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악천후를 뚫고 강행한 답사

김창집 2006. 12. 18. 07:39

--- 탐문회 애월읍 방어유적 답사기

 

 

* 벌써 피어 우리들을 반긴 고내봉 입구의 수선화

 

♧ 눈보라 속 스물여덟의 용사들

 

 2006년 12월 17일 일요일 9시. 이미 전국의 산악 지대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져 있었고, 제주산간 지방에도 눈 때문에 교통이 통제된 상태였다. 그래도 우리는 갔다. 이미 계획된 답사였고 다음 주로 미룰 처지도 못되었다. 철저히 마음의 무장을 다짐하는 가운데도 차는 서쪽 애월읍을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유적지들은 바로 우리가 사는 고장 곳곳 험하지 않은 이웃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차 속에서의 사전 교육. 제주섬은 과거 절해고도였던 관계로, 쓰시마섬(대마도)을 근거지로 한 해적들이 무수히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온갖 것을 다 약탈해 갔다. 섬사람들은 자구책으로 그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1개의 읍과 2개 현에 성을 쌓았다.(3성) 그리고, 섬을 돌며 아홉 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성으로 둘렀다.(9진) 섬을 한 바퀴 돌며 오름에는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했고(25봉수), 해안가 언덕은 요지마다 연대(煙臺)를 설치하여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적의 침입 여부를 알렸다.(38연대)

 

 첫 답사지는 수산봉수였다. 버스에서 내려 저수지 둑길에 들어 섰을 때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귓사대기 후려치는 눈보라를 뚫고 걸어가는 긴 행렬이 마치 1. 4후퇴 때 피난민 같았다는 친구의 후담(後談)이다. 첫눈을 온몸으로 막으며 학구열을 불태운 용사들의 이름을 여기에 적어둔다. 고시홍 좌연선 김대훈 박윤택 정경화 부택환 김광남 안금자 송정숙 이영순 장성천 현병훈 서흥선 이복자 김영태 김봉선 김인홍 홍효정 김복자 김복천 백광우 황대원

 

 

* 햇발이 비칠 때 얼른 찍은 기념사진에선 음양이 나타나고

 

♧ 수산봉과 수산봉수(水山熢燧)

 

 수산봉(물메)은 애월읍 수산리 산 1-1번지에 자리한 해발 121.5m, 비고 92m, 둘레 1,612m, 넓이 193,204㎡, 저경 525m의 원추형 오름이다. 오름 남동쪽 기슭에 수산저수지가 있고 남서쪽 사면에는 충혼묘지가, 동쪽사면 중턱에는 대원정사 원천사(법화종)가 자리 잡고 있다. 오름은 원추형이나 정상부가 평평하게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산정에 원형화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오름 정상에 제주성 소속의 봉수대가 있어 동으로 도두봉의 도원봉수(道圓烽燧)에 서로는 고내봉수(高內烽燧)에 응했다고 한다. 별장 6인과 봉군 24명이 교대하면서 24시간 근무했다. 오름 전사면에 해송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고, 남쪽기슭에는 지방기념물 제8호인 곰솔이 있다. 애월읍 구엄리 일주도로변 남쪽의 수산유원지를 끼고 있는 오름으로 예전에 봉우리 위에 자연연못이 있어서 물메(물미)오름이라 불리고 있다.

 

 눈보라 속 기나긴 둑을 지나도 여전히 눈발은 그치지 않고 어둑하다. 곰솔 앞에서 첫눈을 맞는 기분을 즐기자고 너스레를 떨며 눈이 그치기를 기다린다. 오름 남쪽 양지녘에 강씨 입도조 무덤이 있고 그 옆에 마을제를 지내는 제단이 자리잡았다. 철새 몇 마리가 호수에 한가히 떠도는 고즈넉한 풍경이다. 그냥 돌아가자며 내려가는데 눈이 거짓말처럼 그친다. 이왕 온 거 현장을 보고 가자며 절 옆길로 구불구불 올라가 군부대 안에 자리한 봉수터를 철조망 너머로 보고 내려왔다.   

