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촌리 4·3 희생자 합동위령제 및 기념관 시공
2007년 2월 6일 오전 11시, 조천읍 북촌리 속칭 너븐숭이에서 '북촌리 4.3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있었다. 너븐숭이 일대는 1949년 1월 17일 4·3사건으로 300여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며, 4·3을 처음으로 널리 알린 현기영의 '순이삼촌'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날 김태환 제주특별도지사와 김영훈 제주시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주민들의 모두 모여 합동 위령제를 열었다.
북촌리 유족회 고만옥 부회장의 '초혼(招魂)'으로 시작된 위령제에서는 김석보 유족회장의 '고유문', 유족회 부회장 이성범의 '경과보고'에 이어 북촌리 김영수 이장의 '주제사'가 있었다. 김태환 도지사는 '추도사'에서 "4·3의 해결과 평화의 섬 정착은 우리 제주의 평화 브랜드를 떠받치는 양 기둥"이라고 전제하고, "지난 해 4·3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4·3평화인권재단 설립과 희생자 유족 범위 확대, 문화예술 축전 시행과 평화공원 조성에 박차를 가해 나가겠다."고 했다.
이어진 양대성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장의 추도사에서는 "한 동안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리며 사건 발생 30년간 무장대가 와서 다 죽인 것으로 기록하여 사건의 실체를 뒤바꿔놓은 역사 왜곡의 현장을 교육의 장으로 바꾸는 사업으로 '유적지를 정비하고, 기념관과 위령탑 그리고 문학 기념비를 세우는' 첫 삽을 뜨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 날 기공식을 가진 사업계획을 보면, 너븐숭이 일대는 1949년 1월 17일 4·3사건으로 300여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며, 4·3의 아픔을 알리는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의 장소이기에 4·3유적지로 정비하여 후세들의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키 위함에 목적을 두고 위령탑, 기념관 89평, 문학기념비, 주차장 시설 등 국비 1,579백만원을 들여 2007년 11월 21일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옴팡밭에 마련된 행사장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
♧ 초혼(招魂) - 북촌리 유족회 부회장 고만옥
지금으로부터 58년 전 음력 섣달 열아흐렛날을 전후하여 평화로운 이 땅에 국가 공권력에 의하여 억울하게 희생되어 숨져간 479위 영령들을 위로하고, 가신 님들이 쌓인 한과 훼손된 명예를 회복해 드리기 위하여 유족들의 정성을 모아 이곳 역사의 현장 북촌리 너븐숭이에 이 제단을 마련했습니다.
북촌리와 4·3사건 희생자 북촌 유족회가 제주(祭主)가 되어 이 제단(祭壇)에 향(香)을 피워 엎드려 간절히 청하오니, 영령들이시여! 저희들이 작은 정성이나마 받아주시고 강림하옵소서.
* 1948년 동짓달 열엿새 북촌낸시빌레에서 돌아가신 23위 영혼님!
* 동짓달 스무여드렛날 북서모 벼랑 끝에서 돌아가신 영혼님!
* 12월 19일 이 학교 마당을 중심으로 동쪽의 당팟, 서쪽으로 너븐숭이에서 돌아가신 영혼님!
* 12월 20일 한덕으로 소개되어 희생당한 영혼님!
* 주정공장을 거쳐 육지부 형무소로 가서 행방불명된 영혼님!
* 경찰서 유치장에서 감금생활을 하다가 끌려가서 사라진 영혼님!
* 이 외 밝혀지지 않은 제주섬 도처에 잠들고 계신 영혼님!
479위 영혼님이시여!
정성으로 마련한 이 제단(祭壇)에 강림(降臨)하시어 흠향(歆饗)하옵소서!
* 쉼터로 변한 너븐숭이 학살터
♧ 고유문 - 유족회장 김석보
다시 한 해가 저물어 섣달 열아흐렛날이 돌아왔습니다. 엊그제 같아도 60년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차고 매섭게 불던 바람은 따뜻한 바람으로 바뀌어 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 2006년 병술년 음력 섣달 열아흐렛날 4·3 당시 처참했던 자리 정돈하고 억울하게 희생당하신 4·3사건 희생자 479위를 제단에 모시고 헌화 분향하고 제향하오니 기쁘게 흠향하소서.
이 마을 유족을 대표한 김석보는 삼가 고하나이다. / 영령들이시여!/ 4·3사건으로 인하여 피비린내 나던 제주땅은 고통과 슬픔의 4·3희생자의 죽음이 헛되지 않아 4·3특별법이 통과를 보고 평화의 섬으로 지정이 되어 전 세계로 평화의 메시지가 퍼져 나가고 있으며, 특별자치도로 탄생되어 비약적인 발전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과거 통치권자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통령으로부터 사과도 받았습니다. 이제 특별법 개정안이 행자위원회를 통과하고 정기국회도 통과되었습니다. 지난 1월 24일에는 정부에서 이 법을 공포함으로써 사망자와 행방 불명자, 수형인과 후유장애인, 생활고에 시달리는 유족까지 범위가 확대되고 주변의 참여도 증가되어 위령사업도 활발하게 될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479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제단도 때가 추운 겨울인지라 야외에서 올리지 못하고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이렇게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빗돌을 세우고 님들의 넋을 위로하며 서천꽃밭으로 가도록 기원하고 세계 평화 발상지로 거듭나도록 밝히려 하고 있습니다.
