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을 보고 나서 (3)
*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가지 동검들
△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Bronze Age)
인류물질문화 발전단계 중 청동으로 연모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때로부터 철기를 만들어 쓰기 직전까지의 시기. 이 시대가 시작된 연대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데, 예를 들면 그리스에서는 BC 3000년 이전에 시작되었으나 중국에서는 BC 18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초기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라고 하며, 순동(純銅)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구리는 매우 귀하여 작거나 아주 귀중한 것만 만드는 데 사용했다.
BC 4000년대 중기가 되면 주조된 연모·무기와 함께 급속히 발달한 구리 야금술이 메소포타미아의 도시화를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 BC 3000년 무렵 구리는 중동지방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지중해지역까지 퍼져나갔고 유럽에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순동문화의 단계에서 비록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이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BC 2000년대에 청동의 사용이 매우 증가했는데, 그 이유는 영국 콘월의 주석광이 크게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대규모로 생산된 청동기의 상당부분은 이 주석광에서 채굴된 것을 이용했다. 그러나 BC 1000년경부터 새로운 금속인 철이 보다 쉽게 구해져 사용되면서 청동기시대는 끝나게 되고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 초기철기시대 대표하는 민무늬덧띠토기
▲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한국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석기시대로부터 금석병용기를 거쳐 초기 철기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이 일제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왕성한 발굴조사와 연구성과로 청동기문화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민무늬토기와 간석기를 중심으로 이룩된 문화를 민무늬토기문화[無紋土器文化]라고 하는데, 이것은 앞시기인 신석기시대를 가리키는 빗살무늬토기문화와 구분되며 넓은 뜻으로는 청동기시대를 포함하고 있다.
청동기 분포지역은 대체로 동검을 기준으로 문화권을 나누고 있다. 이 구분에 의하면 비파형동검이 많이 나오는 랴오닝[遼寧] 지역까지를 포함하여 예맥문화권으로 설정하고, 이 지역을 고조선 영역으로 보고 한국 청동기문화에 넣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범위는 넓은 뜻으로 해석하여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청동기라도 그것이 사용되기 시작한 때를 청동기시대로 보고, 하한연대에 대해서는 청동기가 나오는 많은 유적들이 대부분 후기에 속하면서 철기와 함께 출토되므로 청동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와 겹친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크게 석기·토기·청동기로 나누어진다. 석기는 간석기가 대부분이며 종류가 여러 가지이고 만든 수법도 매우 뛰어났다. 쓰임새에 따라서 공구용·농경용·사냥용으로 나누어진다. 공구용으로는 돌도끼와 홈자귀가 있다. 돌도끼는 날이 양쪽에서 갈라진 조개날에 몸통의 단면이 네모난 것, 볼록 렌즈 모양, 긴네모꼴 등이 있는데, 조개날도끼는 주로 나무를 자르는 데 이용되었다.
* 명도전을 비롯한 초기철기시대 유물들
△ 철기시대(鐵器時代, Iron Age)
인류물질문화 발전 단계에서 연모를 철기로 만들어 썼던 시기. 철은 다른 금속에 비해 원료가 흔하지만 원석으로부터 철을 추출하는 데는 높은 열을 필요로 하므로 어느 정도의 기술발전 없이는 만들기 어려운 만큼 청동에 비해서 늦게 사용되었다. 한편 초기철기시대는 본래 자체적으로 제작하기에 앞서 밖으로부터 철기를 들여다 쓰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철의 발상지는 서남아시아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알려져 있고 그곳에서 BC 3000년경부터 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는 자연철(自然鐵:隕鐵)을 이용해 두드려 만든 것으로 철기의 생산은 소규모였다. 그후 BC 15세기 무렵에 건설된 히타이트 제국에서 철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되었는데 철을 독점 생산하여 강한 무기로 무장한 전투력을 갖고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BC 12세기에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과 함께 철생산 기술이 서아시아 여러 나라로 전해짐으로써 철기가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인 BC 5세기부터 철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서아시아로부터 전해온 것인지 또는 중국이 자체적으로 제철기술을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그런데 서아시아의 철기는 단조(鍛造) 방법으로 만드는 데 비해 중국에서는 처음부터 주조(鑄造)에 의해 만들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철기를 만들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 청동기시대 부장품으로 생각되는 간돌검
△ 우리나라의 초기철기시대
북쪽지방의 철기시대 유적에서 명도전(明刀錢)이 나온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철기문화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도전은 중국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연(燕)나라에서 만든 금속화폐로 그 출토지가 랴오둥[遼東] 반도에서 시작하여 압록강 중류를 거쳐 청천강 유역에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철기시대 유적들인 위원 용연동(龍淵洞), 강계 길다동(吉多洞), 덕천 청송리(靑松里) 등에서 철제 이기(利器)들과 함께 명도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철기술을 갖고 있던 연나라로부터 우리나라에 철기문화가 들어온 것을 알 수 있고, 그 시기는 BC 3세기 무렵이 된다.
