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왕이메, 그리고 그를 닮은 괴수치와 돔박이오름

김창집 2001. 11. 16. 20:40

2001년 7월 22일 일요일
¤비 몇 방울 뿌리고 맑았다 흐렸다


▲정말이지 내려오고 싶지 않았던 왕이메

2002 월드컵 서귀포경기 유치를 위하여 서부산업도로는 고속화도로로 거듭난다. 이를 위해 길 넓히기 공사가 왕이메로 가는 길을 어질러 놓았다. 금년 음력 정월 대보름 들불 축제의 향연을 벌였던 새별오름 조금 건넌 곳에서 왼쪽 묵은 길로 벗어나, '나인 브리지 골프장 입구'라고 임시 세워 놓은 나무 널빤지 안내판을 따라 포장도 되지 않은 임시 도로 300m 정도를 들어가서, 화전동 입구로 나 있는 포장도로로 진입할 수 있었다.

효명목장 입구를 지나 다시 300m나 달렸을까. 왕이메로 진입하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비를 후드득 뿌린다. 비가 올 것을 전혀 예측 못한 차림들이라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는데, 이 비는 '여우비'라고 곧 개일 것이니 그냥 가도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그리 깊은 산도 아니고 내도 없는 곳이라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 모두 내려 배낭을 챙긴다. 옛날 탐라국의 삼신왕이 이곳에 와서 사흘동안 기도를 드렸다고 하여 오름 이름을 왕이메라 하였다는 알쏭달쏭한 전설을 찾아가는 것이다.

잠시, 비는 멎어버리고 입구 쪽에서 빵긋 웃는 하늘말나리 떼를 만난다. 합쳐 15그루나 될까. 나무 그늘 아래로 펼쳐진 새빨간 꽃의 행렬은 우리들의 왕이메 입성을 환영하는 듯 부는 바람에 고개를 흔들어 반갑게 맞는다. 철조망 2개를 넘어서니 곧 오솔길이다. 오른쪽에 삼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고 왼편 오름 쪽으로는 잡목이 무성하다. 그 중에는 다래 줄이 엉켜 있어 혹시 다래가 달리지 않았을까 살펴본다. 고려 속요 '청산별곡(靑山別曲)'에 나오는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의 머루와 다래를 좀처럼 먹어볼 수 없다는 회원들이 많아 다래가 열렸는지를 확인해 두기 위해서다. 그러나, 해걸이를 하는지 그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가는 곳마다 청미래덩굴이 길을 막고 있다. 지금 이 시기에 엄청난 속도로 자라는 이 식물은 보기와는 달리 백합과에 속한다. 양지(陽地)를 좋아하며 가시 돋은 굵고 딱딱한 뿌리줄기가 꾸불꾸불 뻗치기 때문에 오름 오르는데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비가와도 속이 젖지 않아 과거 산에서 밥을 지을 때는 곧잘 불쏘시개가 되기도 했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1cm 정도의 빨간색인데 먹기도 하며 요즘 들어 꽃꽂이 소재로 쓴다. 어린 순을 데쳐 나물로 먹는데, 곳에 따라 '명감' 또는 '망개', 제주도에서는 '맹게'라 부르고, 부산 등지에 가면 그 둥근 잎사귀에 떡을 싸서 파는 '망개떡'이 있다.

오솔길을 약 500m 가서 왼쪽을 잘 살피면, 작은 길이 나 있다. 삼나무가 너무 빽빽하여 어두컴컴할 정도다. 너무 빽빽하게 붙어있어 그 그늘에서 탄소동화작용을 못한 나뭇잎들이 전부 말라죽었다. 요즘 들어 이 길이 통행량이 많은지 많이 파여 있다. 오름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고사리 산지로 알려져 이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모양이다. 깊이 100m가 넘는 분화구(제주말로 굼부리)를 갖고, 면적이 709,179㎡나 되기 때문에 나무가 우거진 이곳 왕이메는 노루가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다. 그래 날씨가 추운 날 이곳에 오면 노루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컹컹' 울부짖는 소리를 내어 항의하기도 한다.

