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 '1100 도로'에서
1998년 3월 22일 일요일 오전, 흐리고 쌀쌀하다.
20여 년 전 새내기 교사 시절, 고3 학생들에게 만해 선생의 '님의 침묵'을 가르칠 때였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봐도 이해해 주지 않아 난감하던 기억이 새롭다. 국어 사전에 있는 대로 '반야경(般若經)에 있는 말인데, 유형(有形)의 만물인 색(色)은 모두 인연의 소생(所生)으로서 그 본성은 공(空)이라는 뜻'이라고 알아들으면 좋으련만, 불교도 모르고 어휘력도 그렇게 빼어나지 못한 편인 학생들에게는 아무리 예를 들어 봐야 신통치 못했다.
그런데, 오늘의 1100도로 여행은 '색즉시공'의 예를 확실하게 해주었다. 그 동안 몇 번 이곳을 지나쳤는데도 오늘만은 유별났다. 환상적이란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이름이리라. '상고대'라 하던가? 이 말은 '초목에 내려 눈같이 된 서리'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건 숫제 나뭇가지에 눈이 녹아 흐르다가 얼어붙었다. 또, 그 모습이 가지의 생김새나 색깔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한랭전선이 통과하는 시간을 맞춰 눈과 바람과 초목이 순간적으로 만나 조화를 부린 종합 예술품이라고나 할까.
음지냐 양지냐, 햇빛이 비칠 때냐 아니냐에 따라 옥이 되었다가 자수정으로 변하고 에메랄드가 된다. 아니, 바다 속 깊은 곳에 끝없이 펼쳐진 백산호 숲이었다가, 햇살이 비칠 때는 만개한 벚꽃 터널을 이룬다. 솔가지가 얼어 고드름이 달린 모습도 이채롭고, 어떤 나뭇가지는 생김새나 색이 순록의 뿔이다. 더욱이, 이삭이 잘려 나간 억새 무더기는 눈 속에 피어난 미기록종 설란(雪蘭)을 보는 것 같다.
살을 에이는 듯 차가운 바람에도 망아지 모양 겅중겅중 뛰며 조금의 경치도 놓치지 않으려는 일행들을 보면,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바람이 불어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청정한 가을밤 주렴(珠簾) 부딪는 소리가 되어 심연 깊숙한 곳까지 메아리 친다. 정말 오늘의 이 정경을 나의 짧은 글재주로 어찌 다 그릴 수 있겠는가. '고랑(말해도) 몰라 봐야 알주'를 무섭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소형 차량이 통제되고 있어 이곳에 오지 못한 일행들에게 이 광경을 못 보여 주는 것을 아쉽고 미안하게 생각하며, 모두(冒頭)에 언급한 '색즉시공'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 왔다. 즉, 내가 보았던 모든 현상들은 순간적인 인연에 의해서 만났던 것이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으로 지속될 것도 아니다. 따뜻한 한 시간의 햇볕이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 현상을 어찌 공(空)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 왜 오르느냐고 묻거든 - '궷물오름'에서
1998년 3월 22일 일요일 오후, 역시 흐리다.
'한밝저수지'에서 원동으로 이어지는 산록도로를 따라 가다가 경마장 위 궷물오름 입구에서 1100도로로 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오름 나그네 일행들을 만났다. 잠시 나뉘어 있었는데도 석 달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다. 원망하며 서먹했던 것도 잠깐, 일행은 일정에 따라 새로운 마음으로 새 오름엘 오른다. 누군가가 말했지, 오름에 오르는 것은 산에 오르는 맛도 있지만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라고.
죽어 넘어져 반쯤 묻혀 있는 망아지가 얼마 전 있었던 꽃샘바람이 얼마나 혹독했는가를 일깨워 준다.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로 접어들어 궷물오름으로 향했다. 표고 597m의 나지막한 오름이다. 동쪽 사면(斜面)은 보리수와 청미래덩굴이 우거져 오르기 힘들었으나, 경계의 표시로 심어놓은 삼나무를 따라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아래로 경마장이 보인다. 주차장에 가득 세워져 있는 승용차들을 보니, 호주머니에 든 마권(馬券)을 만지며 손에 땀을 쥐고 있을 그들이 딱한 생각이 든다. 그들 중 십중팔구는 공기 좋은 야외로 나와 일주일 동안의 스트레스를 푼다고 변명할 테지만, 오히려 돈 잃고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확률상 훨씬 많을 것이다. 하긴, 세상일은 생각하기 나름이어서, 그들의 눈에는 오름 오르는 우리를 더 딱하게 여길지 모른다. '시간 허비하고 신발 헐리면서 오름에 오르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다리만 아프주.'라고.
