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콩트] 일출 연가(日出戀歌)

김창집 2003. 1. 7. 11:42

 
● 2003년 1월 1일 05시 30분

노총각 이(李白羊) 군이 오늘 따라 공연히 들떠 있다. 새해 첫 일출을 보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샌 눈치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양쪽 길을 번갈아
살피다가 다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말 그대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3일 전에 있었던 묵은 해 마지막 산행에서 일이었다.
말수가 적은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년에는 꼭 장가가도록 도와주세요.'
하긴 이름과 같이 순하디 순한 백양이 세 번째 양띠 해를 맞았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지. 1967년 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이 되나?

총무가 차를 배정한다. 이 군의 차에는 나를 포함한 4사람이 타게 되었다.
회장이 못 나왔기로 부회장인 내가 오늘 일정을 지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6명. 나오겠다던 회원은 다 모인 것 같다. 일기예보에 오늘 일출이 시원치 않을
것이라고 초를 치더니만, 정말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
새해 일출 보러 다닌 지 7년째, 언제 저 '동명일기'처럼 상큼한 해맞이를 한 적이
있었던가? 옆 좌석에서는 어서 가자고 재촉이다. 모두 내가 앞장서야 한다고
해서 총무의 승용차만 7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6시 50분. 이 군이 차에서 내려 마지막으로 사방을 둘러본 뒤, 총무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고는 체념한 듯 차에 시동을 넣었다. 둔지봉으로 출발이다. 3년째 가는
이 오름에서 제대로 된 일출을 보고 말자는 고집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한 처지이다.
일주도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날씨와 상관없이 차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아침 꼭두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십중팔구는 해를 보러
가는 길일 터. 동쪽으로 트인 오름 곳곳에서 해를 볼 수 있으므로, 성산 일출봉은 못
가드라도 지미봉이나 두산봉쯤 갈 테지?

 

 



● 2003년 1월 1일 06시 00분

내 휴대 전화기의 신호음이 들린다. 진드르를 지날 때였다.
"누구요? ……. 아! 노영심 씨! ……. 김양순 씨하고?" 이 군이 주춤하더니,
신촌 입구 갈림길에서 옆으로 차를 세운다.
"김양순 씨가 왔대요?" 하더니, 이 군이 갑자기 내 전화기를 뺐는다.
"아! 여보세요. 저 이백양인데요. 거기 변 총무 안 보입니까? …….
아까 어떤 차가 출발하더라구요? ……. 양순 씨는요?"
여기서 내가 전화를 뺏어들고 차근차근 안내를 했다. 둘 중의 한 분이 차를 몰고
내가 안내하는 대로 찾아오라고. 함덕을 지나 첫 번째 네 거리 말고 두 번째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오면 된다고.

김양순 씨라면 오름을 같이 다니다가 말없이 중단한 분이다. 차는 다시 움직이고
이 군이 묻는다.
"양순 씨 온대요?"
"그래 오고 있어."
"누구 차로 오나요?"
"노영심 씨!" 안도하는 눈빛. 직감이 적중했다.
이 녀석이 양순 씨하고 뭔가 있구나. 이럴 때 다그치는 수밖에.
"백양 씨! 양순 씨와는 어떻게 된 거야?"
"며칠 전에 메일이 왔어요. 산에 데리고 가 달라고."
"이 미련한 사람아. 그래서 이곳으로 초청한 거야?"
"어떡합니까. 당장 시간은 없고."
"그렇다면 오늘은 단 둘이서 다른 오름에 갔어야지."
"너무 갑작스러워서 둘이 가자고 하기에는…."

다시 전화가 왔다. 오현고 앞이라고 하기에 진드르에서 일주도로로 가지 말고
오른쪽 길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 군이 김양순 씨가 동갑내기라고 티격태격하던
일이 생각나 얼른 "양순 씨는 시집 안 갔나?" 하고 물었다.
"못 간 모양입니다."
"그러면, 오름을 그만 둔 건 백양 씨 때문이었던 건 아냐?"
"아, 아뇨. 사귀는 사람이 생겨서지요."
"그래 말이야. 그래서도 이렇다 저렇단 말없이 그만 둔 걸 보면, 백양 씨하고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하긴 좀 심한 말은 했지요. 그 사람과 오름 중 하나를 택하라고."
이쯤에서 그만 두기로 했다.

