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단편] 삶과 죽음 사이 (3)

김창집 2006. 9. 26. 01:09

 

* 고향 곽지해수욕장(2006. 6. 20,)

 

 이 소설은 '제주작가' 2004년 상반기호(6월 15일자 발행)에 실었던 졸작(拙作)으로 사실상 돌아가신 어머님을 염두에 두고 돌아가시기 전 옆에서 쓴 글이다. 언젠가 기구한 운명의 선친(先親)과 자친(慈親)의 일대기를 소설로 쓰리라 작정하던 중 원고 독촉에 밀려 잠시 메모한 내용을 토대로 썼다. 이것말고도 여러 편의 소설을 여기 싣지 못하는 것은 제주방언인 '아래아(·)'가 들어가는 글자가 인터넷에 뜨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아래아(·)'가 들어가는 글자는 주로 '어/오'음으로 고쳐 썼음을 알려 둔다.

 

 여기 나오는 사진은 지난 6월 10일 제주시 곽지 향우회 주최로 열렸던 고향 마을 어른들을 위한 잔치에 나온 분들이 노는 모습이다. 초상권 관계로 욕할지 모르지만 걱정 근심을 잠시 잊고 몰두하는 모습이 너무나 순수했고, 이 글의 주인공인 나의 어머니와 모두 같이 오랫동안 살았던 분들이어서 그 정도는 용서해 주리라 믿는다. 어머님의 동서, 친척, 시누이, 동네 친구들도 계시다. 이제 모친께서 세상을 뜨신 지 1주기를 한 달 남겨 놓고 여기 싣는다.

 

 

     4.

 

 김 선생이 어머니를 모신 뒤 가장 안타깝고 속상했던 때는 한쪽이 마비 증상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때였다. 지금까지는 불편하지만 당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고 고향집에 거처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이제는 방에 갇혀 답답하고 절망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세상 모두가 불만이었다.

 

 조금만 자리를 비우면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뒹굴고 죽겠다고 벽에다 머리를 박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마음을 어느 정도 평정시켜 주는 것은 술이었다. 술로 돌아가신 남편이 미워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던 맹세가 깨지고 만 것은 농사에 힘이 부치면서였다.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 밥 생각도 없을 때 술이 들어가면 아픈 곳도 잊을 수 있고 밥을 안 먹어도 되었다. 그렇게 되면 술을 금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김 선생은 술에 관한 한 당신 마음대로 하게 해 주었다.    

 

 어차피 한 번 저 세상에 다녀오신 분인데, 지금 사는 것은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면 무엇이 겁나랴 싶어, 하는 대로 두자 동네에서는 아들이 술 마시는 것을 허가한 집이라고 소문이 났고, 이에 고무된 그의 어머니는 집에 소주 됫병 두 개를 심어놓고 가고오는 사람들 중 술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한 잔씩 베풀기도 했다. 병원에 있을 때는 술을 멀리 했는데 속상해지자 다시 술을 계속 찾기에 이른 것이다.

 

 방과 화장실이 연결된 곳에 거처하게 되어 거동이 불편해도 스스로 움직여 환자용 변기에 일을 보고 들어왔던 종전과는 달리 누운 자리에서 일으켜 변기를 받치면 도무지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꼭 좌변기에 들어다 앉히라고 했다. 변기에 앉혀도 곧 해결이 되지 않아 현기증이 날 때쯤 해서야 눕혀 달라고 했다. 정신이 좀 들어 다시 변기에 가 앉히면 이번에는 소변 정도 찔끔거리고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눕기를 수 차례 하다보면 둘이 다 지치게 마련이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대변을 못 보면서 변비가 생겨났다. 약도 잘 듣지 않아 설사약을 먹이고서 일을 처리하든지 관장을 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당신도 못 견디는 생활이 계속되면 스스로 악에 받쳐 엉엉 소리내어 울며 손에 잡히는 것을 던지며 죽는 약을 사다달라는 성화가 빗발쳤다. 그럴 때마다 옆집에서 들을까봐 마음을 졸였고 일을 시원히 해결 못하는 안타까움에 가슴만 타들어 갔다.