다시 300m 정도 오르니, 벌써 분화구로 내려가는 입구다. 이곳에서 산등성이를 돌든지 아니면 분화구로 내려가든지 둘 중의 한 코스를 선택해야 한다. 이 곳 왕이메에 처음 온 회원들이 눈앞에 펼쳐진 황홀한 풍경에 입을 다물 줄 모른다. 한 여름의 짙푸른 나무와 풀이 커다란 그릇에 가득 하여 보기만 하여도 넉넉하다. 산비탈 곳곳에 지다 남은 자귀나무 꽃이 그런 대로 도드라져 보인다. 분화구로 들어가는데 하루가 다르게 뻗친 가시덩굴들이 양쪽에서 쉽게 속살을 보이지 않으려는 색시처럼 가는 길을 막는다.

분화구 바닥에 도착하였어도 키를 넘는 고사리와 풀들이 앞으로의 진행을 더디게 한다. 봄이나 겨울에는 이 풀들을 소나 노루가 다 먹고 쉽게 바닥을 드러내 고사리 꺾기나 달래 캐기에 도움을 주는데, 오늘은 막무가내다. 할 수 없이 분화구를 가로질러 남서쪽 나무 그늘로 비스듬히 정상엘 오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앞장서 걷는다. 분화구 구석에 양하 무더기를 발견했다. 생강과의 아열대 식물인 양하는 음력 8월에 이르러 꽃봉오리가 춘란(보춘화)처럼 뿌리 사이에서 뾰족이 고개를 내밀면 '양하간'이라 하여 향긋한 나물이 된다. 간(肝)과 같은 모습에다 귀하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산나물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 제주도에서도 인기 있는 식품이다. 인기 있다기보다 시골집에는 초가집 주변이나 채마밭에 심어 순도 따먹고 추석 때는 이 채소를 꼭 올려야 하는 집안도 있다.

돌무더기를 지나 드디어 큰 나무숲으로 기어오르니 바람은 안 통했으나 그런 대로 쉴 만하였다. 모두 앉아 물을 마시며 목을 추기는데 우리가 가는 곳으로 철늦은 뻐꾸기가 울어댄다. 오늘 듣는 저 소리는 손에 잡힐 듯 아주 가까이서 들린다. 문득 워어즈 워드의 '뻐꾸기에 부쳐'란 시가 생각났다. "오, 유쾌한 새 손(客)이여!/ 예 듣고 지금 또 들으니/ 내 마음 기쁘다./ 오, 뻐꾸기여!/ 내 너를 '새'라 부르랴,/ 헤매이는 '소리'라 부르랴?// (중략)// 지금도 들판에 누워/ 네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라치면/ 황금빛 옛 시절이 돌아온다." 나이 든 지금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꿈 많던 젊은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뛴다던 시.

남쪽 진짜 정상엔 삼나무가 너무 빽빽하게 심어져 있어, 나무가 없는 동쪽 동산으로 나무 밑을 기어올라 드디어 사방이 확 트인 곳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누빈 숲이며 사방의 오름이 멀리 가까이서 짙은 초록빛을 한없이 토해내고 있다. 다른 바람과 달리 그 숲을 거쳐오는 바람은 풋풋하고 싱그러워 한없이 상쾌하다. 하루종일 이곳에 앉아서 그 동안에 찌든 눈을 깨끗이 씻어내고, 허파에 싸여 있는 먼지들을 맑은 공기로 날려보내 온 몸 구석구석에 맑은 피로 돌게 한다면, 그 빛은 붉은 빛이 아니라 짙은 초록색이 되리라. 정말이지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족은왕이메로 불리는 괴수치와 돔박이

묵은 길을 돌아 다시 공사중인 서부산업도로로 나와 서쪽으로 10분쯤 달린 뒤 왼쪽으로 난 산록도로로 접어든다. 얼마 안 가 왼쪽으로 난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그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괴수치와 돔박이를 찾아간다. 왕이메는 덩저리가 크고 높은 곳에 앉아 있기 때문에 어른처럼 보이고 족은왕이메로도 불리는 괴수치와 돔박이는 아래쪽에 웅크리고 있어 새끼 두 마리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이 부근엔 목장을 개간해서 감자를 심는 곳이 많은데, 섣불리 농사를 짓다 보니 잡초 밭이 되어버려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바랭이와 쑥, 여뀌가 밭을 온통 뒤덮었고 감자는 어디 있는지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간혹 하나둘 살아남은 것은 풀에 영양분을 뺏겨 누렇게 떠 있다. 망초와 개망초도 어지간히 꽃을 피웠는지 더러만 남고 지금은 씨가 되어 바람에 풀풀 날린다. 중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 김 매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런 산간 지역에는 주로 콩을 심게 마련인데, 제일 뽑기 힘든 것이 바랭이와 쑥이었다. 마른 장마라도 질 때면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지열과 하늘로부터 내리쬐는 햇볕으로 하여 온 몸은 멱을 감는다. 신발을 벗었기 때문에 체감 온도는 더욱 오르게 마련이었고, 연신 흘러내리는 땀이 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따갑다 못해 아리기까지 한다.