이것을 초기철기시대로 본 것은 그곳에서 나온 철기들이 자체 생산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제품을 들여와 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철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철기유물들의 성분을 분석해본 결과 중국의 제철기술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자체 생산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철낫·철보습·철반달칼·철괭이 등 농업 생산도구들이 철로 바뀌었으나 의례와 신분을 상징하는 비실용성 도구들은 아직도 청동을 이용했다.
이와 같이 철기시대는 생산력이 일정한 정도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생산력 발전을 바탕으로 이미 고대국가단계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북쪽에서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인 위만조선이 등장하며 남쪽에서는 삼한의 소국들이 일어나는 단계가 된다. 따라서 철기시대는 이미 역사시대로 들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상은 다음 백과에서 뽑았음)
* 청동기시대 여러 가지 토기들
△ 청동기, 초기철기실
청동기시대(기원전 10∼기원전 4세기)는 우리나라에서 금속기가 처음으로 나타난 시대로서 중국 동북 지방을 비롯한 북방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당시 청동기는 권위의 상징물이나 의기(儀器)로 사용되었고,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간석기(磨製石器)나 목기(木器),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사용하였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벼농사 등 농사를 지으면서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규모가 확대되어 오늘날 농촌과 비슷한 대규모 마을이 생겨났다. 집단 내에서는 사회적 지위 차이도 생겼다.
무덤으로는 고인돌(支石墓), 돌널무덤(石棺墓), 독널무덤(甕棺墓) 등이 있다. 한편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중국에서 철기가 도입되면서 초기철기시대로 접어든다. 철기는 북부 지역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한반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단단하고 예리한 철제 농기구와 무기의 발달은 사회 분화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각 지역에서 정치 집단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 반달칼(半月形石刀)
곡식의 이삭을 따는데 사용한 수확용 도구이다. 칼등부분 가까이에 뚫린 두 개의 구멍에 끈을 꿰어 손에 잡고 사용하였다. 청동기시대 벼농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사용하다가 철기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지역에 따라 생김새에 차이가 나타나는데, 반달모양 외에 긴네모꼴과 세모모양 돌칼도 유행하였다. 경기도 양평에서 출토되었다.