정상 남쪽 사면에 제법 오래된 무덤이 있어 비석을 살피니, 오소장 '묘수악(猫水岳)'으로 되어 있다. 김종철 선생의 <오름 나그네>에 "자그만 암굴을 뜻하는 '궤'에서 흐르는 물이 있는 오름"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묘(猫)'는 '괴(고양이)', '수(水)'는 '물'의 훈가자(訓假字, 한자가 가진 뜻은 무시하고 그 훈만을 빌려쓴 글자)로 보아진다.
앞에 크고 작은 두 노꼬메를 바라보며 간단한 점심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늦어서일까. 김밥이 유난히 맛있다. 내려오면서 보니, 주위엔 온통 박새 순이 피어올랐다. 백합과 다년초인 이 식물은 깊은 산 습지에서 무리 지어 자라며, 꽃은 7∼8월에 연한 황백색으로 피어나는데, 강한 독성이 있으며 약용으로 쓴다. 나는 이 박새를 이 지역 '봄의 전령사'로 임명했다.
△ 자연 속에서 찾는 여유 - '문석이'에서 '동거미'까지
2000. 6. 18. 일요일. 여름 날씨치고는 그런 대로 쾌청.
이런 날은 탁 트인 오름을 오르며 땀을 빼면 개운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승용차에 나눠 타고 동부산업도로를 달린다. 지금 이 순간부터 속세의 무거운 짐을 모두 부려 놓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 우린 겉으론 태연한 것 같아도 저마다 가슴속을 후비는 사연들을 묻고 산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존심을 내세워 아옹다옹 다투며. 그래, 오름에 오르는 시간만큼은 이런 모든 것들을 맑은 공기로 씻어 버리자.
길섶 자귀나무가 꽃을 달기 시작했다. 콩과 낙엽 소교목인 자귀나무. 밤중에 잎이 접혀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독이 있다는데 분홍색 신비스런 꽃을 피운다. 어렸을 적엔 그 가지를 꺾어 잎사귀를 훑으며, 장난도 곧잘 했었지. 베트남 디안의 비둘기부대에 파견 근무를 할 때, 이 나무로 인해 알게 되었던 까만 눈을 한 소녀가 떠오른다. 지금쯤은 50대가 되어 있을…. 생각하면 허무(虛無) 그 자체다.
백약이오름 입구에 차를 세웠다. 철조망을 지나 벌판에 이르렀을 때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주위가 온통 초록 세상.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뻐꾸기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다. 이 새가 여름철새인 것도 모르고 봄의 전령사쯤으로 안다. 그래서, 봄 노래에 단골로 등장한다. 두견이과에 속하는 이 새는 5월에서 8월까지 우리 나라 전역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유럽과 아시아 등지의 아열대에서 북극까지 번식하며, 겨울에는 따뜻한 곳으로 옮겨 월동한다. 이 놈은 자신이 둥지를 틀지 않고 때까치, 멧새, 노랑할미새 등의 둥우리에 알을 위탁하여 포란(抱卵)과 육추(育雛)를 시킨다. 얌체다.
어느새 꿀풀꽃은 색이 바래기 시작했고, 엉겅퀴꽃이 한창이다. 문석이오름으로 올라간다. 해발 291m의 나지막한 오름인데 굽이굽이가 풍만한 여인의 몸이다. 서쪽으로 나지막이 아부오름이 자리했다. '이재수란' 촬영 때문에 유명해져 한바탕 난리를 치른 곳이다. 그래서 지쳤는지 축 늘어져 신음을 토하고 있다. 정상에 피뿌리풀 꽃이 하나둘 피어 분홍색과 흰색이 잘 어울린다.
동거미 서남봉에 올랐다. 남녘 좌보미를 바라보니 오름 오르는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오늘도 저 사람들의 발길에 몸살께나 앓겠지. 멀리 밭에서 김매는 여인네들의 모습이 아련한 추억을 부른다. 북서쪽 피라미드 같은 급경사를 바로 올랐다. 정상의 민들레꽃을 근거로 나비가 몰려들고 있었다. 제비나비 네 마리가 아직 짝을 정하지 못했는지 어우르며 하늘로 오르고, 호랑나비와 노랑나비도 덩달아 춤을 춘다.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못 보고 살았는지, 일상의 행동 반경에 정말 나비가 없었는지 실로 오랜만에 보는 놈들이다. 귀여운 것들….
*주 : 중국 답사에서 돌아와 아직 원고를 쓰지 못하여 대신 지난 것을 정리하여 이번 <교육제주>에 실릴 원고를 올립니다. 때문에 일부 중복이 된 것도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해상왕 장보고 중국 답사기'는 금주내로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답사 중 소식을 전하는 일은 아직 그곳의 인터넷 접속이 쉽지 않아 하지 못했습니다.
<사진> 위는 자귀나무와 꽃, 아래는 동거미오름, 그리고 멀리보이는 것은 백약이오름입니다.


