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을 보고 나서 (2)
▲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Neolithic Period)
인류문명의 발전단계의 하나로 석기가 한층 발달했던 시기인데,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의 기간을 말한다. 영국의 고고학자 러벅의 '선사시대(Prehistoric Times)'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로 나누었다. 구석기시대에는 타제석기만을 사용했던 데 비해 신석기시대는 마제석기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석영의 일종인 정교한 타제석기도 사용했다.
유럽, 아프리카 북부, 서아시아에서의 조사 연구한 결과 홍적세에서 충적세로의 전환, 타제석기에서 마제석기의 출현으로의 전환, 그리고 수렵·어로·채집에서 가축사육·농경으로의 전환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또 정교하게 만든 타제석기가 신석기시대를 특징짓는 것만은 아니며, 칼·화살촉·낫으로서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도 중요하게 쓰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식량생산에 의해 생긴 여유는 마침내 전문기술자를 낳았으며, 결국은 계급의 성립, 도시·국가의 탄생을 촉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일드에 의해 새로이 정의된 신석기시대의 개념은 범세계적으로 공통하여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식량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의 비약적인 발전이 지방에 따라서는 반드시 석기시대에 실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남시베리아의 알타이 지방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연해주(沿海州) 등지에서는 철기시대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신석기시대의 개념은 세계 각지에서 몇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곳도 있다.
▲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우리나라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때는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이다. 북한에서는 1950년에 들어서면서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 궁산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하여 평양시 승호구역 금탄리(1956 발굴), 청진시 농포동(1956 발굴),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1957발굴), 평안북도 의주군 미송리 동굴(1959 발굴),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 구석(1959∼61 발굴)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평안남도·황해도·경기도 일원을 포함하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빗살무늬토기문화권(궁산문화권)을 설정했고 사슴뿔로 만든 괭이와 뒤지개, 멧돼지 이빨로 만든 낫 등의 출토유물을 가지고 원시농경을 추론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농사짓기는 이때에 처음으로 주장되었다. 유적이 이루어진 시기에 대해서도 토기에 섞인 석면의 존재를 이용하여 처음으 추정연대를 제시했는데 궁산문화의 상한은 BC 1500년 이상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 초에 한강유역의 서울 암사동과 하남 미사동 및 춘천 교동 동굴에 대한 조사 보고가 있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계통이며 수렵과어로를 주로 하고 BC 3000∼2000년에 시작되었는데 시베리아 쪽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서해안으로 들어와 남해안을 거쳐 동북지방으로 전파되었다고 보았다. 1960년대 후반에 가면서 신석기유적 발굴이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김해 농소리(1964 발굴), 부산 다대포(1966 발굴), 사천 구평리(1966 발굴), 양산 신암리(1966 발굴) 등 주로 남해안지방의 조개더미유적과 암사동 집자리유적(1967, 1968 발굴)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석기문화 연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다. 1980년초부터 시작된 양양 오산리유적 발굴로 강원도가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공백지대가 아님을 확인했고, 그 시기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BC 6000년을 넘어가게 되었다. 유적 발굴은 1980년대말경 더욱 활발해져 1987년부터는 연차발굴로 하남시 미사리유적을 조사하고 있으며, 합천 댐 수몰지구에서 봉계리 및 거창 임불리유적을 찾게 되었다. 이로써 경상남도 내륙지방에도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음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약 150여 군데가 넘으며 전국으로 분포되어 있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 계통이라는 주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여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시베리아 기원문제는 주로 외국인 학자들에 의한 반론이 있게 되고, 1980년대에 들어와 시베리아 지방의 신석기 연대보다 더 올라가는 오산리유적을 발굴하면서 더욱 퇴조한 듯하다.
가장 많이 연구된 분야는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편년)이다. 남한의 시기구분은 1960년대 이후 한강 유역의 빗살무늬토기를 중심으로 나누다가 동삼동 발굴을 계기로 동삼동 출토의 덧무늬토기에 기준을 맞추었다. 한편 한강유역 빗살무늬토기를 중심으로 편년된 것도 있다. 최근에는 뒤의 것에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방사성탄소 연대를 참고하고 오산리 등을 포함시켜 남북한 전체의 신석기 시기구분이 나오게 되었다. (이상은 다음 백과에서 뽑음)
▲ 신석기실 소개
신석기시대(기원전 8,000∼기원전 1,000년 무렵)는 빙하기 이후 달라진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이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고 정착 생활을 시작한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집터와 무덤, 조개더미 등이 있으며, 전국적으로 400여 곳에 이른다. 서울 암사동, 강원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신석기인들은 물과 식량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고기잡이와 사냥, 야생식물을 채집하면서 살았다. 이 시기에 조, 기장 등을 재배하는 농사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간석기와 뼈 연모는 더욱 효과적으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도구였으며, 토기는 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들은 실로 짠 옷감이나 동물 가죽으로 간단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옥·동물 뼈와 뿔·조가비 등으로 몸을 꾸몄다. 또한 이들은 일본 열도, 중국 동북 지역, 연해주 등 주변의 여러 집단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 이음낚시(結合式釣具)
고기잡이 도구로, 돌로 된 허리와 동물뼈로 만든 바늘을 끈으로 묶어서 사용하였다. 이음낚시는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대구, 다랑어와 같은 큰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된 것으로, 우리나라 남해안과 동해안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일본 서북 규슈지방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두 지역 간에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시 범방 조개더미유적에서 출토되었다.
▲ 뒤지개(掘址具)
땅을 일구는 도구로, 돌을 떼어내어 날을 만들고, 나무 손잡이를 날과 평행하게 묶어 사용한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밭갈이는 풀뿌리를 캐내고 땅을 고르는 정도였기 때문에 이 뒤지개를 가지고도 큰 어려움 없이 밭을 일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와 풀을 태우는 방법[火田]으로 밭을 일구다보니 여러 해에 걸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삼사 년마다 자리를 옮겨 새로운 밭을 일궈야했다. 서울시 암사동 집터유적에서 출토되었다.
▲ 갈판과 갈돌
신석기시대의 곡물을 빻는 조리용 도구로, 넓고 납작한 갈판 위에 가늘고 긴 갈돌을 두 손으로 잡아 밀고 당기면서 사용한 것이다. 갈판의 가운데는 장기간 사용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마치 말안장 모양을 하고 있다. 애초 갈판과 갈돌은 도토리처럼 단단한 열매를 가루내는 데 사용하였으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조·기장 등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 데도 사용되었다. 서울시 암사동 집터유적에서 출토되었다.
▲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덧무늬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진흙 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맞잡아 돋게 하여 무늬를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 지역에서 출토된다. 이 토기는 경남 통영시 연대도 조개더미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체에 덧무늬를 마치 한 송이 꽃봉오리처럼 베풀었다. 신석기인들의 뛰어난 공간 구성력과 미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덧무늬토기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여러 기하학적 무늬는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토기는 서울시 암사동 집터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겉면을 삼등분하고 각각 다른 무늬로 장식하였다. 토기 아래쪽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은 깨진 토기를 임시로 수리하여 사용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당시의 토기는 누구나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드는 기술자가 따로 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 조가비 탈(貝面)
조가비에 세 개의 구멍을 뚫어서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다. 자연환경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신석기인들에게 자연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신석기인들은 주술적 행위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부산시 동삼동 조개더미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얼굴모양 조가비 탈은 실제 착용했다기보다는 마을 공동의식이나 축제 때 의식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인들의 신앙 및 예술 행위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노랑빛이 나는 사진은 필자가 찍은 것이고 나머지 글과 사진은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뽑았음)
♬ 명상 - 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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