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법정이오름'과 '각시바위'의 전설

김창집 2001. 11. 16. 20:10
[2001년 8월 5일 흐림]

△ 법정이[法井岳], 벌거벗은 자연

: 마른 장마 20여일, 열대야 10여일…. 오늘도 여전히 푹푹 찔 것 같다. 모이는 장소 오바 앞에 이르니 7명,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단다. 나의 몫으로 남겨 두었단다. 그럴 줄 알고 나오면서 곧장 법정이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대로 의견을 제시했다. 숲이 있고 계곡이 있고…. 오늘 같은 날은 '딱'이 아닌가. 지금 법정이는 휴양림으로 개발되어 산림조합에서 여름 한철 운영한다.
: 제2횡단도로로 달려가 1100도로를 지나 영실 입구도 그냥 지나치고 다시 10분 정도 달리니, 서귀포시 휴양림 후문이 나타난다. 이용료는 승용차 3천원, 사람은 천원이다. 오름 가는데 돈 내보긴 처음이다. 길을 너무 번드레하게 빼고 포장해 놓아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그런가. 아예 트럭에 가마솥을 비롯해서 잔치를 치를 정도의 그릇들을 싣고 와서 무엇을 삶아 먹으려는지 설치고 있다. 주차장을 따로 마련해 놓았는데 이건 날라 다니기 싫어 바로 길옆에 주차했다. 그래, 숲은 휴양림이기보다는 오일장터를 연상시킨다.
: 개발을 하드라도 주차장은 입구에 설치해야지. 숲에 차의 매연을 흘려 모처럼 휴양 나온 사람에게 산에서 오염된 공기를 마시게 하다니. 아침부터 좀 긍정적인 생각을 하자고 생각하고 포장된 숲길을 따라간다. 숲 속 비비추가 막 피어나 그 맑은 보랏빛 꽃잎을 수줍게 내밀었다. 산딸나무는 잎사귀 위로 동글동글 열매를 솟아 올리는데 반해 때죽나무는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꽃도 그렇게 피더니.
: 언젠가 회장이 오름 10년을 다녔는데도 그 흔한 머루와 다래를 제대로 못 봤다는 푸념을 들은 것이 생각나 모처럼 소나무에 오른 다래 줄기를 쳐다보니, 그리 크지 않은 줄기인데도 주렁주렁 매달렸다. 일행을 불러모아 그것을 구경시키며 고려 속요 '청산별곡(靑山別曲)' 1절을 들려준다.“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모처럼 기분이 되살아난다.
: 다래나무는 원래 한국·일본·중국·우수리·사할린·쿠릴열도 등 극동아시아에 분포하는 덩굴식물인데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가져다가 양다래인 키위로 품종 개발을 한 뒤 다시 원산지로 역수입되는 과정을 거쳤다. 깊은 산의 나무 밑에서 나서 다른 나무에 기어올라 자라는 식물이다. 열매는 난상 원형(卵狀圓形)으로 10월에 황록색으로 익으며, 열매는 맛이 있다. 다래주는 비타민C와 타닌 등이 함유되어 피로 회복·강장·보혈·진정·불면증 등에 좋다.
: 물놀이터에 다다랐다. 근데 아무리 휴양림이지만 이 계곡을 그냥 물놀이터로 개발했을까? 이 물은 도순천으로 흘러가면 강정천에 합쳐져 서귀포 서부지구 식수원이 되는 상수원이 아닌가. 차라리 따로 풀장을 만들었어야지. 이곳을 물놀이터로 만들다니. 물가 바위에 앉아 쉬기로 했다. 정말 경치도 좋고 물도 좋다. 비록 가물어서 폭포는 졸졸 흘러내리는 수준이지만…. 그런데, 누구의 아이디어로 이곳까지 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내고 포장했을까? 인간이 숲을 개발한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지, 원.
: 법정이에는 아직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더러 있었다. 곳곳에 붉은 사철란이 꽃대를 밀어 올리고, 옥잠란은 꽃이 져서 열매를 매달고 있다. 숲 속 산책길에는 곳곳에 비닐 끈을 매어 놓아 오히려 어색하다. 냇가를 따라 나 있는 오솔길은 비가 많이 오고 난 뒤에 오면 여러 곳에 폭포를 이루는데,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맛 또한 일품이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는 좋은 경치와 물이 있는 곳에 절이 있었는 바, 이곳에 법정사(法井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 법정이라는 이름은 이 절 이름에서 연유한다.
: 해발 760m 정상에는 어떤 시설이었는지 모를 석축을 쌓아 무대처럼 만들어진 전망대가 있어 사방을 조망(眺望)하기에 그만이다. 한라산 정상 쪽에는 비가 오는지 천둥소리가 들리고 구름이 몰려 있어 그 멋진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운해(雲海) 아래로 드러난 방애오름과 영실, 볼레오름의 진면목이 나타나고 바로 앞에 다래오름과 민머루가 손에 잡힐 듯하다. 서쪽으로 보이는 건 이름이 아름다운 거린사슴과 그 건너로 보이는 녹하지악 그리고 멀리 군산과 산방산이 어울렸다.
: 동쪽 시계가 완연한 곳까지 사이에는 어점이와 시오름, 그리고 미악 아래로 각시바위가 선녀머리를 한 채로 우리를 부른다. 그 자리에서 다음 갈 곳을 그곳으로 정했다. 이곳에서 서귀포 해안을 바라보는 것은 절경 중의 절경이다. 동쪽으로부터 콧등처럼 오똑 솟은 제지기오름 너머 밋밋한 지귀도(地歸島). 다음이 바위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섶섬이다. 섶섬에는 천연기념물 18호 파초일엽 자생지가 있다. 그 다음 바로 천지연 앞 새섬과 문섬, 바로 앞에 보이는 건 범섬이다. 범섬은 범의 웅크린 모습을 하고 있는데, 9월 9일 제주섬 기행 때 가기로 예정돼 있다.