바랭이는 마디마다 뿌리가 돋아 흙을 잔뜩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일을 더디게 하고 쑥발은 여기저기 뻗쳐 있어 쳐내려고 하다보면 콩이 자주 뽑혔다. 점심을 먹고 나면 졸리기는 왜 그리 졸리는지. 이 때를 놓칠 소냐, 목청 좋은 아주머니가 선창을 하여 '사대'라는 '김매는 노래'를 불러 졸음을 쫓았다. "어긴 여랑 사대로다/ 사대 불렁 요 검질 매자/ 앞 멍에랑 들어나 오라/ 뒷멍에랑 물러나 가라 / 검질 짓고 굴너른 밭듸 / 사대로나 우기멍 매자."

오름 입구 삼나무 그늘에서 좀 쉬고 나서 표고 558.7m의 괴수치오름을 오른다. 괴수치오름과 왕이메 사이에는 고압선 송전 철탑이 이어져 오름의 부드러운 곡선을 망치고 있다. 길을 넓히면서 함께 땅속으로 전선을 묻어 지중화 시키면 얼마나 좋으랴만 그저 일하기 쉽게 하느라고 군유지나 국유지로 그냥 마구 밀어 올린다. 오름엔 소나 노루가 좋아할 부드러운 풀이 새로 돋아나 있고 억새도 간간이 보인다. 억새꽃이 피면 제법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리라.

정상을 돌아 능선을 탈 때였다. 그런데, 일행 중 한 사람이 무심코 풀숲을 밟는 바람에 잠자고 있던 노루가 화들짝 놀라 분화구 속으로 냅다 뛰어 달아났다. 얼마나 빠른지 눈 깜짝할 새에 굼부리로 가 숨어버린다. 깔데기 모양의 분화구에는 남쪽으로 짙은 가시덤불 숲을 이루고 있어 쉽게 숨을 수 있었다. 보통 한여름에는 노루가 한라산 기슭 또는 백록담까지 올라가서 사는데 정말 이외다. 이곳에 노루가 곤히 자고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낮잠을 깨운 것도 미안하지만 노루의 영역을 무단 침입한 것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다.

정말이지 아담한 오름이다. 둘레 400m, 깊이 30m의 이 분화구에 물이 차 있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북서쪽으로 내려 돔박이오름으로 향했다. 곳곳에 가시덩굴이 많아 쉽게 나가기 힘들다. 무덤이 있어 어렵게 접근하여 비석을 살펴본 즉 '고소초악(古小草岳)' 또는 '고수치악(高秀峙岳)' 등 한자의 음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고 있다. 자세한 내력을 밝힐만한 근거도 없고 거기에 따른 전설 같은 것도 없어 이 이름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다행히 길을 찾아 다시 돔박이오름을 오른다. 표고 521.4m, 둘레 956m인 아담한 풀밭 오름이다. 비록 요즘은 풀이 많이 자라 좀 거칠긴 해도 그 이름처럼 예쁜 동백 열매를 연상시킨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어 머리는 따가웠지만 푸른 숲을 지나오는 바람은 그야말로 서느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술패랭이꽃이 분홍색으로 곱게 피어나 짙은 초록 풀잎 속에서 빛난다. 풀이 너무 자라있어 앉기에 불편해도 그런 대로 둘러앉아 남은 캔 맥주를 얼음에 풀어 마셨다.

오늘의 산행은 며칠 간의 장마 속 불볕 더위로 찌든 여러 중추 신경들을 싱싱하게 되살려 놓았다. 사그라져 가던 몸 속 에너지도 충분히 재충전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동안 상실할 뻔했던 삶의 의욕이 펄펄 되살아난다. 앞으로 일주일간은 어떤 더위가 와도 끄덕 없을 것이다. 아, 점심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사진 위는 '하늘말나리', 아래는 지난 음력 정월 대보름날 불꽃 축제를 벌였던 '새별오름'(양영태 찍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