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바위 얼굴'을 떠받치는
열살 때부터 살기 시작한 우리 집 마당에서는
한라산 정상인 부악(釜岳)이
'큰 바위 얼굴'처럼 다가서고
노꼬메 형제가 그를 받치고 있다.
피라밋처럼 쌓아올린 봉우리로부터
오른쪽으로 슬며시 휘어지는데
왼쪽으로는
족은노꼬뫼가 받치고 있다.
내가 커서 저 다니엘 호오손의
'큰 바위 얼굴'이 되리라 마음먹었을 적엔
언감생심(焉敢生心)
여길 오르리라고 꿈이나 꾸었겠는가.
그러나, 이제 갑남을녀(甲男乙女) 되어
작은 것이 참 행복이라는 걸 알면서부터는
한라산도 즐겨 오르고
노꼬메도 자주 들른다.
올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간직하였다가
언제나 넉넉한 자세로
가슴 깊숙이 끌어안는
봄여름가을겨울 언제 올라도 좋은 오름이여!
▲온통 푸르러진 산의 모습
어렸을 적 이곳 883.8m의 큰노꼬메엔
정이월 눈이 녹아 풀릴 때쯤
산불이 피어올라 혀를 낼름거렸는데
오늘 이 넓은 오지랖에는 노루 가족이 모여 산다.
언제부터 저희들이 주인이라고
종처럼 줄줄이 매달아 놓은 때죽나무꽃이
후두둑 놀라 떨어질 정도로
캥캥거린다.
숲에다 두릅가시와 산초가시를 감춰놓고
향기만 솔솔 풍기는데
선밀나무 순 선 채로 인사를 하고
청미래덩굴 엉킨 채 반가워한다.
숲 못 미쳐 찔레와 윤노리나무 꽃
숲 속에 감춰진 쪽동백과 산딸나무 꽃
푸르름 속에 더 하얗게 빛나는
그들만의 잔치를 엿본다.
제주조릿대의 키가 작아지고
소나무 숲을 막 통과할 즈음
눈앞에 펼쳐지는 넉넉한 숲
그 속으로 메아리지는 푸르름이여!
△ 넋 놓고 바라보는 구름의 잔치
한라산을 가운데 우뚝 세워 놓고
주변으로 펼쳐지는 오름과 벌판
동쪽으로 구름이 흘러나와
족은드레오름과 어승생악을 감싼다.
구름이 점점 다가오더니
어느덧 눈앞 족은노꼬메에 걸려
얇은 사(紗)로 두른 치마처럼
나풀거린다.
다시 벌판을 기어 모르는 사이에
서쪽으로 슬슬 이동
큰바리메와 족은 바리메에 중턱에 걸린 채
잠시 사진작가들 앞으로 포즈를 취한다.
이 오름이 산 북쪽에서는 제일 크다는데
그 위엄으로 구름을 부리나 보다.
정상 서쪽 자락에 걸린 벌초 안한 두 무덤
매일 이 구름의 조화를 보았을 터.
어디 흐르는 구름만 구름이랴.
남쪽으로 펼쳐진 초록 숲
오름의 능선 따라 피어나고
뻐꾸기 노래 따라 흘러간다.
▲족은노꼬메를 향하여 내려가는 길
이름도 고운 애월읍 유수암리 산138번지
해발 774.4m에 앉은 키 124m의 족은오름을 향하여
부석부석 조릿대를 헤치며
가파른 길을 내려간다.
노루가 닦아놓은 숲길을 따라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너와 나는 지금
길 찾아 헤매는 짐승.
천남성꽃 두루미 모습을 하고
족도리풀과 노루귀를 거느려
나무 밑을 서성이고
으름덩굴은 꽃을 피워 가을을 기약한다.
누구라 이 길목을 지키는 이 있어
사슴을 보았다고 말하는가?
<탐라순력도> '교래대렵(橋來大獵)'에
1702년 10월 11일 잡은 사슴 177마리.
언뜩언뜻 보이는 오름 정상은
가운데가 움푹 패인 것이
요염한 여인의 궁둥이모양
북서쪽으로 말굽형 화구를 이룬다.
작년에 그 많은 으름을 땄던
큰오름 족은오름 사잇길에 이르러
남쪽으로 향한다.
길은 끊어지는 듯 이어지고...
△노루와 꿩의 안온한 보금자리
숲이 끝나는 곳에
노루와 꿩의 보금자리
숲으로 둘러싸인
수만 평의 평평한 초원.
아늑한 이 보금자리에
박두진 선생의 '해'에 나오는 짐숭들을
워어이 워이이 모두 불러 한 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보내 봤으면...
꿩이 날아가 버린 풀밭 위에는
널려 있는 노루 똥 무더기를 따라
이제야 고사리가 한창이어서
말없이 한 줌씩 뜯어 반찬거리.
팥배꽃은 다 지고
숲으로 큰길이 나 있는데
어디로 가라는 길인지
나그네 발길은 어디로 돌리나.
△족은노꼬메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
중후한 중년 남자처럼
머리가 벗겨진 큰노꼬메를 바라보며
방향 따라 달라지는 오름의 모습을 감지하고는
족은 노꼬메로 향한다.
말나리가 승마, 박새, 한라돌쩌귀와 함께
어우러지는 숲길을 오른다.
종처럼 아래로 하얗게 매달린 때죽나무와
꽃받침 4개를 잎 위로 펴올린 산딸나무의 조화.
가끔 노가리와 비자나무가 섞이고
서어나무와 때죽나무가 늘어선다.
그 아래 이곳 저곳 뚫려 있는 오소리굴
야행성인데 발자국 찍어놓고 벌써 어디 마실갔나.
제주조릿대 가파른 계곡으로 남쪽 정상엘 오르다.
더워 땀이 비 오듯 흘러
전망의 아름다움은 버릴 수 없음이
아이러니런가.
정상 북쪽 그늘을 찾아서 쉬며
차를 마신다.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하는 얼굴들이
건강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내려오는 길
유난히 많이 핀 하얀 쪽동백 두 그루
그 옆에 2∼30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두릅나무를 발견하여 모두들 감탄.
굼부리에서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로 세로 누비며 하산한다.
언제나 이곳은 가파르다.
넘어져 기면서도 계곡은 아름답다.
잠시 나무 그늘 아래 쉬면서 듣는
흘러간 옛 노래
천둥산 박달재를 넘어 가는 길손이
다래넝쿨처럼 얽히고 설킨다.
겨우 빠져나온 가시터널 너머로
다시 찾은 옛길
그래도 오늘은 멋있는 산행이었다고
모두들 입을 모은다.
▲이번에 저는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지 답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5월 31일부터 6월 5일까지 5박 6일 동안 산동성 일대를 돌게 됩니다. 위해로 시작해서 영성, 석도, 봉래, 제남, 청도, 노산 등을 도는데 인터넷 접속이 되면, 그때그때 간단히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사진> 위는 천남성 꽃이고, 아래는 앞쪽이 큰노꼬메, 뒤가 족은노꼬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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