 

 

* 멋진 파도를 찍으려 했는데 이 정도밖에 안되었다

 

♧ 남두연대(南頭煙臺)를 찾아 해안도로로

 

 다음 찾은 곳은 해안도로에 있는 남두연대. 하귀로 차를 돌려 해안도로로 진입하여 바닷가에 이르니 하늬바람이 휘몰아쳐 파도가 장관을 이룬다. 갑자기 차 유리창에 김이 서려 차를 세우고 닦는다.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 파도는 말로 이루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장쾌하였다. 이동 중 몇 곳에서 파도가 넘쳐 차 위로 부딪쳐서 차가 녹슬까봐 기사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눈 내리는 모습과 장쾌한 파도를 찍어 내보내지 못하는 것이 이제 와서 한이 된다.   
 
 연대(煙臺)란 옛 군사적 통신수단으로 적의 침입이나 위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을 사용하여 인근 마을이나 군대가 있는 곳에 빠르게 연락하던 시설이다. 봉수(烽燧)와 차이점은 해변의 비교적 높은 지대에 설치하며 통신과 방어를 담당하는 반면 봉수대는 산 정상에 위치해 통신을 담당하는 점이다.

 

 남두연대는 현재 애월읍 신엄리 2780-1번지 속칭 남두리 해안도로변에 있다. 애월진에 소속돼 있었는데, 시도기념물 제2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대의 규모는 상부 6.3m×6.4m, 하부 7.9m×7.6m, 높이 3.9m이며, 해안절벽 위 지금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 연대마을의 조부연대(藻腐煙臺), 서쪽으로 애월연대(涯月煙臺)와 교신하였다.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을 배치, 6교대로 24시간 동안 해안선을 지켰다. 

 

 

 * 온전하게 남아있는 남두연대의 모습

 

♧ 애월진성(涯月鎭城)의 자취

 

 남두연대를 보고 나서 계속 파도를 즐기며 해안도로가 끝나는 애월포구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렸다. 바로 도댓불이 있었는데 옛 돌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새로 커다란 돌들을 깨어 번듯하니 세워놓은 것을 보며 너무나 한심스러운 작태를 한탄한다. 애월진성은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유적 9개의 진성(鎭城) 중 하나로 지금 그 자리에는 애월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서쪽으로 향한 학교 후문 남북 쪽으로 각각 30∼40m 정도 성채가 남아 있어 미약하나마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는 '애월성은 애월포구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549척, 높이가 8척이고, 남쪽과 서쪽에 성문이 있다.' 그리고, 방호소(防護所)로서의 애월소에는 '성안에 객사와 군기고가 있다.'고 적었고, 수전소(水戰所)로서 애월포에는 '판옥전선이 1척, 비상양곡이 3석, 격군 118명, 사포 21명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건물이 들어서고 하물머리의 아래쪽도 정리되어 있지만 북서쪽에 남은 성의 돌담은 아름답고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 촘촘하게 박힌 돌이 아름다운 애월진성의 일부

 

 탐라순력도에 '애월조점'(涯月燥點)이 있는데 애월진의 군기를 점검하는 내용이다. 1702년 11월 14일. 명월진성에서 출발한 이형상 목사 일행은 애월진에 도착하여 기나긴 순력의 마지막 밤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밑에 쓰여진 내용을 보면 지방관으로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 조방장 남해거(南海擧) 등이 배석하여, 성정군 245명과 진성의 군기(軍器)와 집물(什物), 목자와 보인 181명, 말 1,400필을 점검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다른 그림에 비해 간략히 그려져 있는데, 북쪽으로 객사와 부속 건물, 남동쪽으로는 군기고, 가운데 원장을 설치해 놓고 밖으로는 5소장쯤에서 몰고 왔을 말을 매어놓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 밖의 것으로는 남서쪽으로 치우친 사장(射場)의 과녁과 남서쪽으로 애월리의 민가가 그려져 있다. 고내포(高內浦)와 민가가 그려진 점도 특이하다.