1998년 3월 22일 일요일 오전, 흐리고 쌀쌀하다.
20여 년 전 새내기 교사 시절, 고3 학생들에게 만해 선생의 '님의 침묵'을 가르칠 때였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봐도 이해해 주지 않아 난감하던 기억이 새롭다. 국어 사전에 있는 대로 '반야경(般若經)에 있는 말인데, 유형(有形)의 만물인 색(色)은 모두 인연의 소생(所生)으로서 그 본성은 공(空)이라는 뜻'이라고 알아들으면 좋으련만, 불교도 모르고 어휘력도 그렇게 빼어나지 못한 편인 학생들에게는 아무리 예를 들어 봐야 신통치 못했다.
그런데, 오늘의 1100도로 여행은 '색즉시공'의 예를 확실하게 해주었다. 그 동안 몇 번 이곳을 지나쳤는데도 오늘만은 유별났다. 환상적이란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이름이리라. '상고대'라 하던가? 이 말은 '초목에 내려 눈같이 된 서리'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건 숫제 나뭇가지에 눈이 녹아 흐르다가 얼어붙었다. 또, 그 모습이 가지의 생김새나 색깔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한랭전선이 통과하는 시간을 맞춰 눈과 바람과 초목이 순간적으로 만나 조화를 부린 종합 예술품이라고나 할까.
음지냐 양지냐, 햇빛이 비칠 때냐 아니냐에 따라 옥이 되었다가 자수정으로 변하고 에메랄드가 된다. 아니, 바다 속 깊은 곳에 끝없이 펼쳐진 백산호 숲이었다가, 햇살이 비칠 때는 만개한 벚꽃 터널을 이룬다. 솔가지가 얼어 고드름이 달린 모습도 이채롭고, 어떤 나뭇가지는 생김새나 색이 순록의 뿔이다. 더욱이, 이삭이 잘려 나간 억새 무더기는 눈 속에 피어난 미기록종 설란(雪蘭)을 보는 것 같다.
살을 에이는 듯 차가운 바람에도 망아지 모양 겅중겅중 뛰며 조금의 경치도 놓치지 않으려는 일행들을 보면,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바람이 불어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청정한 가을밤 주렴(珠簾) 부딪는 소리가 되어 심연 깊숙한 곳까지 메아리 친다. 정말 오늘의 이 정경을 나의 짧은 글재주로 어찌 다 그릴 수 있겠는가. '고랑(말해도) 몰라 봐야 알주'를 무섭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소형 차량이 통제되고 있어 이곳에 오지 못한 일행들에게 이 광경을 못 보여 주는 것을 아쉽고 미안하게 생각하며, 모두(冒頭)에 언급한 '색즉시공'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 왔다. 즉, 내가 보았던 모든 현상들은 순간적인 인연에 의해서 만났던 것이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으로 지속될 것도 아니다. 따뜻한 한 시간의 햇볕이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 현상을 어찌 공(空)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 왜 오르느냐고 묻거든 - '궷물오름'에서
1998년 3월 22일 일요일 오후, 역시 흐리다.
'한밝저수지'에서 원동으로 이어지는 산록도로를 따라 가다가 경마장 위 궷물오름 입구에서 1100도로로 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오름 나그네 일행들을 만났다. 잠시 나뉘어 있었는데도 석 달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다. 원망하며 서먹했던 것도 잠깐, 일행은 일정에 따라 새로운 마음으로 새 오름엘 오른다. 누군가가 말했지, 오름에 오르는 것은 산에 오르는 맛도 있지만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라고.
죽어 넘어져 반쯤 묻혀 있는 망아지가 얼마 전 있었던 꽃샘바람이 얼마나 혹독했는가를 일깨워 준다.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로 접어들어 궷물오름으로 향했다. 표고 597m의 나지막한 오름이다. 동쪽 사면(斜面)은 보리수와 청미래덩굴이 우거져 오르기 힘들었으나, 경계의 표시로 심어놓은 삼나무를 따라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아래로 경마장이 보인다. 주차장에 가득 세워져 있는 승용차들을 보니, 호주머니에 든 마권(馬券)을 만지며 손에 땀을 쥐고 있을 그들이 딱한 생각이 든다. 그들 중 십중팔구는 공기 좋은 야외로 나와 일주일 동안의 스트레스를 푼다고 변명할 테지만, 오히려 돈 잃고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확률상 훨씬 많을 것이다. 하긴, 세상일은 생각하기 나름이어서, 그들의 눈에는 오름 오르는 우리를 더 딱하게 여길지 모른다. '시간 허비하고 신발 헐리면서 오름에 오르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다리만 아프주.'라고.
