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고구려실의 '금귀걸이'

김창집 2006. 9. 9. 22:21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을 보고 나서 (5)

 

 

* 음성 큰바위 얼굴 조각공원에 세워진 '쌍둥이 광개토왕비' 

 

▲ 동북공정 속 고구려

 

 서서히 힘이 붙어 가는 중국이 이제 문화제국주의의 흉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재 고구려와 발해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기화로 하여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부였다'는 주장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고 하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면 그들과 국경을 마주해야 되는데, 그때 가면 옛 고구려 땅이 우리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저의가 깔려있는 것이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 2003년 국내에 소개됐을 때, 우리는 좀 어이가 없었다. 수를 물리치고 당과 통렬하게 싸워 이긴 고구려가 중국이라니…. 하지만 중국은 동북공정을 포기하기는커녕 집요하게 몰아붙여서 지안, 환런 등 중국 내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켜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다. '동북공정 고구려사'는 "몇 백 년이라고 해도 좋고, 몇 천 년이라고 해도 좋다. 청나라 영토 범위에서 활동한 민족은 모두 중국 역사상의 정권"이라는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은 주변 소수민족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이며, 소수민족과 연관된 주변 국가의 역사 또한 중국 역사라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고구려를 일방적으로 예속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구려가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에 뒀다고 한다. 고선지 장군 등 고구려 유민이 중국의 통일 대업 완수에 공헌했는데, 이는 고구려인이 중국과 같은 역사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이없게 몰아치는 그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고구려사를 잘 알아둬야겠다.

 

 

* 강서대묘 속 북쪽에 그려진 '현무도' 

 

♧ 고구려(高句麗)의 성립

 

 고구려는 삼국시대 우리 고대국가의 하나로 기원 전후시기에 성립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무대로 존속하다가 668년에 멸망하였다. 초기의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독로강 및 동가강 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지역은 깊은 계곡과 산이 많고 하천 연변에 좁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청동기, 철기 문화가 보급되면서 이러한 계곡과 평야에 나(那)라고 부르는 단위 부족들이 다수 뭉쳐졌다.

 

 이곳에서의 정치세력의 존재는 BC 128년경에 위만조선에 불만을 품고 한에 투항한 예군 남여가 거느린 28만여 명의 집단을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이 집단은 하나의 강력한 결집력을 갖는 국가라기보다는 각 지역 정치체들의 느슨한 연맹체였다. 그런데 한나라의 고조선 침략과정에서 고구려 지역에도 BC 107년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현도군의 설치는 다른 3군현보다 1년 뒤의 일인데, 이것은 이 지역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에 의한 현도군의 설치, 운영은 처음부터 큰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고구려족의 거센 저항으로 현도군은 BC 75년에 흥경, 노성 방면으로 중심지를 옮기게 되었다. 현도군 소속 3현 중에 수현으로서 고구려현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BC 1세기 무렵에 이미 '고구려'란 이름이 존재했고, 그 세력이 이 지역의 중심적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때 고구려란 나라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고구려족에 의해 각 지역에서 정치체가 성립되었고, 그들이 종족적으로 결집되어 가는 과정이다.

 

 

* 고구려 씨름무덤 '세발까마귀(사실은 세발봉)' 

 

♧ 태조왕대에 이르러 국력 강화

 

 이들은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큰 세력으로 결집되었고, 최후로 남은 다섯 세력집단이 연맹하여 고구려 국가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연맹체적인 고구려 국가의 성립은 늦어도 현도군을 축출한 BC 1세기경에는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고구려 연맹체의 주도권은 송양 집단의 소노부가 장악했으나, 곧 부여지역에서 뒤늦게 이동해온 주몽 집단의 계루부에게 연맹장의 위치를 넘겨주게 되었다.

 

 주몽은 한군현과의 투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며 연맹체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1세기 태조왕대에 이르러 나부체제를 통해 고구려족 전체를 통솔하는 보다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태조왕 이전까지만 해도 아직 주변에는 고구려 연맹체 안으로 통합하지 못한 다수의 나국(那國:소국)이 존재했으나, 태조왕 때 조나(藻那), 주나국(朱那國) 등을 최후로 흡수, 통합하면서 5부 체제를 확립하였다.

 

 5부 체제 안에서 각 부의 대내적인 자치권은 인정되었으나, 대외적인 무역권과 외교권을 박탈하여 고구려왕이 이를 관장하였다. 현도군과의 교역에서 고구려왕이 관장한 책구루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나아가 대내적 자치권도 일정하게 제약되어 각 부가 자체적으로 임명한 관리들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각 부의 독립성이 그만큼 축소되었고, 고구려왕의 통솔력이 상당한 정도로 강화된 것이다. 태조왕대 5부 체제의 구축으로 고구려는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면서 국력이 강화되었다.

 

 

* 고구려 시대의 '항아리' 

 

♧ 고구려의 문화

 

 고구려 미술의 대표적인 유산으로는 고분벽화를 들 수 있다. 이는 당대 동아시아의 문화유산 중 가장 뛰어난 것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까지 80여 기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수도였던 평양과 지안[輯安]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고구려의 벽화는 처음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독자적인 표현기법과 내용을 갖게 되었으며, 백제·신라·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벽화의 내용이 초기에는 무덤 주인공의 초상과 생전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속도가 주류였으나, 후기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의 일종인 청룡·백호·현무·주작의 사신도를 주로 그렸다.

