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한라산 눈꽃 축제에 붙임

김창집 2001. 11. 14. 19:10

△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 1100 도로

20여 년 전 새내기 교사 시절, 고3 학생들에게 만해 선생의 <임의 침묵>을 가르칠 때였다. 그 해설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봐도 도무지 이해를 해주지 않아 난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국어 사전에 나온 대로 '반야경(般若經)에 있는 말인데, 유형(有形)의 만물인 색(色)은 모두 인연의 소생(所生)으로서 그 본성은 공(空)이라는 뜻'이라고 말해 알아들으면 좋겠지만, 불교에 대해 이렇다 할 상식도 갖지 못하고, 어휘력도 그렇게 썩 뛰어나지 못한 편인 학생들에게는 아무리 예를 들어 설명해 봐야 신통치 못했다.

그런데, 오늘의 1100 도로 행은 '색즉시공'의 예를 확실하게 해주었다. 여느 때 같으면 몇 번이고 이곳을 지나치면서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을 터인데, 오늘만은 유별났다. 환상적이란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이름이리라. '상고대'라 하던가. 이 말은 '초목에 내려 눈같이 된 서리'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건 숫제 나뭇가지마다 눈이 녹아 흐르다가 얼어붙었다. 그 모습이 각양각색인데다 가지의 생김새나 색깔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야말로 눈과 바람과 지형과 기온이 순간적으로 만나 조화를 부린 종합 예술품이라고나 할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란 말을 실감했다.

음지냐 양지냐, 햇빛이 비칠 때냐 아니냐에 따라 옥이 되었다가 자수정으로 변하고 에메랄드가 된다. 아니, 바다 속 깊은 곳에 끝없이 펼쳐지는 백산호 숲이었다가, 햇살이 비칠 때는 만개한 벚꽃 터널을 이룬다. 솔가지가 얼어 고드름이 달린 모습도 이채롭고, 어떤 나뭇가지는 생김새나 색이 축읏이(*조금도 틀리지 아니하고 들어맞게) 순록의 뿔이었다. 더욱이, 이삭이 잘려 나간 억새 무더기는 마치 눈 속에 피어난 미기록종 설란(雪蘭)을 보는 것 같다.

살을 에이는 듯 차가운 바람에도 망아지 모양 겅중겅중 뛰며 조금의 경치도 놓치지 않으려는 일행들을 보면,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바람이 불어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청정한 가을밤 주렴(珠簾) 부딪는 소리가 되어 심연 깊숙한 곳까지 메아리 친다. 정말 오늘의 이 정경을 나의 짧은 글재주로 어찌 다 그릴 수 있겠는가. '말해도 몰라 봐야 알지'를 무섭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 소형 차량이 통제되고 있어 이곳에 오지 못하고 노꼬메 입구에서 홧김에 소주잔이나 기울이고 있을 남은 일행들에게 이 광경을 못 보여 주는 것을 아쉽고 미안하게 생각하며, 모두(冒頭)에 언급한 <색즉시공>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 왔다. 즉, 내가 보았던 모든 현상들은 순간적인 인연에 의해서 나와 만났던 것이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으로 지속될 것도 아니다. 따뜻한 한 줄기 햇빛이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 현상을 어찌 공(空)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겁(劫)이란 시간에 비하면 100년도 찰나(刹那)가 아니던가.


△개인 사정으로 산에 가지 못해, 저번 다녀온 것을 편집해 싣습니다. jib17@daum.net

*** 사진은 삼각봉 아래쪽에서 찍은 한라산 정상 바로 아래 왕관능과 그 주변의 설경(雪景)입니다.(양영태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