정상 남쪽 사면에 제법 오래된 무덤이 있어 비석을 살피니, 오소장 '묘수악(猫水岳)'으로 되어 있다. 김종철 선생의 <오름 나그네>에 "자그만 암굴을 뜻하는 '궤'에서 흐르는 물이 있는 오름"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묘(猫)'는 '괴(고양이)', '수(水)'는 '물'의 훈가자(訓假字, 한자가 가진 뜻은 무시하고 그 훈만을 빌려쓴 글자)로 보아진다.
앞에 크고 작은 두 노꼬메를 바라보며 간단한 점심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늦어서일까. 김밥이 유난히 맛있다. 내려오면서 보니, 주위엔 온통 박새 순이 피어올랐다. 백합과 다년초인 이 식물은 깊은 산 습지에서 무리 지어 자라며, 꽃은 7∼8월에 연한 황백색으로 피어나는데, 강한 독성이 있으며 약용으로 쓴다. 나는 이 박새를 이 지역 '봄의 전령사'로 임명했다.
△ 자연 속에서 찾는 여유 - '문석이'에서 '동거미'까지
2000. 6. 18. 일요일. 여름 날씨치고는 그런 대로 쾌청.
이런 날은 탁 트인 오름을 오르며 땀을 빼면 개운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승용차에 나눠 타고 동부산업도로를 달린다. 지금 이 순간부터 속세의 무거운 짐을 모두 부려 놓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 우린 겉으론 태연한 것 같아도 저마다 가슴속을 후비는 사연들을 묻고 산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존심을 내세워 아옹다옹 다투며. 그래, 오름에 오르는 시간만큼은 이런 모든 것들을 맑은 공기로 씻어 버리자.
길섶 자귀나무가 꽃을 달기 시작했다. 콩과 낙엽 소교목인 자귀나무. 밤중에 잎이 접혀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독이 있다는데 분홍색 신비스런 꽃을 피운다. 어렸을 적엔 그 가지를 꺾어 잎사귀를 훑으며, 장난도 곧잘 했었지. 베트남 디안의 비둘기부대에 파견 근무를 할 때, 이 나무로 인해 알게 되었던 까만 눈을 한 소녀가 떠오른다. 지금쯤은 50대가 되어 있을…. 생각하면 허무(虛無) 그 자체다.
백약이오름 입구에 차를 세웠다. 철조망을 지나 벌판에 이르렀을 때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주위가 온통 초록 세상.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뻐꾸기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다. 이 새가 여름철새인 것도 모르고 봄의 전령사쯤으로 안다. 그래서, 봄 노래에 단골로 등장한다. 두견이과에 속하는 이 새는 5월에서 8월까지 우리 나라 전역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유럽과 아시아 등지의 아열대에서 북극까지 번식하며, 겨울에는 따뜻한 곳으로 옮겨 월동한다. 이 놈은 자신이 둥지를 틀지 않고 때까치, 멧새, 노랑할미새 등의 둥우리에 알을 위탁하여 포란(抱卵)과 육추(育雛)를 시킨다. 얌체다.
어느새 꿀풀꽃은 색이 바래기 시작했고, 엉겅퀴꽃이 한창이다. 문석이오름으로 올라간다. 해발 291m의 나지막한 오름인데 굽이굽이가 풍만한 여인의 몸이다. 서쪽으로 나지막이 아부오름이 자리했다. '이재수란' 촬영 때문에 유명해져 한바탕 난리를 치른 곳이다. 그래서 지쳤는지 축 늘어져 신음을 토하고 있다. 정상에 피뿌리풀 꽃이 하나둘 피어 분홍색과 흰색이 잘 어울린다.
동거미 서남봉에 올랐다. 남녘 좌보미를 바라보니 오름 오르는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오늘도 저 사람들의 발길에 몸살께나 앓겠지. 멀리 밭에서 김매는 여인네들의 모습이 아련한 추억을 부른다. 북서쪽 피라미드 같은 급경사를 바로 올랐다. 정상의 민들레꽃을 근거로 나비가 몰려들고 있었다. 제비나비 네 마리가 아직 짝을 정하지 못했는지 어우르며 하늘로 오르고, 호랑나비와 노랑나비도 덩달아 춤을 춘다.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못 보고 살았는지, 일상의 행동 반경에 정말 나비가 없었는지 실로 오랜만에 보는 놈들이다. 귀여운 것들….
*주 : 중국 답사에서 돌아와 아직 원고를 쓰지 못하여 대신 지난 것을 정리하여 이번 <교육제주>에 실릴 원고를 올립니다. 때문에 일부 중복이 된 것도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해상왕 장보고 중국 답사기'는 금주내로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답사 중 소식을 전하는 일은 아직 그곳의 인터넷 접속이 쉽지 않아 하지 못했습니다.
<사진> 위는 자귀나무와 꽃, 아래는 동거미오름, 그리고 멀리보이는 것은 백약이오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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