 

 고구려의 문학으로는 왕자 호동(好童)이나 온달(溫達) 등 역사적 인물을 다룬 설화문학을 꼽을 수 있으며, 시가문학으로서는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와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지어 보냈다는 오언시가 전해지고 있다. 한편 고구려의 악곡으로는 '지서가'(芝栖歌)와 '지서무'(芝栖舞)가 전해진다. 또 고구려에 일찍부터 중국이나 서역의 악기와 악곡이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왕산악(王山岳)은 중국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현학금(거문고)을 만들고, 100여 곡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학의 보급과 발달에 따라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진전되어 '유기(留記)' 100권이 만들어지고, 영양왕 때에는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이를 정리하여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고구려 때 만들어진 비문으로는 지안[輯安]의 광개토왕릉비와 중원의 고구려비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특히 광개토왕릉비의 문장과 서체는 매우 뛰어나서 당시 고구려 한학의 수준을 엿보게 한다. (이 부분까지는 다음 백과 사전에서 뽑았음)

 

 

* 충주에 갔다 들렀던 '중원고구려비' 

 

♧ 박물관의 고구려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그 뒤 313년 평양 지역의 낙랑군(樂浪郡)을 몰아내고, 북으로는 중국 랴오허(遼河)에서 지린 성(吉林省) 쑹화 강(松花江)에 이르고,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넓혀 동아시아의 질서를 좌우하는 강자(强者)가 되었다.

 

 고구려는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서역(西域),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학, 음악, 무용, 공예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고구려 벽화무덤은 고구려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러한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만주의 환런(桓仁), 지안(集安) 일대와 평양 등 고구려 옛 수도를 중심으로 발견된 성, 무덤, 궁궐터, 절터 그리고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꾸미개 등의 유물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바다 건너 왜(일본)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졌다. 

 

 

♧ 관 꾸미개(金銅冠飾)

 

 고구려 관모인 절풍(折風)에 꽂았던 관 꾸미개이다. 세 개의 세움 장식이 남아 있는데, 가장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하나를 꼬아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였다. 이런 제작 기법은 신라 황남대총 남쪽 무덤의 은관(銀冠)과 의성 탑리 무덤의 금동관에서도 확인되어 두 지역간의 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 금귀걸이(金製太環耳飾)

 

 굵고 둥근 고리에 작은 장식을 매단 것으로 고구려의 대표적인 귀걸이다. 연결고리[遊環]와 드리개[垂下飾]에 금 알갱이를 붙여 넝쿨무늬와 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서울 능동에서 출토되었다.

 

 

♧ 연꽃무늬 수막새(蓮花文圓瓦當)

 

 천추총 정상부에 세워졌던 건물에 사용되었던 기와로 생각된다. 막새면 가운데는 볼록하게 솟은 반구형 씨방[子房]이 배치되고, 막새면을 부채살 모양으로 구획한 후 끝이 뾰족한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기는 등 고구려 기와의 특징이 뚜렷하다.

 

 

♧ 짐승얼굴무늬 수막새(怪獸面文圓瓦當)

 

 크게 과장된 두 눈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짐승얼굴이다. 짐승얼굴무늬는 나쁜 것을 쫓기[逐邪]위한 것으로, 주술적인 장식이나 건축, 무덤 등에서 많이 나타난다.

 

 

♧ 집(家形土器)

 

 네모진 건물에 우진각 지붕이 올려진 형태이다. 지붕에 일정한 간격으로 골을 파서 기왓골을 표현하고 있다. 무덤에 넣기 위해 만들어진 명기(明器)로 추정된다.

 

 

♧ 글자가 새겨진 벽돌(銘文塼)

 

 벽돌의 옆면을 구획한 후, 그 안에 글자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글자는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 '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등 무덤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글자[吉祥句]들이다. 무덤 위에 세운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왕릉과 천추총에서 출토되었다.

 

 

♧ 항아리(長胴壺)

 

 몸체의 최대 지름에 비해 높이가 높은 토기이다. 그릇 표면의 일부를 문질러 광택을 냈는데, 이것이 무늬와 같은 효과[暗文]를 내고 있다. 고구려 토기 중 가장 많이 출토되는 형태의 항아리로, 대부분 생활유적에서 출토된다. 몸통의 양쪽에는 넓은 띠 형태의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도 있다. 서울 구의동 보루에서 출토되었다.

 

 

♧ 글자가 새겨진 청동 그릇(銘靑銅盒)

 

 신라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된 고구려 청동 그릇이다. 바닥에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는 글자가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글자체로 새겨져 있다. '을묘년'은 광개토왕의 장례를 치른 다음해(415)로, 이 그릇은 광개토왕을 장사지낸 1년 뒤에 신라 사신(使臣)이 고구려에서 받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우'라는 글자를 통해 이러한 형태의 그릇이 당시 고구려에서 '호우'라고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되었다.

 

 

♬ 공(空, Emptness) - 정수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