△ 서글픈 전설(傳說)을 간직한 각시바위

: 산을 내려온 일행은 흘린 땀에 대한 보충을 하기로 했다. 범섬으로 가는 포구가 있는 법환리로 가다가 2002 월드컵 경기장을 한창 짓고 있는 현장 바로 서쪽에 있는 식당에서 탕(湯)이랑 삼계탕이랑 입맛대로 시키고 나서, 길 건너에서 날아갈 듯이 지붕이 멋있는 경기장을 구경하였다. 다시 16번 중산간도로로 올라와서 지금은 서귀포 시민의 산책 코스가 되어버린 고근산 아래서 동쪽으로 5분 정도 거리 '용천사' 입구로 난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선다.
: 사방은 온통 귤 과수원이다. 다시 5분 정도 달려가 절 입구에서 왼쪽 밭으로 난 길로 접어들어 차를 세웠다. 이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모퉁이를 돌아 무덤 한 자리가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머루 줄기가 보여 자세히 보니 머루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아직은 익지 않아 보기만 해도 입속에 침이 고인다. 주위에 알려 이것이 머루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은 머루와 다래 다 보여줄 수 있어 뜻 있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숲 입구에서 으름까지 볼 수 있었다.
: 밤나무에는 밤송이들이 제법 모양을 갖추고 있어 벌써 여름이 다 지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늘에 있는 겨울딸기들도 꽃봉오리를 제법 부풀리고 있다. 이곳은 제주도에서도 몇 안 되는 겨울딸기 군락지이다. 겨울딸기는 제주도·일본의 서부지역 섬들·타이완·중국의 난대 등지에 분포하는 장미과의 낙엽활엽 덩굴성 관목으로 숲 속의 그늘을 좋아한다. 열매는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빨간색으로 익는 보기 힘든 산딸기이다.
: 소나무나 삼나무, 밤나무, 대나무 등 사람이 손에 의해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나무숲을 지나면, 구실잣밤나무를 주종으로 참식나무, 참가시나무, 붉가시나무, 돈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정상의 바위 부분을 감싸고 있다. 오름 북면 한라산 쪽으로는 완만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해, 바다 쪽 남사면은 세 가닥 등성마루 뻗어내려 급한 절벽을 이루고 있어 정상 바위에 오르면 위험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탁 트인 서귀포 해안과 섬이 발 아래로 펼쳐진다.
: 우뚝하게 솟은 바위 봉우리는 해발 395m로 산방산과 같은 높이이나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오르기는 쉽다. 바위는 조면암질의 용암원정구로 제주도 생성 초기에 솟아난 제지기오름, 섶섬, 문섬, 범섬과 연결되는 제주도 남부해안의 용암원정구대를 이룬다. 주봉을 중심으로 양 날개를 펼친 듯이 뻗쳐 있어, 학이 날아와 앉은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에 학수바위[鶴首岩]로도 부른다. 더 오를 곳도 없는 숲 속 확 트인 봉우리에 앉아 슬픈 전설을 듣는다.
: …옛날 이 부근 어느 마을 부잣집 젊은 며느리가 몸에 태기가 없어 고민을 하였데. 양반 집안인데다 삼대 독자라 후사(後嗣)를 잇기 위하여 아기를 낳아야 되는 일은 급하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잖아. 그런데 혼인한 후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아기를 얻지 못하니 걱정이 아닐 수 없었지. 그러자, 집안 식구 모두 모여 의논한 끝에 절에 가서 백일 기도를 드리기로 결정했데. 그래서 찾아든 곳이 바로 지금 이 바위가 있는 호근리 북쪽 한라산 중턱에 있던 절.
: 며느리는 목욕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불공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단다.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시일이 지나는 사이에 며느리는 무언지 모를 확신이 생기며 마음 든든해졌어. 그러면 그럴수록 더 열심히 불공기도를 드렸고.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 며느리는 그만 그 절 몹쓸 스님에게 몸을 빼앗기고 말았어. 깊은 밤, 외따로 떨어진 절에서 어쩔 수 없이 당하기는 하였으나 생각할수록 분통하고 어이없는 일이었지.
: 더구나 귀한 가문의 대를 이으러 이 산중에까지 와서 이 불공을 드리는 처지로서 생각할수록 난감한 일이었어. 그렇게 고민을 하는 중 여자의 몸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태기를 느끼기 시작하였던 거야. 반가운 임신이었지만, 그 아기가 바로 그 스님의 아기인 것을 생각하면 죽고 싶을 뿐이었지. 하루, 이틀 날이 갈수록 괴로움은 더 하기만 하였고, 기약된 백일의 날짜는 다 지나갔어.
: 여자는 백일을 지내고 절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절 아래에 있는 이 동산에 올라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자신의 잘못과 짓궂은 운명을 통탄하며 밤새껏 울다가 자진하여 죽어 버렸거든. 그런데 그 여자가 죽자 얼마 안 되어 그 자리에 지금과 같은 이상한 바위가 생긴 거야. 그것을 후세 사람들은 바로 그 여인의 원통한 넋이 바위로 화한 거라고 이 곳을 각시바위로 부르게 되었다는 거야….

△ 사진 위는 '좀비비추', 아래는 '각시바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