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을 보고 나서 (8)
♧ 국보 제30호 분황사석탑 - 출처 ⓒencyber.com
▲ 신라 역사의 개관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한 뒤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군림하다가 935년 고려에 스스로 항복했다. 국호는 503년(지증마립간 4)에 신라로 확정될 때까지 '사로', '사라', '서라벌'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땅, 해 뜨는 동쪽 나라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신라의 역사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전(全)역사를 3시기로 구분하여 통일 이전을 상대(上代), 통일기는 중대(中代)와 하대(下代)로 나누었다. 반면 '삼국유사'는 통일 이전을 상고(上古)와 중고(中古)로 나누고 통일기를 하고(下古)로 잡았는데, 이는 왕실 혈통상의 변화 또는 불교의 공인과 같은 특정한 사실을 기준으로 구분한데 불과하다.
신라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한국사의 발전단계에 맞추어 시기를 구분한다면 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통일 이전의 신라는 진한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의 탄생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장구한 기간인데, 이는 편의상 3시기로 나누어 파악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에서는 신라와 통일신라로 전시실이 나누어져 있다.
♧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 출처 문화재청
▲ 신라의 미술
삼국시대 신라의 미술은 크게 건축, 조각, 공예, 회화 등 몇 분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중 건축에 속하는 것으로는 왕릉과 사찰, 탑파(塔婆) 등이 있는데, 통일 이전 왕릉은 대개 평지에 구덩식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었다. 통일 이전에도 적지 않은 사찰이 건립되었으나, 현재에는 모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최근 본격적으로 행해진 황룡사 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통일 이전 사찰의 가람 배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탑파 역시 통일 이전의 것은 남아 있지 않으나, 선덕여왕 때의 황룡사 9층탑에서 볼 수 있듯이 목탑이 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각분야에서는 불상과 각종 석조물이 있다. 통일 이전의 불상으로는 분황사탑에 조각된 인왕상(仁王像)을 비롯한 몇몇 석불이 주목된다. 또한 국보로 지정된 보관(寶冠)을 쓴 각기 2점의 금동미륵반가상은 국적이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공예작품은 크게 금속공예품, 도기(陶器), 토기로 나누어진다. 연맹왕국시대의 왕릉에서 많은 공예품이 나왔는데, 이들 가운데 금관을 비롯한 각종 순금제품, 은제품, 구리제품 등은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또한 도기 및 토기제품도 기종(器種), 기형(器型) 등이 모두 다양하며 우수한 편이다. 회화에 있어서는 왕릉의 구조상 널방[玄室]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고구려나 백제에서처럼 벽화를 남길 수 없었다. 다만 천마총에서 마구의 다래[障泥]에 그려진 천마도가 출토되었고, 그밖에 기마인물도와 서조도(瑞鳥圖)가 발견되어 통일 이전 신라의 그림이 패기에 찬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국보 제33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 출처 문화재청
▲ 신라실의 유물
신라는 한반도 남동쪽에 있던 진한(辰韓) 12국 가운데 경주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이 성장, 발전한 나라이다.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한 신라는 6세기에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정치와 사상의 기반을 마련하고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대가야(大加耶)를 병합(562년)하는 등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라 문화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불교로 대표된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금관, 귀걸이 등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부를 만큼 화려하고 뛰어난 세계적 금공예품이다. 불교는 골품제(骨品制)와 함께 신라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한편 경주 지역에서 출토되는 외래의 유물과 토용에서 보이는 서역(西域) 문화의 흔적은 신라의 대외 교류와 국제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다음 백과)
▲ 금관(金冠)
신라 왕족의 힘과 권위를 상징한 것이다. 이 금관은 나뭇가지모양 세움장식[樹枝形]과 사슴뿔모양[鹿角形]의 세움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세움장식은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나무를 상징화한 것이다. 금관에는 연속점무늬[點列紋]와 곱은옥, 달개[瓔珞] 등이 장식되어 있다. 국보 제191호로, 여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황남대총 북쪽무덤에서 출토되었다.
▲ 허리띠(金製帶金具)
금으로 만든 허리띠 꾸미개로, 허리띠에 물건을 주렁주렁 매달고 생활하는 북방유목민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죽은 없어지고 꾸미개만 남아 있다. 드리개에는 옥, 물고기모양, 손칼모양, 수실모양, 홀[圭]모양 판 등이 매달려 있는데 일상생활에 필요한 연모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국보 제192호로, 황남대총 북쪽무덤에서 출토되었다.
▲ 목걸이(金製頸飾)
둥근 고리 여러 개를 접합하여 만든 금구슬 70여 개와 옥을 꿰어서 만든 목걸이다. 금구슬에는 여러 개의 하트모양 달개[瓔珞]가 매달려 있다. 맨 아랫쪽에는 녹색의 옥 1점이 매달려 있어 황금빛 금과 잘 어울린다. 보물 제456호로, 경상북도 경주 노서동 215번지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 유리병(鳳首形甁)
연록색의 유리병으로, 봉황(鳳凰)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으로도 부른다. 손잡이에는 금실로 감아 수리한 흔적이 있어 당시 왕실에서도 유리는 매우 귀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리병은 대롱불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로만글라스’로, 비단길 혹은 바닷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제193호로, 황남대총 남쪽무덤에서 출토되었다.
▲ 말 탄 사람 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을 타고 있는 주인과 하인 모습의 토기이다. 말의 앞가슴에 액체를 따를 수 있는 긴 대롱이 달려 있어 주전자[注子]와 같은 기능의 토기로 생각된다. 주인은 장식이 화려한 말을 타고 고깔모양의 모자에 갑옷을 입고 있다. 하인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웃옷을 벗은 채 등에 짐을 메고 있다. 하인의 손에 방울을 들고 있어 길 안내를 하고 있는 듯 하다. 국보 제91호로, 경상북도 경주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되었다.
▲ 토우 붙은 항아리(土偶附長頸壺)
뱀, 개구리, 사람 등의 토우가 어우러져 항아리에 붙어 있다. 개구리의 왼쪽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이 대칭으로 배치되고 뱀 사이에는 오른손으로 성기를 잡고 왼손에 뭉둥이를 들고 있는 남자가 표현되었다. 뱀, 개구리, 사람 등이 비교적 단조롭게 표현되었으나 신라인의 예술성과 사상을 엿 볼 수 있다. 국보 제195호로, 경주 노동동 11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 사진을 맘껏 찍지 못하는 박물관 사정상, 문화재청의 사진을 제외한 글과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홈에서 내리받은 것입니다.)
♧ 국보 제275호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 출처 문화재청
♬ 가을에 듣는 우리 가곡 - 가고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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