 

 

* 고내봉에서 만난 좀작살나무의 고운 열매

 

♧ 고내봉과 고내봉수(高內烽燧)

 

 차에서 내린 일행은 오락가락하는 눈발을 뚫고 고내봉으로 갔다. 입구에서 일찍 핀 수선화가 우리를 반겨준다. 고내봉은 애월읍 고내리 산 301번지에 자리한 해발 175.3m, 비고 135m, 둘레 3,240m, 넓이 739,484㎡, 저경 1,140m의 원추형 오름이다. 크고 높은 주봉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봉 서쪽이 방애오름, 남쪽이 진오름, 남서쪽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는 것이 너분(넓은)오름이라고 따로 불리고 있다.

 

 오름을 돌아가며 산줄기가 뻗어내려 가장자리마다 잡목이 우거지고 골들이 패어 있는 복합형 화구를 이루고 있으며, 오름 '말물'의 중턱에 보광사(조계종)가 있고, 정상부의 공동묘지를 출입하는 포장도로가 오름 능선까지 개설되어 있다. 요즘은 산책로가 개설되어 오름을 종단할 수 있다. 또한 이 오름은 2종류의 구성물질로 이루어진 매우 드문 형태의 오름으로도 유명하다. 오름 북사면(바다쪽)과 그 골짜기에는 수중화산 쇄설성 퇴적층의 노두(路頭) 단면이 잘 발달되어 있다.

 

 왼쪽 경사가 심한 산책로 입구를 지나 오른쪽 절로 통하는 길로 들어갔다. 아직 지지 않은 나뭇잎과 빛이 고운 좀작살나무 열매가 눈에 띈다. 보광사 옆을 지나면 곳곳에 무덤이 있고, 소나무 숲을 지나 주봉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주봉 정상의 봉수대 터는 간판이 안보일 정도로 가시넝쿨과 잡초가 우거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차게 만든다. 애월진성에 소속된 이 봉수는 북동으로 수산봉수(水山熢燧), 남서로 어도오름의 도내봉수(道內烽燧)와 교신했었다. 별장 6인과 봉군 24명이 교대하면서 24시간 근무했다.

 

 

* 온전하게 남아 있는 애월연대의 모습


♧ 애월연대(涯月煙臺)를 보고 점심


 점심시간이 다가왔음으로 고내봉에서 내려오면서 도치돌가든에 점심을 시켜 도착하면 따뜻하게 먹도록 해두고 가는 길에 애월연대를 들렀다. 애월연대는 애월읍 애월리 1975번지 속칭 한담동 동쪽 연디왓에 자리잡고 있다. 애월진에 소속돼 있었으며 시도기념물 23-17호로 지정되었다. 동쪽으로 남두연대(南頭煙臺), 서쪽으로 귀덕연대(歸德煙臺)와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이 배치되어 교대로 24시간 동안 해안선을 지켰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소나무를 서너 그루를 배경으로 의연하게 버텨 서서 어느 한 곳 흠집도 없이 옛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았다. 다만 바닷가인데도 알루미늄 판으로 세워놓은 안내판이 부식된 모습이 눈에 거슬릴 뿐이었다. 가운데 오래된 송악이 박혀 벽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멋있었으나 혹 제초제를 뿌린 듯 시들해져 있는 게 안타까웠다. 주위 밭에는 이곳 특산인 취나물이 심어져 있었고, 골목 울타리엔 사철나무 열매가 빨간 씨를 물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도치돌가든에는 우리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은 전골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추위에서 들어온 일행은 모두 포근함을 느꼈고, 후배인 이곳 사장이 우리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간천엽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환한 유리창 너머로 눈은 또 한 차례 펑펑 쏟아져 술맛을 당기게 했다. 시간도 충분하여 눈이 그칠 때까지 정과 한담을 나누었다. 인사 소개를 시키며 감사했으나 다시 한 번 도치돌가든 사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 어도봉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연못

