몽룡 교수가 비판의 선봉에 서고 있다. 최 교수는 "원삼국시대를 삼한시대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절대 연대로 환산하면 기원 전후에서 서기 300년 무렵까지라는데, 논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는 고고학에서 말하는 원삼국시대론이라든가, 서력기원 전후부터 서기 300년 무렵까지 백제와 신라의 초기 역사를 인정하지 않은 문헌 사학계를 겨냥해 "후기 식민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맹비판을 했다.
신라와 백제는 엄연히 기원전 1세기에 건국했음에도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두 왕조의 실질적 건국시기를 4세기 이후로 보는 일본 식민사학을 답습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결국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해 4세기 이전 신라와 백제의 존재를 말살하려 한 식민사학과 상통한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의 말처럼 일제 식민사학은 고구려는 다소 예외이지만, 백제와 신라가 실질적으로 건국한 시기를 서기 350년 무렵으로 보았다. 백제 근초고왕이 즉위하던 무렵이 실질적인 백제사의 시작이며, 이는 아울러 신라사의 시작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식민사학은 심지어 신라의 건국시기를 백제보다 더 끌어내리기도 했다. 이에 반발해 해방 이후 한국사학계는 백제의 경우 1세기 가량을 앞당긴 3세기 중후반 무렵 고이왕 시대를 실질적인 건국으로 간주했으며, 신라는 내물왕으로 정착을 시켰다. 이렇게 되고 보면 한반도 고대사, 특히 백제와 신라가 건국하고 팽창하기 시작하는 서력기원 전후 이후 서기 300년 무렵까지 한반도 중남부는 역사의 공백지대가 초래되며 실제 그렇게 되어 버렸다.
서기 280년 무렵에 편찬된 중국 진(晉)나라 역사가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중 조조의 위(魏)나라 역사를 기록한 위서(魏書)의 동이전(東夷傳)에는 분명 삼한(三韓)을 구성한 여러 국(國) 가운데 신라와 백제라는 이름이 보인다. 소위 '원삼국시대'의 설정은 이런 역사를 몰각하고 있는 셈이다. 서기 300년 무렵까지 한국사가 원삼국시대로 설정되는 바람에 그보다 훨씬 이전에 지금의 경주 지방 일대에 이미 건국해 있던 '초기 신라인'들이 남겼음이 분명한 유적과 유물조차 신라가 아닌 '원삼국시대' 에 배정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2005. 11. 8. '연합뉴스'에서)
♧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이전의 단계를 말하는데, 기원을 전후해서 300년경까지의 시기로 역사상으로는 삼한시대(三韓時代)라 부르고, 고고학적으로는 김해시대(金海時代)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대표적 유적으로는 한강유역의 경기도 가평군 마장리(馬場里), 양평군 대심리(大心里),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토성 등이 있고, 낙동강유역의 창원 다호리(茶戶里), 대구 달성, 고성 송천리(松川里), 김해 양동리(良洞里), 지내동(池內洞), 부원동, 부산 구서동(久瑞洞), 노포동, 경주 조양동, 황성동, 합천 저포, 마산 성산 등이 있다.
이 시대에는 청동기의 실용성이 약화되고 철제도구가 널리 보급되었으며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불리는 김해식 토기가 나타났다. 출토 유물을 보면, 유물의 재질은 대부분 철로 제작되어 이전의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사용되던 시기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발달된 철제 농기구를 바탕으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철과 철기 등을 널리 낙랑과 왜까지 수출하여 교역의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리하여 마장리와 대심리 유적지에는 제철(製鐵)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철제 도끼 등의 농기구를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돌도끼, 돌화살촉, 반달 모양의 돌칼 등 석기를 사용한 흔적도 남아 있고, 때로는 짐승의 뼈로 만든 골기도 사용했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와질토기로 불리는 두드림무늬[打捺紋]의 경질토기(硬質土器)이다.
