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제주 거린악엔 지금

김창집 2004. 10. 1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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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들기 시작한 사람주나무 단풍

 

▲ 2004년 10월 12일 화요일 흐림

 

 2학기 중간고사가 오전에 끝났다. 벼르고 벼르던 오름 좋아파 선생님들이 며칠 전부터 압력을 놓으면서 데려가 달라던 거린악엘 가기로 했다. 오후 2시에 학생문화원 주차장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일단 귀가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우리 사무실 회식이 예정돼 있어 식당에서 곁들여 나오는 반찬이 하도 좋아 백세주 한 잔에 담소를 나누며 뜨거운 메로지리를 후후 불다 집에 가니, 1시 30분.


 서둘러 어머님께 밥을 먹여드리는데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차가 벌써 와서 빵빵거린다. 원 성질도 급하기는…. 하기야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가게 되니까 그럴 만도 하지. 그도 그럴 것이 거린악은 한라산에서 좀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산이 깊고 그윽하고 계곡이 아름다운, 그래서 내가 웬만해서는 같이 가지 않고 꼭꼭 숨겨둔 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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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창한 계곡의 숲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나까지 10명. 2대의 차에 나눠 탄 우리는 날씨가 좋기만을 기대하며 남조로 고사리 축제장에서 5. 16도로까지 새로 뽑은 산록도로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고 출발했다. 동부관광도로에 들어서는데, 이건 앞뒤로 대형 화물차가 몇 대 에워싼다. 봉개동을 지나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절물오름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명도암 마을을 넘어서자마자 억새가 밭마다 넘쳐난다.


 그 광경을 보면서 모두 가슴이 부푼지 탄성을 올린다. 뒷자리에 강 부장과 같이 탄 홍일점 사모님이 더 신나는 모양이다. 남조로로 다시 접어들어 삼다수 공장과 제주 육성마 목장 옆을 지나니 벌써 남제주군 표선면 경계다. 붉은오름과 여문영아리, 물영아리를 지나 고사리 축제장 입구에서 서쪽으로 새로 뽑은 길 입구에서 만나 다시 달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이 이 길로 하여 얼마 안 가 절단날 것을 생각하니 한심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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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주나무 단풍

 

△ 거린악엔 지금 사람주나무만 조금

 

 지난 일요일 저녁 9시 뉴스에서 보여주는 설악산 단풍에 가슴이 설레었다. 물론 위도상 설악산이 38도선 바로 위 1,708m 높이고, 이곳 거린악은 북위 33도상의 532.7m니, 도저히 견줄 바 못 되지만 지금 단풍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궁금했다. 종가시나무를 비롯해 아웨나무, 동백나무, 식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상록수가 주종을 이루는 이곳 계곡 주변은 아직도 시퍼렇다.


 가끔 누렇고 붉은 색소가 보여 가보면, 산벚나무나 산딸나무, 사람주나무 정도이다. 이 사람주나무는 장소에 따라 제일 먼저 물들기 시작하여 제일 늦게까지 간다. 안개가 자욱하던 산북(山北)과는 달리 날씨가 많이 맑아졌는데도, 오후 2시 54분에 입산한 숲 속은 어둑했다. 계곡을 따라 계속 잡목림 숲이고 보니, 변화가 없어 지루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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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광으로 찍은 사람주나무 단풍


 여기서 꺾어 주봉을 향할 수도 있지만 가장 깊숙하고 아름다운 곳을 들르기 위해 조금 더 진행하여 계곡으로 들어섰다. 모두들 탄성을 올린다. 나는 바위가 기묘하게 늘어서고 물이 맑게 고인 이곳을 소금강(小金剛)이라 명명하여 왔다. 제주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았지만 관광객으로 말미암아 훼손되고 신비가 벗겨진 곳이 많다. 지금 이렇게 깊숙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몇 군데 남아있지 않다.


 보이는 단풍나무마다 붉은 빛은커녕 누런 잎도 없다. 물론 여러 번의 태풍으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잎사귀가 많이 떨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바람이 스친 상처에 바이러스에 감염 된 몇 잎만 물든 것들은 있다. 여름에도 가끔 그런 것들이 보이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기현상이지 결코 아름답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도 억지로 멋을 낸 것이 역겹듯이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에 본질을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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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 머리에 위치한 산벚나무 단풍

 

▲ 거린악은 역시 매력 있는 오름

 

 사실 거린악은 두 개의 오름이 붙어있는 것이다. 어떡하다가 두 개의 화산체가 거의 등이 기댄 채로 붙어 있어 하나로 보이는데, 그 모습이 하나의 오름이 네 갈래로 나뉘어진 꼴이라고 제주어 '거리다(나뉘다)'의 관형형 '거린'에 큰산을 뜻하는 '악'이 결합되었으니까. 더욱이 한라산 바로 밑에서 발원한 서중천이 그 산 옆구리를 갈라 파헤쳐 버렸기 때문에 더욱 산 높고 물 맑은 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곳이 남제주군의 중산간 바로 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한라산 본체에 속한 것도 아니고 5. 16도로로 나뉘어져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오름 모임에서 처음에 잘 모르고 왔을 때, 산은 당연히 완주 당하기를 거부해 돌려보냈다. 다음에 그게 말이 되느냐고 오기로 무장하여 왔는데 또 다시 거부를 했고, 세 번째 철저한 준비 끝에야 완주를 허락한 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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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창한 계곡과 물