차를 선흘 입구에 세우고 오는 대로 점검을 해보았다. 이상이 없어 다시 출발하며
늦게 오는 차량에 전화를 넣었더니 진드르란다. 빨리도 왔다. 마을을 다 벗어난 곳,
갈림길에서 왼쪽 만장굴과 비자림 간판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동쪽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온다. 하덕천 마을을 지나니, 눈앞에 목적지인 둔지봉이 우뚝하게 나타난다.
오름 옆구리에 다다라 오른쪽 억새가 늘어선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500m쯤
들어가서 다시 왼쪽 오름으로 난 비포장 길로 150m 진행한 뒤 차를 세우고 인원을
점검, 올려보내고 이 군과 남는다.



(둔지봉의 가을 모습)

● 2003년 1월 1일 07시 00분

해가 뜨는 시각은 대충 7시 35분 전후. 정상까지는 약 15분이 소요되니, 15분까지만
출발하면 된다. 아차 하는 동안에 뒤차는 입구를 지나쳐 버렸다. 다시 돌아 오라
이르고는 이 군과 대화를 나눈다.
"양순 씨하고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 있나? 진작 잘하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지금 나이에 찬밥 더운밥 가리게 됐나요?"
"거 말고 솔직히 양순 씨가 마음에 차냐고?"
"………."
"이 사람아! 맘에 들지 않으면서도 급하다고 그냥 사귀다 문제가 되면 모임이
깨지는 수도 있어."
"…솔직히 저에게 양순 씨가 과분하지요."

여기서 말을 끊었다. 7시 10분. 날씨가 이제 환해졌다. 뒤차는 하덕천으로 와야
되는데 상덕천으로 가서 한참 헤매다가 제 길을 찾아오는 중이다. 내가 상하를
구분 않고 그냥 덕천이라고 했기 때문에 혼동한 것이다. 행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이 군만 기다려서 모시고 오라하고는 먼저 오름으로 향했다. 날이 밝았으나
구름 때문에 붉은 기운은 덜하다. 뒤를 돌아다보며 15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아래서 지금 막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정상엔 우리말고도 두 팀이 더 와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 섞여 있어 나를 보고 인사를 한다.

추워서 모두 바람을 피해 가져온 차를 후후 불며 마시다가 다시 부어 권한다.
아침을 안 먹고 왔기 때문에 떡이나 주먹밥을 가져온 사람, 컵라면에 물을 부어놓고
기다리는 사람 등 구구각색이다. 아래서 세 사람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한 사람이 앞장서고 두 사람이 조금 떨어져 걷는 모습이 아무래도 노영심 씨가
앞장서고 둘이는 뒤쳐진 것 같다. 송순주를 따고 한 잔 가득히 부어 오름나그네
선생님께 올렸다. 처음에는 한 해 무사고를 비는 제(祭)를 지냈지만 지금은 나그네
선생님께 술 한잔 따라 붓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해의 모습을 보리라고는 출발 당시부터 기대하지 않아서, 몇 번 경험한 회원들은
그런 대로 무덤덤했으나 처음 온 사람들은 실망의 빛이 역력하다.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해가 뜬 다음이라도 꼭 그 모습을 여러분들에게 보일 것이라고 위로하고
곡차 한 잔 들이켰다. 해는 이미 떠올라서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우도 남쪽 바다에
빛을 폭포처럼 쏟고 있다. 남쪽으로도 조그만 한 줄기 폭포. 드디어 도착한 세 사람을
맞고 인사를 나눴다. 양순 씨도 오래된 회원들에게는 알려져 있는 터라 서먹해 하는
사람들에게만 소개됐다.



(작년 둔지봉 일출의 모습)

○ 2003년 1월 1일 07시 50분

이제는 해가 뜬지 이미 15분이 지났다. 작년에는 그래도 한 20분 뒤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으나, 오늘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말없이 앉아 동쪽 일출봉
너머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양순 씨 옆에 서서 다름 사람들의 눈총 때문에
다가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이 군에게 의미 있는 눈짓을 하고는 일행을
불러모았다. 모처럼 찬란한 태양을 기대하고 왔다가 실망한 빛이 역력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기 위해서다.
나의 궤변은 해가 바로 떠오르는 날까지 계속될 것 같다.