 

♧ 어도오름과 도내봉수(道內烽燧)  

 

 어도오름은 애월읍 금성리 22번지 일대에 자리 잡은 해발 143.2m, 비고 73m, 둘레 2,329m, 넓이 376,225㎡, 저경 747m의 북향으로 벌어진 말굽형 오름이다. 어도 오름은 동서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 봉우리가 정상이고, 이 곳에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명월진 소속의 이 봉수는 동으로 고내봉수(高內烽燧), 서로는 느지리오름의 만조봉수(晩早烽燧)에 응했다고 한다. 별장 6인과 봉군 24명이 교대하면서 24시간 근무했다. 서쪽 봉우리의 남서 중턱에 도림사(법화종)가 있으며 그 한쪽에 '절새미터'라는 샘이 있다. 

 

 소화를 시킬 겸 곧바로 오르지 않고 비스듬히 산책하듯 오름에 올랐다. 수확하고 난 밀감나무 옆으로 지나가며 이삭을 주어 먹으니 자연히 디저트가 되었다. 삼나무와 해송이 주종인 잡목림과 그곳을 개간하여 심어놓은 밀감나무 사이로 가끔 막혀있는 가시덩굴을 뚫고 정상에 오르니, 분화구는 넓게 개간되어 밭을 이루고 있었다. 가운데 못이 있고 그 주위엔 따지 않은 호박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동쪽 봉우리 정상에는 봉수터에 무덤을 써놓았다가 최근에 이장해 갔다. 오늘 세 곳의 봉수터를 찾았으나 제대로 남은 곳은 하나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우리의 문화재를 대하는 주민들의 의식이 이 정도이고 보면 더 할 말을 잃는다. 오는 길에 납읍리 금산에 들렀다. 금산공원은 난대림지대로 후박나무, 참식나무, 종가시나무, 동백나무 등 상록수 150여 종이 있고, 침엽수와 활엽수 등이 자연석과 어울려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 1966년 10월 천연 기념물 제 182-4호로 지정되었다.  
 

 

* 어도봉수가 있었던 어도봉의 정상 부근

 

♧ 하가리 설촌마을 돌담길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하가리 연화못 아래에 위치한 마을 골목이다. 1960∼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사라져버린 수많은 마을 설촌시의 돌담길, 문화재청은 그 중 아쉬운 대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는 도서지역 6개 마을에 원형대로 남아 있는 '돌담길'을 문화재로 10월 14일에 등록한다고 예고했다. 추가로 문화재가 되는 마을 돌담길은 제주도 하가리 설촌마을, 산청 남사마을, 청산도 상서마을(완도군), 부여 반교마을, 흑산도 사리마을(신안군), 비금도 내촌마을(신안군) 6곳이다.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설촌마을 돌담길은 제주 특유의 다공질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밭담과 마을 안길 돌담이 도합 10여㎞ 정도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지난 10월 24일 발표된 한국의 문화상징 100선에는 제주도에 해당되는 것으로 돌하르방, 해녀와 함께 제주의 돌담이 선정되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생각한 만큼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으나 곳곳에 아름다운 돌담 원형이 보인다. 특히 오래된 팽나무가 짝을 이뤄 돌담에 붙어 있는 것들이나 나무와 울타리의 어울림, 원형대로 보존된 곳곳의 골목길, 그리고 밭담들이 정겹게 남아 우리를 반겼다. 때맞춰 반짝 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내밀어 기념사진 촬영을 재촉한다. 악천후를 뚫고 아무런 사고나 불평 없이 잘 따라주어 답사를 재미있게 해주신 어르신들과 못 말리는 회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수고해주신 회장님과 관계자 여러분, 기사님께도….   

 

 

* 무화재로 지정된 하가마을 어느 골목길

 

♬ 모닥불 - 박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