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오사카의 상징 오사카성

김창집 2007. 6. 20. 00:15

--탐문회 칸사이(關西) 지역 답사기 (2)

 

 

     * 매점쪽에서 본 텐슈카쿠

 

♧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또미 히데요시가 세운 성


 사단법인 탐라문화보존회 답사단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우리나라를 무력 침공한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또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이었다. 차에서 내려 바라보니, 멀리 덴슈카쿠[天守閣]가 보이고 거대한 외성 성채(城砦)와 해자(垓字)가 눈앞에 다가온다. 남외호라 불리는 이 호수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화재에도 사용되었던 호수다. 제1망루를 바라보며 다마쓰크리문을 통해 들어가며 성채 돌의 크기와 튼튼함에 적이 놀란다. 


 일본은 근세에 이르러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大名], 소묘[小名] 등의 무장이 자신의 거성으로 구축한 성곽들이 각처에 잘 보존되어 있는 나라이다. 일본의 성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지’의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을 보면 3세기 중엽에 이미 성책을 설치한 기록이 있으며, 일본의 사서(史書)인 ‘고지키[古事記]’나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기원전 수 세기 전의 성이 기록되어 있으나, 고고학적으로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 성의 해자와 위의 제1망루

 

♧ 일본의 성(城)에 대하여


 7세기 다이카노카이신[大化改新] 무렵, 한국의 산성 축성법이 전래되어 주로 대외적인 방어성책이 변경에서 이루어졌다. 북동지방에는 책(柵)과 성이 설치되고 남서지방에는 토루(土壘), 석축(石築) 등을 갖춘 산성이 구축되었으며, 지금도 남서지방에 유적으로 남아 있는 고고이시[神護石]는 한국의 산성과 매우 흡사한 형태이다. 645년 고토쿠 천황[孝德天皇] 때 축조된 나니와도성[難波都城]은 중국 당나라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일본 최초의 당식(唐式) 도성이었으며, 이러한 형식은 후지와라쿄[藤原京], 헤이조쿄[平城京], 헤이안쿄[平安京]로 전승되었다.


 중세에 들어와 몽골군의 내습이 있었고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치쿠젠[築前, 福岡縣], 나가토[長門, 山口縣] 해안에 구축한 석루(石壘)는 장성식(長城式)으로 일본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것이다. 근세에 이르러 성은 단순히 적을 막기 위한 것만이 아니고, 그 지방의 정치경제의 중심을 겸한 다이묘들의 거성으로서 크게 발달하여 전국 각지에 성이 출현하고 그 외곽에는 백성들의 부락이 형성되었는데, 현재 일본의 대도시의 대부분은 이들이 발전된 것이다.

 

 

  * 성안에서 본 열차

 

 이와 같은 거성은 성곽의 지형에 따라 산성(山城), 산성(平山城), 평성(平城) 등으로 구분된다. 산성의 예로는 다카하시성[高梁城, 岡山縣], 오카성[岡城, 大分縣], 돗토리성[鳥取城, 鳥取縣), 평산성으로는 아즈치성[安土城, 滋賀縣], 히메지성[姬路城, 兵庫縣], 와카야마성[和歌山城], 히코네성[彦根城, 滋賀縣], 구마모토성[熊本城], 고치성[高知城], 평성으로는 나고야성[名古屋城], 요도성[淀城, 京都], 다카마쓰성[高松城, 香川縣], 사가성[佐賀城], 도야마성[富山城] 등이 있다. 또한 유명한 오사카성이나 일본 천황의 거성인 황성은 평산성과 평성의 중간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들 일본성은 성곽을 둘 또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 혼마루[本丸]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외곽에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 등을 배치하고, 대개의 성에는 깊은 해자(垓字)가 둘리어 있다. 중심부에는 덴슈카쿠[天守閣]라 불리는 높은 누각이 3층 또는 5층으로 솟아 있으며, 옛날에는 이곳이 성주의 거관(居館)이었다. 주변을 도는 관광열차가 옆으로 지나가고 왼쪽에 결혼식장으로 인기가 있는 호코쿠신사를 보며, 물 없는 해자가 있는 오른쪽 사쿠라몬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 안에 있는 성문인 사쿠라몬 문