 서중천이 물살이 너무 거칠기 때문에 계곡이 너무 깊어 주봉으로 진입할 때는 기어서 올라야 했고, 오른 뒤에도 가파른 정점을 기다시피 올랐다. 정상 능선이 가까워지면서 줄기가 하얀 동백나무가 많아지고 그 아래로 새우난초가 무더기를 이루는 가운데 춘란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옛날에 무더기를 이루던 이곳에 다시 보춘화가 무리를 이뤄 피는 것을 보고 싶다. 북쪽 능선에 서 있는 나무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숨어우는 바람 소리'의 이미지라고 해서 웃었다.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오른다. 나무가 너무 우거지고 줄기가 많아서 방향을 잘못 잡으면 엉뚱한 곳으로 내리기 일쑤다. 그 동안 숱하게 오른 우리 오름 모임에서도 착각으로 방향을 조금 틀었다가 붉은오름 쪽으로 내려 고생을 많이 한 곳이다. 오름 정상은 나무가 우거졌기 때문에 주변을 살필 수 없어 허무하다. 나는 좋은 곳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 이르고는 앞장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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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상 무덤가에서 본 한라산(흐린 날씨)

 

△ 오늘 거린악을 장식한 보석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주봉의 능선 가운데 부분 북서쪽에 한라산 봉우리를 향한 무덤이 하나 있다. 옆이 충분히 트여 거침없이 한라산을 볼 수 있는 그 무덤 위에 우리 오름 모임 회원들은 정상인 양 앉아서 쉬며 담소하기를 즐긴다. 앞장 서 그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봉분이 파헤쳐졌다. 이묘를 한 것이다. 하긴 등산 전문인들도 자주 길을 잃는 이곳에서 그간 후손들이 벌초하러 왔다가 얼마나 낭패를 당했으면….


 가지고 온 자기 집의 단감과 감귤을 나누어 먹으며 이번 여름에 몽골에 갔다가 사왔다는 37.5% 짜리 보드카 TOLSTOY가 너무 독해서 내 비상용 술인 13% 제주산 복분자주를 내 놓으니 여러 사람이 덤빈다. 복분자주는 달기도 하려니와 정력에 좋다하여 인기가 있다. 10월 산에는 어둠이 빨리 오기 때문에 서둘러 남봉(南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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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막살나무 열매


 잠깐 나무 사이로 남봉의 위치를 확인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나서 조금 더 남쪽으로 가서 길을 찾아야 함에도 미리 길을 잡아 태풍 때문에 쓰러진 삼나무 길을 뚫고 가느라 조금 애를 먹었다. 제 길에 들어섰을 때 이곳이 자생인 나도은조롱 무더기를 만났다. 멸종 위기를 맞은 희귀종이지만 이곳과 바로 옆 넙거리와 사려니에 주로 분포되어 자란다. 여기서 보면 너무 싱싱하고 많아서 귀한 줄을 모른다. 


 아무 것도 아닌데도 귀한 것들이 대접을 받는데 착안하여 우리 사람도 될 수 있으면 아무도 하지 않은 그런 일을 개발하면 성공하리라 다짐해본다. 삼나무 사이로 길을 찾아 남봉으로 오른다. 산딸나무 잎사귀가 태풍에 노출 돼어 빨갛게 변한 것이 있다. 삼나무 그늘에는 별다른 식물이 없다. 마지막 냇가에 이르러 가막살나무 빨간 열매를 만났고, 길에 나와 출발점에서 조금 떨어진 길옆에서 저 진주 같은 누리장나무 열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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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를 연상시키는 누리장나무 열매

 

▲ 한라산의 모습은 어디서나

 

 차를 세운 곳에 돌아온 시각은 5시 40분. 전부 3시간 46분 걸린 셈이다. 앞장서 걸은 내가 그러했듯이 모두가 언제 어디를 다녀왔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숲 속으로 들어가 뒤만 따르며 걸어 꿈처럼 언뜻언뜻 별천지를 보고 한 바퀴 돌아 숲에서 나온 것이 바로 그곳이다 보니 도깨비에 홀렸다는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시멘트 포장길을 나오다 석양에 비친 억새가 너무 좋아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이번엔 5. 16도로 쪽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위치를 정확히 뇌리에 심어주기 위해서다. 순간 눈앞에 나타난 한라산에 구름이 걸려 있는 모습이 너무 좋아 차를 세우게 해서 몇 컷을 찍었다. 사실 한라산은 제주도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해변에 위치한 마을 어디서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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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와서 길에서 찍은 한라산 정상


 어려서부터 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을 신앙처럼 받들며 살아온 섬사람들에게 산의 존재는 신앙의 대상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한라산의 구체적인 모습은 각각 다르다. 언젠가 어느 쪽에서 바라본 한라산이 제일 아름다운가 하는 물음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누구든 어렸을 때부터 바라보며 뇌리에 각인(刻印)된 익숙한 모습의 한라산이 가장 멋진 모습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5. 16도로 가장 높은 곳인 성판악 휴게소에 이르는 동안 줄곧 숲을 바라보았는데, 사람주나무 단풍이 으뜸이고, 다음이 왕벚나무, 산딸나무 순이다. 해발 1,000m 성판악 부근의 단풍은 아직 멀었다. 그렇지만 중산간 마을의 감은 잘도 익었다. 사실이지 제주는 너무 따뜻한 곳이어서 1월까지도 애기단풍이 빨간 색을 자랑할 때도 있으니까. 이제 고백하건데 이 날 뒤풀이에서 사모님이 쏜 맛있는 저녁 식사와 곁들여 한라산 소주를 마신 몇몇 선생님 얼굴에서 오히려 더 빨간 단풍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다녀와서 찍은 합동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