영령들이시여!/ 이곳 너븐숭이 위령성지는 영령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고 영원불멸의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노여움을 푸시고 영면(永眠)하소서! / 아름답게 마련한 이 위령공원에서 가신 님들의 위안의 꽃밭을 훌륭하게 꾸밀 것입니다. 옷깃을 여미고 삼가 고하나이다.
* 많은 희생자를 냈던 옴팡밭 옆 너븐숭이
♧ 희생 동기 및 경과 보고 - 유족회 부회장 이성범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무자년(戊子年) 평화로운 제주도에 4·3사건이 발생하여 산폭도니, 미친개니, 검은 개, 노랑 개니 하는 호칭을 붙이며 우익(右翼)과 좌익(左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해방되었으나 나라의 질서가 정리되지 못한 시국이었습니다. 주민들은 경찰관이나 군인을 보면 몸서리치던 시절이었으며, 주민의 무장봉기(武裝蜂起)와 군경의 무력진압은 많은 희생자를 낳게 하였습니다.
1948년 6월 어느 날, 경찰관을 실은 소섬 배가 제주시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이 마을 포구로 입항하여 정박(碇泊)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당시 경찰관 2명이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이 같은 사고가 발생하자 군경은 살해한 범인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매일같이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북촌은 폭도 마을로 지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동짓달 열엿샛날에는 조직된 민보단원 중에서 젊은이 23명을 가려내어 속칭 난시빌레에서 살해하였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월 17일에는 군인이 타고 가는 트럭에 무장대가 총격을 가하여 2명이 군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를 이유로 주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 시켜놓고 총살하기 시작하였으며, 300여 가옥을 남김없이 불지르고, 학교 동쪽으로 몰고 가 죽이고, 서쪽으로 끌고 가 죽이고 한 것이 300여명이나 희생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이튿날 집을 잃고 옷을 잃고 먹을 것을 잃은 주민들은 군인의 명에 의하여 함덕리로 소개(疏開)되었습니다. 함덕으로 소개된 후에도 한 사람 한 사람 신분을 조사한답시고 또 가려내어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한편 젊은 남녀들은 들키면 잡아 죽였기 때문에 모두 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경토벌대는 산에 오른 사람들을 마을로 내려오게 하기 위하여 "귀순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용서하여 살려준다."는 전단을 살포하였습니다.
* 애기무덤과 임자없는 작은 무덤이 흩어져 있는 학살터
전단을 보고 귀순하자 이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서 처치해 버렸습니다. 당시는 교통이나 통신이 두절된 상태라서 그 행방을 알 길조차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디론가 끌려나간 사람들은 경찰서로 끌려가고, 주정공장을 거쳐 육지부 형무소로 또는 비행장 부근에 집단으로 매장시키고 바다에 수장(水葬)하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몇이나 죽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숨죽여 5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마을에서는 언젠가는 세상에 4·3의 진상이 규명되리라는 일념에서 박칠성 이장 당시인 1993년 원로에 회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피해상황을 조사하였습니다. 그 피해 상황을 요약해보면 당시 호수(戶數) 323호에서 인명 피해 호수 207호, 무피해 호수 116호이며, 피해 희생자수 479명 중 남자 298명, 여자 141명이며, 소각(燒却) 가옥 동수가 591동이 조사되었습니다. 그 외 학교 7개 교실, 가축 522두, 선박 13척이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인명과 재산 피해를 당했어도 피맺힌 한을 풀지 못했으며 합동위령제라도 지내고자 하였지만 시행하지 못하다가 2000년 5월 1일 뜻 있는 유족들의 제안에 따라서 시행의 뜻을 모았습니다. 북촌 유족회가 결성이 된 것은 이성범 이장을 중심으로 발기인이 되어 동년 5월 16일 김석보를 회장으로 하는 유족회가 창립했습니다.
이후 2000년 11월 24일에는 제주경찰서 왜곡사건으로 규탄대회 증언대에 나서기도 했으며, 2003년 2월 16일 본회 정기총회에서 위령제 행사를 결의함에 따라 2003년 4월 5일 민예총에서 주관하여 위령제를 행하였으며, 2004년 1월 19일에는 479위 합동위령제를 처음으로 제주특별자치도 도지사와 지역 기관장들이 참석하에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재작년까지 유족회가 주관이 되어 거행하다가 작년부터는 북촌리가 주관이 되어 금년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간 위령제를 학교 교실을 이용하면서 불편한 형편을 당국에 진정을 하고 위령공원 조성을 청원 한 바, 이를 받아들인 당국에서 오늘 위령제를 겸하여 유적지 기념관 착공식을 갖게 되었음을 보고 드립니다.
* 해풍의 영향으로 한쪽으로 쏠린 이웃 동복리 어느 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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