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거린악과 동수악[2001. 6. 10.]

김창집 2001. 11. 26. 21:00
▲오늘은 봉래산(蓬萊山) --- 거린악(巨人岳)

지난 3월초
경칩(驚蟄) 전날 들렀을 때는
개골산(皆骨山)*이러니
오늘은 봉래산(蓬萊山)**

입구에서부터 만난 복분자(覆盆子)딸기
한방(韓方)에서 강장제(强壯劑)로 쓴다 해서
요강을 엎어버릴 정도의 정력을 기대하기보다
그저 요강을 엎어놓은 듯이 익은.

오늘 우리 열여덟 사람의 발걸음을
붙잡아 쉽게 놓지 않은 것들은 복분자 말고도
늦게 솟아오른 고사리와 가시두릅
그리고, 청미래덩굴순과 죄피나뭇잎.

하여 산은 우리에게
늘 넉넉히 베풀고는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
하며 오지랖을 벌린다.

내를 따라 울창한 숲을 가다가
발견한 나도밤나무 서너 그루
여기서 무슨 화낼 일이 있는지
잎사귀에 선연한 핏발을 긋고 섰다.

앞서 간 일행들이 둘러서서
무엽란(無葉蘭)을 감상하고 있다.
저처럼 작고 가느다란 줄기에
잎사귀도 없이 피어난 향기라니.

어디 무엽란 뿐이랴.
보물찾기하듯 찾은 난초들
은대난초, 옥잠란, 큰잎란, 보춘화
거기다 맑게 피어난 수정란풀.

이번 중국 산둥성에 가보니
한무제(漢武帝)가 등주(登州)에 와서
신선산을 보려다 산은 못 보고
경치가 좋다고 봉래(蓬萊)라 이름을 고쳤다는데

와서 이런 경치를 봤다면
무엇이라 이름했을 건가.
한계령에 만물상, 거제도에 소금강
그 못지 않은 기암괴석의 행렬

가파른 작은 봉우리를 향해
새 길로 허위허위 올라
정상, 백년은 묵었을 구실잣밤나무 아래서
신선인양 차를 마셔본다.

더 배울 것이 없어
하산하는 도인(道人)처럼
더 바랄 것 없어 내려오다 본
희귀식물 나도은조롱.

다시 오른 표고 532.7m의 큰 거린악 정상에서
새로이 개척해 내려온 숲길
꾸불꾸불 뻐꾸기를 벗해 삼림욕하며 걸은 거리가
3km는 좋이 되리니….

[주]*개골산 : 금강산의 겨울 이름.
**봉래산 : 금강산의 여름 이름.

▲숲 터널의 연장선상(延長線上) --- 동수악(東水岳)

서귀포와 남원읍 사이
공천포란 조그만 포구가 있는 마을
그 곳 조그만 음식점
제주도 물회 맛의 원조(元祖)라고 해야 하나?

한겨울엔 해삼 물회도 좋고
솔라니* 물회는 더욱 좋고
여름이면 한치, 자리, 갑오징어 물회
오늘은 쫄깃쫄깃 씹히는 소라 물회

거기다 한라산 소주 한잔 곁들여
바다 한번 바라보고 한 모금
앉은 사람들 얼굴 둘러보며 한 모금
낮술 취해서는 안 된다고 찔끔찔끔

제1횡단도로를 통과하여
제주시로 오는 길
누가 명명(命名)했는지
다시 망령이 살아나는 5·16도로

과거 섬사람들을 먹여 살리다
지금은 천덕꾸러기가 돼버린
귤나무밭 과수원길을 한참 달리다 보면
소리없이 이어지는 구실잣밤나무 숲

물오름 위 수악교(水岳橋)를 지나면서
시작되는 숲 터널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인가
원, 이걸 베고 길을 넓히려 하다니.

다시 논고악 옆에 위치한
논고교(論古橋)로 이어지는 숲 터널을
더 오르다
동수교(東水橋) 못 미쳐 차에서 내린다.

오른쪽으로 난 숲 속
오솔길을 따라
한 15분 걸었나
숨바꼭질하듯 찾은 동수악

사방에 죄피** 향 가득하고
가끔씩 천남성에 섞여
건드릴 때마다
피어나는 곰취 향기

숲 속의 빈 터
분화구라는 제주말 '굼부리'
하늘 환하게 뚫린 환상(環狀)의
환상적(幻想的)인 원의 중심에 서면

산상 호수가 세월이란 시간 앞에
무릎 꿇은 늪지
발을 굴러도 빠지지 않을 만큼 변해버린
그래 시시각각 조여 오는 숲의 포위망에 가슴 죄며

그 때 섬을 태우던
활화산(活火山)의 불길로
치솟아 버리지도 못하고
이름으로나 남을 '동쪽 물오름'.

다가오는 2002 월드컵
축구 경기라도 한번 치를 정도로
매끈한 풀밭이 돼버린 분화구엔
이것저것 가리지 않은 솔비나무가 들어섰다.

표고 꼭 700m 되는 꼭지점을 찾으러
봉우리를 한 바퀴 돌다
숲의 터진 틈으로 만난
논고오름의 웅자(雄姿)에 압도당해

슬며시 숲길로 내려섰는데
오, 너 이 숲의 주인
오색딱따구리 열심히 집 짓는 소리
하산하라는 지상의 명령.

[주}*솔라니 : 서귀포·남군 지역에서 '옥돔'을 부르는 이름.
**죄피 : 향신료로 쓰는 '초피나무'의 제주말. 자리 물회에는 이 잎사귀를 넣어야 제맛이 난다.

<사진> 위는 거린악 계곡, 아래는 거린악에서 찍은 사진으로 제일 앞의 동수악, 왼쪽은 논고악, 오른쪽은 성널오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