 

 어떤 때는 술 이외는 전혀 입에 넣지 않는 단식(斷食)으로 그의 속을 태우면서 술에 취하면 죽는 약을 사다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큰놈아! 큰놈아야!"
  "나 이디 싯수다. 무사마씀(저 여기 있습니다. 왜요)?"
  "저 신용조합에 강 돈 노려왕(찾아서) 농약 헌 펭(한 병)만 사다 도라."

 

  "무신 약마씀(무슨 약 말입니까)?"
  "근사미(제초제의 하나)나 이피엔(살충제의 하나) 둘 중에 헌 펭(한 병)만 사오라."

  "그거 허영 뭐 허쿠강(그거 해서 무엇하시겠습니까)?"
  "먹엉 죽젠(먹고 죽으려고)."

  "어멍이 죽엉 됩니까게(어머니가 죽어서 되겠습니까)."

 

  "안 죽엉 뭣허여. 베리지도 못허곡, 듣지도 못허곡, 기지도 못허는 거, 무신 짝에 ?. 하근디 아프곡. 살아도 애물단지베끼 더 되어(안 죽고 무엇 하느냐.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길 수도 없는 것, 무엇에 쓰느냐? 여러 군데 아프고. 살아도 애물단지밖에 더 되겠느냐)?"
  "경허댕 허영 어멍신디 약 멕영 죽여부는 아덜이 어디 십니까(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에게 약을 먹여 죽여버리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못 사오커건 샛놈광 족은놈 불러다 도라(못 사올 거면 둘째와 셋째 불러다 달라)."
  "딱 바쁜 아이덜 불러당 무싱거 허쿠가(무척 바쁜 아이들 불러다가 무엇하시겠습니까)?"
  "죽는 약 사다도랜 허젠(죽는 약 사다 달라 하려구)."    

 

 말이 되는 부분도 있고 어거지도 있어 김 선생은 혼자서 외롭고 괴로웠다. 박복(薄福)한 어머니, 그 어머니의 최후가 이런 거냐고 생각하며 밤새 울기도 했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버리고 세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작은집에서 살았다. 그러다 이웃 마을 유복자(遺腹子) 청년 만나 마음 하나 착한 것만 믿고 사는데, 그 청년은 딸 둘을 낳아놓고 탄광 노무자로 일본에 끌려가 2년을 버티고 해방 후에야 돌아왔다.

 

 치매를 앓게 되면 옛날 일은 선연(鮮然)하게 기억되고 금방 한 일은 잊어버린다는데 기분이 좋거나 우울한 날이면 신세 타령하듯 읊어대는 과거사였다.
  '…돌아올 중도 안 돌아올 중도 몰른 지 잘난 서방 지드리멍 어린 두 딸 안고 업고 큰집의 괄시를 받아 가멍 니 앙물엉 지드렸져.'(돌아올 지도 안 돌아올 지도 모른 제 잘난 지아비를 기다리며 어린 두 딸을 안고 업고 큰집의 괄시를 받아가며 이를 악물고 기다렸다.) 

 

 '…사발 헌 착 으신 집이 사발 두 착 거전 오란 밭 헌 판이 일루왕 살단 졸지에 생과부 되난 동녕바치도 냉겨 보고 늙은 홀아방 넘보더라.'(그릇 하나 없는 집에 사발 두 족 가지고 와서 밭 한 뙈기 일구며 살다 졸지에 생과부 되니 거지도 넘보고 늙은 홀아비도 넘보더라.) '해방이엔 허연 일분서 오란 아덜 둘을 나놔신디 느네 아시 통통헌 놈은 호열자로 가부러라.'(해방이라고 해서 일본서 와 아들 둘을 낳아 놓았는데, 너의 동생 통통한 놈은 콜레라로 가버리더라.)

 

 

  '…갠날 독날 애기구덕 지엉 새밭 이긴 웃드르 농시 검질 매멍 살단 보난 스물헌 살 난 셋년은 방적에 갔단 관절염 걸련 고름 빼멍 앓단 죽어부러라.'(개날 닭날 없이 애기구덕 지고 띠밭을 개간한 중산간 농사 김을 매며 살다 보니 스물한 살 난 둘째 딸은 방직공장에 갔다가 관절염 걸려 고름 빼면서 앓다가 죽어버리더라.) '고름 빼단 느네 아방 비우 상허덴 술먹단 보난 그것이 쿠세가 되언 술만 먹으문 산더레 돗단 쉰일곱에 가부러라.'(고름을 빼던 너의 아버지 비위 상하다고 술 마시다 보니, 그것이 술버릇이 되어 술만 마시면 산으로 달려가다가 쉰일곱 살에 죽어버리더라.)