"여러분! 오늘 2003년 첫 태양이 떠오르는 날, 이런 신성한 곳에서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태양은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미
찬란하게 떠올라 저 구름 뒤에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 현상으로 조물주의
섭리이지, 우리가 부정했거나 잘못해서 못 보는 것은 아닙니다. 불가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이라 하였듯이, 설령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이는 순간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우러러 자기 소원을 말하고 가족의
건강을 빈다든지 나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실망한 채로
그냥 돌아가서야 되겠습니까?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원하는 만큼의 소망을
담은 태양을 그려 가슴속에 품고 갑시다."

모두 박수를 치면서 천천히 제 자리로 돌아간다. 순간 지긋이 감았던 이 군의 눈가에
무언가 언뜻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속에 어떤 환희가 넘치는 듯 연신
떠오른 미소를 감추질 못했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둘이 같이 세우느라 혼났다. 용기를 내었는지 좀 떨어진 곳에서 둘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꽤나 좋아 보였다. 이제는 긴장에서 풀려 가져온 음식과 술을 꺼내 나눠 먹고
있는 데도 둘만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다른 팀들이 가버리고 요기도 되었으니,
바쁘지 않은 사람들은 아부오름을 들러가기로 한다.


○ 2003년 1월 1일 08시 30분

아부오름 표지석이 서있는 오름 입구 목장 정문에 다다랐다. 정월 초하루임에도
불구하고 가축을 돌보고 돌아가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만났다. 평소 같으면 못
들어가게 할 터인데, 새해 첫날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싸우기에 지쳤는지 문단속을
부탁하고 가버린다. 인원 조정 관계로 다른 차로 도착한 내가 차에서 내리자
먼저와 있던 이 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가선다. 양순 씨가 같이 타고 온 노영심
씨가 일이 있어 먼저 가는데, 동행했던 의리를 지키느라 가버렸다고 울상이다.
바깥 날씨는 새벽보다 더 차고 찬바람이 낯을 얼얼하게 만든다.

표고는 301.4m지만 비고는 51m밖에 되지 않아 아부오름은 쉽게 오를 수 있다.
몇 년 전 오름에 철탑 설치 반대 운동을 하면서 이곳 2,012m의 둘레에 인간 띠
잇기 행사에 참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이곳 분화구에 영화 '이재수의 난'을
촬영하기 위해 세트를 세웠던 적이 있다. '이재수의 난'은 흥행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숨겨진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줌으로써 촬영지마다 관광객들이 몰려다니게 만들었다.
결국 많은 제작비를 들여 이정재와 심은하를 동원해다가 제주도를 홍보하는 영화를
찍은 꼴이 되고 말았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힘을 내라고.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쟁취할 수 있다고
얼른 전화를 하라고 채근했다. 직접 전화하기가 무엇했는지, 휴대 전화기를 꺼내
엄지손가락을 몇 번 꼼지락대더니, 나에게 보여주고는 얼른 발신을 한다. '사랑해
양순씨 오후에 오름 데려다 줄게.'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용기를 내었습니다. 이제 다시 만나보니, 양순씨야말로 내 짝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편안하고, 뭔가 가슴이 가득합니다."
"그런 걸 갖고 전에는 만나면 티격태격 했어?"
"지금 생각하니, 뭔가 통하면서도 동갑내기여서 자존심 싸움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상대가 먼저 무릎꿇기를 요구하는…."
"그래서 오늘은 항복했다 이건가? '짐이 이김(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드니 바로
그게 정답이었구먼."

몇 분이 되지 않아 둘이서 정상에 다다랐을 때, 이 군에게서 메시지 신호음이 들렸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 보고는 "얏호!"를 외치며 능선 위로 뛰어올라가 펄쩍펄쩍 뛴다.
내가 다가서자 자랑스럽게 메시지를 보여준다. '나도 사랑해 백양씨 빨리 와.' 그새
이것들이? 정말로 젊음이 부럽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새해 아침이었다.
"선생님! 저것 보세요. 저 분화구에 세상에서 제일 큰 태양이 떠있네요. 주례 설
생각이나 하세요!" 하며 분화구 속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어간다.
한 가지에 미치면 모든 게 그런 쪽으로만 보인다드니.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분화구 속에는 정말 크고 젊은 숲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