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뭇개동산의 김석교 시인과 참가자들
* 우뭇개동산에서 피해상황을 설명하는 성산읍 출신 김석교 시인
▲ 김석교 시인이 들려주는 '우뭇개 동산' 이야기
다음은 성산 입구 왼쪽 능선인 우뭇개동산으로 옮겨 김석교 시인이 조사한 당시 이곳의 피해 상황을 들었다. 일출봉에 오르는 관광객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기웃거리다 무슨 살판이 났나 하고 와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비극의 총성의 울렸단 말인가?
현재 성산 기슭의 야외무대 자리와 그 옆 둔덕이 속칭 우뭇개동산인데, 그 둔덕에는 국기게양대 자리에 '아이무덤알'(애기무덤터)도 있지만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지금은 거의 뭉개져 버렸다. 그 바로 밑에는 해안으로 움푹 들어온 지형의 우뭇개 포구가 있다. 사시사철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당시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맑고 푸른 바닷물만 층층 고여 있다.
1949년 1월 2일 오조리 주민 30여명이 소위 '다이나마이트 사건'으로 총살당한 곳이다. 해방후 일본 군인들이 버리고 간 포탄은 분해와 조제 과정을 거쳐 고기잡이용으로 많이 쓰였다. 또, 1948년 겨울부터 각 마을에서는 민보단을 꾸려 경비를 서면서 이것을 수류탄과 같은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이다.
이를 조제, 사용, 보관에 관계된 사람들과 집을 뒤져 집합에 참석하지 못한 노약자를 모두 성산리 감저공장에 가두고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그 날 끌려간 마을 주민들과 고태종 이장과 홍성강 민보단장이 군인들을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1960년 이 부지는 서울의 리라재단에 팔려 리라호텔이 들어섰는데 일출봉관광호텔로 바꿔 운영하다 망해 당시 남제주군이 매입하여 지금은 성산일출제를 치르는 곳이다.
* 다 허물어져 가는 옛 성산국교 터에서 당시 상황을 말하는 장윤식 씨
* 옛 성산국교 터에서 증언하는 고찬화 할아버지
* 다 허물어져 가는 옛 성산국교 교사
▲ 다 허물어져 가는 서청의 주둔지
그 악명(惡名) 높았던 원성(怨聲)의 자리 옛 성산초등학교 건물은 이제 다 허물어져 흘러간 옛노래 '황성옛터'를 떠올리게 했다. 마당엔 풀이 자라고 이곳저곳에는 쓰레기가 난무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이곳에서 극단 한라산 장윤식 회원의 이야기와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고령 기행 참가자 고찬화 할아버지로부터 4. 3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성산리 킹마트 뒤편에 자리한 옛 성산국민학교의 개교 당시의 이름은 성산동국민학교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개교했고 1957년 6월에 다시 교명이 변경되어 1972년에는 성산 입구로 옮겼다가 1988년에 지금의 자리인 성산항 입구로 정착한 것이다. 이곳은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특별 중대를 구성하여 100여명이 3개월간 주둔한 곳이다.
이곳에 살면서 옆 감저창고 건물에 죄인을 가두고 취조를 감행했다. 그 감저창고는 지금 자리가 남아 있지 않고 반쯤 허물어진 교사(校舍)만이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것이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대나무와 판자로 이루어진 벽이 많이 허물어지고 창고로 사용한 듯 컨테이너 등의 쓰레기처럼 방치되어 있다.
시간이 꽤나 지나버려 계획되었던 종달리와 두문포는 차를 타고 지나면서 설명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구좌면 동쪽 끝에 위치한 종달리는 동년 동, 중동, 서동 등으로 이루어진 해안 마을이다. 1947년 6월 6일 일어난 세칭 6. 6사건으로 종달리는 일찍부터 경찰당국의 주목대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육지부나 일본으로 도피하게 만들었다. 6. 6 사건으로 종달리 주민 43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큰 곤욕을 치렀고 일부는 4. 3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이후 총살당하기도 했다.
* 옛 성산국교 교사 안에서 본, 증언을 듣는 참가자들
▲ 동복리와 굴왓 그리고 '바람 타는 폭낭'
동복리는 해변에 접한 마을로 조천면의 동쪽 끝 마을인 북촌리에 접한 구좌면의 첫 마을이다. 이 마을은 북촌리와 함께 1949년 1월 17일, 대규모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에 앞서 1948년 12월 22일에는 9연대 군인들이 비석거리에서 양봉일, 안행선 등 8명의 가족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총살했다. 그런가하면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민보단장과 그 가족을 살해하는 등 주민들은 양측으로부터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마을의 청, 장년들은 인근의 숲이나 궤에 숨기에 바빴고, 일부는 더 깊은 산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토벌 주력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된 이후에도 마을 주민들에 대한 학살극은 계속 이어졌다. 1949년 1월 5일, 함정 토벌에 걸려든 강봉옥, 백화일 부부 등이 군인들에게 희생됐는가 하면, 같은 해 1월 17일에는 굴왓에서 86명의 엄청난 인명이 희생됐다. 이때 토벌대는 마을의 가옥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김녕리로 소개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동복리 주민들의 김녕 소개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고, 희생 또한 적지 않았다. 같은 해 1월 20일,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동복리 주민 30여명이 김녕공회당 앞밭에서 집단 희생당하기도 했다. 굴왓은 1949년 1월 7일, 이 마을 주민 86명이 군인 토벌대에 의해 집단 학살된 장소이다. 같은 날, 북촌리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벌인 군인들이 되돌아가던 중, 동복리에 들러 주민들을 굴왓 옆의 장복밭으로 집결시켰다.
연설을 들으라는 명목이었다. 잠시 후 모여든 주민들을 장복밭 옆의 굴왓으로 끌고 간 뒤, 18세 이상의 남자와 여자들을 분류하고, 18세 이상의 남자들은 전부 학살하고 말았다. 이때 김녕 민보단원들이 굴왓을 에워싸 경계했고, 군인들은 밭둑에 M-1소충과 기관총을 걸어놓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바로 이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대검으로 찌르며 확일 사살까지 했다. 그럼에도 이 학살의 현장에서 고계봉, 고대후, 이운태, 신일보 4사람이 극적으로 살아나 굴왓 학살의 만행을 마을 주민들에게 증언했다.
굴왓은 지금도 농사를 짓는 밭이다. 다만 이날 학살의 집결지였던 장복밭의 팽나무만이 바람 타는 방향으로 누워 마을 주민들의 처참한 희생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5시부터 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나는 노심초사하면서도 이를 지켜보며 끝까지 행사에 동참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문학기행에 참가하려는 나와 이상하게 일이 겹치는 악연의 고리를 언제면 끊을 수 있을는지? 이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 진행했던 작가회의 이종형 사무국장과 관계자 여러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끝)
* 장복밭의 바람 타는 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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