 

 '…아덜 닛 딸 닛 합쳔 요답, 하영도 낫주마는 이제 왕 보라마는 어떵허연 그것이 한 것고.'(아들 넷 딸 넷  합쳐서 여덟, 많이도 났지만 이제 와서 보면 어떻게 그것이 많은 것이냐.) '샛아덜 한 살에 죽고 샛딸은 스물하나에 죽엉 이 가심이 아파라마는 큰년은 세간 갈란 아이 둘 도란 고향에 오란 쉰 넘언 죽어불고 두 년은 육지로 씨집을 가부난 어디 딸 꼬락지나 봐점시냐?'(둘째 아들은 한 살에 죽고 둘째 딸은 스물한 살에 죽어 이 가슴이 아팠지만 큰딸은 이혼해서 아이 둘을 데리고 고향에 와서 쉰 살 넘어 죽어버리고 두 딸년은 육지로 시집을 가버리니 어디 딸 꼴이나 볼 수 있느냐?)

 

      5.  

 

 김 선생은 갑갑하고 난처할 때면 자신의 무능을 한스러워 했다. 정말 저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것이 편안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섬뜩하기도 했다. 안락사(安樂死) 문제가 왜 나오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이 50이 되면 지천명(知天命)이라고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고 여겨지기는 했지만 미수(米壽)의 어머니를 두고 이렇게 죽음에 이르는 길이 처절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오래 산다는 것, 그것은 삶의 질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기도 하였다. 자식이나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기의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생명이 존엄한 것이라 하지만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을 진정한 생명체라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어머니의 삶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런 시간도 오래 가진 못했다. 서서히 힘이 사그라지면서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두통이 심하게 오면 오랜 세월 동안 복용해온 두통약을 한 봉지 먹이고, 다리나 허리에 통증이 오면 파스를 붙이고, 변이 잘 안 나오면 강력하게 처방된 변비약을 먹이면 무난하게 견디었다. 지금은 그런 통증도 못 느끼는 듯 약을 먹여 달라든지 붙여달라고도 않는다. 오히려 이번 감기에 들었을 때 약을 먹였는데 모두 뱉어 버렸다.  

 

 이제는 체시(저승사자)가 안 온다고 죽은 어머니가 곁에 안 데려 간다고 가끔 한탄하는 소리는 하지만 '죽는 약 사오라'는 얘기는 딱 끊어졌다. 그렇게 고향 노인들의 죽고 사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귀찮게 물었는데, 이젠 그런데 관심이 없고 본능적인 의사소통 외에는 별로 물어보지도 않는다. 가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인 왼쪽으로 돌아눕다가 머리를 부딪치든지 이불과 요를 제대로 못 찾을 때 "아이고 죽어지켜. 족은 놈아 살려도라! 족은 놈아 살려도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엊그제는 느닷없이 시집간 큰손녀 이름을 대면서 "순덕이 아기 나샤(났느냐)?" 하고 물어 당황하게 한 적도 있다. 요즘은 고독과 싸우는 법을 배웠는지 혼자서 곧잘 노래를 부른다. "족은 놈아! 베개 잘 베와도라!" "족은 놈아! 사탕 하나 도라!" "족은 놈아! 오줌 뉘와 도라!"를 외치다가도 한참 동안 반응이 없으면 체념한 듯 무서움을 털어 내듯 노래를 부른다. 옛날 어렸을 적 노래도 있고 젊어서 부르던 노래도 있고 다양하다. 그 곡조가 얼마나 서러운지 김 선생은 다음의 가사만 들으면 가슴이 미어진다.

 

 

 "…죽자고 허여도 채시 아니 완 못 죽고(죽으려 해도 저승사자 아니 와서 못 죽고)
  살자고 허니 벌고생이로다…(살자고 하니 형벌 받는 고생이로다)."♣

 

 

 

 ♨ 삼가 어머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 김영임 - 회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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