△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
중국 요령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는 청동검이다. '만주식동검' 또는 아래부분의 폭이 넓고 둥근 모양의 악기인 비파(琵琶)를 닮아서 '비파형동검'이라고도 부른다. 검몸과 자루를 따로 주조하여 조합하는 형식[別鑄式]으로, 검몸과 자루를 하나로 만드는[一鑄式] 중국식동검과는 차이가 있다. 1974년 충청남도 부여 송국리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
▲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
앞면에는 머리 위에 긴 깃털 같은 것을 꽂은 채 따비로 밭을 일구는 남자와 괭이를 치켜든 인물이 있고 그 옆에는 항아리에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인물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좌우에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 끝에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어 우리 민속에서 보이는 솟대[神竿] 신앙을 연상케 한다. 청동기시대의 농경모습과 농경의례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당시의 회화 수준을 짐작케 해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 한국식동검(韓國式銅劍)
한반도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청동검이다. 날이 좁고 직선적인 형태로 세형동검(細形銅劍), 또는 좁은놋단검이라고도 한다. 검몸과 자루를 따로 만들어[別鑄式] 결합하여 사용한다. 충청남도 아산 남성리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
▲ 거친무늬 거울(粗文鏡)
매끈한 앞면을 거울로 사용하였다. 뒷면에는 두 개의 꼭지가 있고 내부를 집선(集線)으로 채운 대칭형의 별무늬[星形文]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거친무늬 거울은 돌널무덤에서 출토되는데 주로 별무늬나 번개무늬 등이 표현되어 있다.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 방울(八珠鈴)
보통 쌍으로 출토되는데 두 손에 들고 흔들었던 의식용(儀式用) 도구로 추정된다. 가운데의 햇빛무늬를 중심으로 그 바깥쪽에는 8개의 작은 방울이 대칭으로 달려 있다. 앞면에는 여러 가지 집선무늬가 새겨졌으며 뒷면에는 고리가 붙어 있다. 방울 표면에는 고사리무늬[蕨手文]를 대칭으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길게 째진 부분[切開口]이 두 개씩 있고, 그 안에 청동구슬[銅丸]이 들어 있다. 국보 제143호로 전라남도 화순 대곡리의 돌무지널무덤[積石木棺墓]에서 출토되었다.
▲ 동검 거푸집(靑銅劍鎔範)
녹인 청동을 부어 검을 만들기 위한 활석제 틀[거푸집, 鎔範]이다. 활석(滑石)은 돌이 물러 조각하기 쉽고 녹인 청동을 부어 넣을 때(주조) 터지지 않아 반영구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주조 시에는 같은 형태를 가진 거푸집 두 개를 합하여 사용하는데, 거푸집을 바른 위치에 맞추기 위해 옆면에 한 줄로 눈금을 새겼다.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에서 출토되었다.
▲ 간돌검(磨製石劍)
자루끝과 칼코가 옆으로 길게 뻗은 특이한 형태로 실제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껴묻거리용[副葬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풍화된 점판암(粘板岩)으로 만들어져 검은색의 결이 무늬처럼 나타나 있다. 경상남도 김해 무계리의 고인돌[支石墓]에서 출토되었다.
▲ 구멍무늬 바리(孔列土器)
입술 바로 아래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멍무늬[孔列文]를 뚫은 깊은바리[深鉢]이다. 입술 아래에 구멍을 뚫은 토기는 함경북도지방에서 신석기시대 말기에 출현하였으며 그 후 동해안과 한강을 따라 중부와 남부지방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함경북도 웅기 송평동 조개더미에서 출토되었다.
▲ 붉은 간토기(紅陶)
표면에 산화철을 발라 문지른 후 구워내어 붉은색 광택이 나는 토기이다. 산화철을 발라 문지르는 것은 문양효과, 방수, 토기를 단단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집터유적에서는 바리, 단지, 접시 등의 붉은 간토기가 발견되는 반면, 고인돌[支石墓]이나 돌널무덤[石棺墓]의 껴묻거리로는 주로 바닥이 둥근 단지[圓底壺]가 출토된다.
▲ 가지무늬 토기(彩文土器)
토기 형태· 바탕흙 등 제작수법이 붉은간토기[紅陶]와 비슷하여 같은 계통으로 보기도 한다. 간혹 집터에서도 출토되지만 주로 의례용으로 고인돌[支石墓]·돌널무덤[石棺墓] 등에서 출토된다. 경상남도 진주 대평리에서 출토되었다.
▲ 검은 간토기(黑陶長頸壺)
표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을 바르고 문질러서 광택을 낸 토기이다. 검은 목 단지는 요령지방에 그 기원을 두며 덧띠토기[粘土帶土器]와 함께 중부 이남지역의 대표적인 초기철기시대 토기이다. 대전 괴정동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
▲ 덧띠토기(粘土帶土器)
아가리의 바깥쪽에 둥근 점토띠를 두툼하게 붙인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민무늬토기이다. 덧띠의 단면은 초기에는 원형이다가 점차 삼각형으로 변하게 된다. 대전 괴정동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 (* 노랑빛이 나는 사진은 필자가 찍은 것이고 나머지 글과 사진은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뽑았음)
♬ 명상 - 은행나무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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