이 경질토기는 재래의 무문토기에 중국식 회도(灰陶)의 기술이 가미된 것으로, 태토(胎土:바탕흙)가 보다 정선되고, 이전의 노천요 대신에 온도를 더 높일 수 있는 밀폐된 평요(平窯)나 등요(登窯)에서 소성(燒成)되었다. 토기의 색으로는 홍갈색과 회청색 2가지가 있고, 표면은 격자무늬[格紋]나 돗자리무늬가 대부분이다. 이 시대의 농업은 삼한지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많이 행해져 김해 패총에서는 탄화된 쌀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철기문화가 낙동강 하류의 삼각지에서 발달하고 많은 저수지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은 당시에 벼농사가 많이 행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시루의 출현은 농경의 발달과 곡식 섭취의 일상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거지는 수혈식(竪穴式:움집형식)이 대부분이지만 지상가옥의 형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옥 내부의 난방방식을 보면, 바닥 한 편에 양벽과 뚜껑을 편평한 돌 또는 흙판으로 조립해 터널식으로 설치하거나, 편평한 돌을 1m 정도의 타원형으로 편 후 그 위에 진흙을 덮고 한 쪽에 바람막이 돌을 세워놓는 형태의 화덕을 사용했다. 묘제(墓制)는 원삼국시대 초기에는 독무덤[甕棺墓]과 나무널무덤[木棺墓]이 크게 유행했으나, 후기에는 덧널무덤[木槨墓]이 발달했다. 이와 아울러 무덤의 규모도 대형화되고 껴묻거리[副葬品]도 풍부해졌다.
원삼국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삼국과 같은 일원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지 못한 채 여러 소국(小國)들이 병렬적으로 존재했다. '읍락사회(邑落社會)'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의 소국은 수장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정치적·경제적인 독자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읍락 상호간의 항쟁으로 소국간의 통합이 진행되면서, 원삼국시대는 점차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로 발전해갔다.(이상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뽑음)
♧ 원삼국실
이 시대에는 철기 생산이 더욱 본격화되어 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가 널리 쓰였다. 철기의 사용으로 농경의 효율이 높아져 생산력이 향상되고, 사회의 계층 분화가 빨라져 지배 질서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낙동강 하류에서는 철을 낙랑과 왜(倭)에도 수출하였으며, 중국, 왜,. 북방의 문물이 들어오는 등 대외 교류가 활발하였다.
또한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이 도입되어 회색 토기가 만들어졌고, 목기(木器)와 칠기(漆器)를 비롯하여 다양한 생활용품이 쓰였다.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돌무지무덤(積石塚), 널무덤(木棺墓), 덧널무덤(木槨墓) 등이 있다.
▲ 칼과 칼집(銅劍)
옻칠된 칼집 속에 한국식동검이 들어 있는 것으로, 한국식동검의 칼집 구조를 잘 보여 준다. 이는 초기철기시대의 문화와 원삼국시대 문화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이다. 경상남도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통나무널 아래의 대바구니에 있던 것으로 각종 칠기 및 중국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 목걸이(頸飾)
수정을 여러 면으로 다듬은 구슬[多面玉]과 곱은옥[曲玉]을 꿰어 만든 것이다. 선사시대의 목걸이는 주로 뼈나 옥으로 만들었으나 원삼국시대부터는 유리와 수정, 마노, 호박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곱은옥, 대롱옥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경상남도 김해 양동리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 오리모양 토기(鴨形土器)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새 또는 오리를 본떠 만든 와질토기로, 의식용이나 부장용으로 사용되었다. 속이 빈 몸통은 술 등 액체를 담을 수 있고 등과 꼬리부분에 있는 구멍으로 액체를 담거나 따를 수 있다.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는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울산 중산리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 항아리(組合式牛角形把手附長頸壺)와 단지
목이 긴 항아리에 쇠뿔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와 주머니 모양의 단지이다.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와질토기로 밀폐된 굴가마에서 구워 회색을 띤다. 형태는 민무늬토기에서 변화된 것으로 주로 널무덤[木棺墓]에서 출토되며 원삼국시대 전기에 유행하였다. 경상남도 김해 다호리 널무덤[木棺墓]에서 출토되었다.
▲ 세발솥(靑銅鼎)
중국에서 상주(商周)시대 이래 사용된 예기(禮器)의 하나로서, 소유자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樂浪)의 중심지인 평양과 진·변한 지역에 해당되는 울산 하대, 김해 양동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 세발솥은 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중국 전한(前漢)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울산 하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노란색을 제외한 사진과 글 내용은 박물관 홈에서 뽑음)
♬ 명상 - 나그네
'국내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실의 '백제금동대향로' (0) | 2006.09.13 |
---|---|
고구려실의 '금귀걸이' (0) | 2006.09.09 |
청동기, 초기철기실의 유물 (0) | 2006.09.01 |
신석기실의 ‘빗살무늬토기’ (0) | 2006.08.30 |
구석기실의 '슴베찌르개' (0) | 2006.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