 

♧ 일본 3대성의 하나인 오사카성  


 커다란 은행나무가 성의 유구한 역사를 잘 말해주고 도심의 공원을 유유히 즐기는 인파가 부럽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매점에서 간단한 우동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본격적으로 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내호(內湖)에 심어놓은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천수각을 보기 위해 들어가는데, 한 젊은이가 마술 공연을 하고 있다. 관람객에 둘러싸인 젊은이는 불을 가지고 재미있는 쇼를 펼쳤다.


 오사카성은 500년의 역사를 지닌 오사카의 상징으로 일본 3대 축제의 하나인 ‘오사카 덴진 축제’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나고야성, 구마모토성과 함께 일본의 3대성으로 들어간다. 오사카성은 천하를 통일한 16세기 후반의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련된 성이다. 16세기 말에 세워져 17세기의 전란으로 소실, 그 후 재건되었으나 천수각만이 다시 소실되어 20세기 전반이 되어서야 천수각이 재건되었다.  

 

 

     * 여러 용도로 쓰다가 1960년부터 2001년까지 시립박물관으로 사용했던 건물 

 

 일본 통일을 목표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기 위해 성의 축조에 3만여 명씩 투입시켜 15년에 걸쳐 완성시켰다. 그 후 여러 전쟁으로 파괴되었고,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철저히 해체되었는데, 1931년 시민들의 요청에 의해 텐슈까꾸(天守閣)를 비롯한 일부 시설이 복원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성안에 각종 군사시설이 들어선 탓에 연합군들의 공격 목표가 되어 텐슈까꾸만 남고 모두 파괴되어 1948년 후에 재건축되었다.


 천수각 개찰구에서는 직원이 일일이 체크를 하며 들어가는 인원을 헤아린다. 관람료가 비싸서인지 여행사 사장은 들어가지 않고 남는다. 계단을 밟고 왼쪽으로 올라가니 긴메이스 우물이 지붕 아래 닫혀 있다. 수도가 없던 시절 이런 곳에 우물이 있었으니 너무도 편했겠다 싶다는 생각을 하며 천수각으로 들어갔다. 걸어서 천천히 관람하고 올라간 후 곧바로 내려오리라 마음먹고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한다.

 

 

     * 옛성의 모형

 

♧ 역사 자료관으로 변한 천수각 

 

 천수각의 내부는 1층에서 7층까지가 당시의 무기와 갑옷, 민속자료를 전시한 역사 자료관이며, 8층은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들어가자 왼쪽에 오사카성의 전설과 불가사의에 관한 영상자료실, 오른쪽으로 돌아간 곳에 영상실이 있었다. 안내소와 기념품점도 자리 잡았다. 2층은 성(城)에 대한 정보 코너로 성의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주는 패널과 용마루에 다는 금빛 동물상의 모형, 오사카성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3층에 올라갔을 때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시대의 성곽모형이 있어 비로소 오사카성의 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역사 자료를 전시해 놓아 모든 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조립식 다실을 실제 크기로 복원해놓아 이 천수각의 용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4층 역시 도쿠가와 막부가 재건축한 오사카성의 모형도 있다.

 

 

    * 처음 성을 세운 도요토미 히데요시 상  

 

 5층에는 오사카 여름 전투도 병풍의 세계를 영상과 미니어처 모형을 통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 7층에는 오사카성을 재건축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소개하고 있었다. 8층에는 지상 약 50m 천수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광대한 오사카성과 오사카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었다. 구내에는 약 6만㎡의 잔디공원이 있었고, 매림(梅林)에는 벌써 홍매(紅梅)가 피기 시작했는지 붉게 물든 매화 나무쪽에 인파가 몰리고 있다.

 

 주변에는 오사카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오사카 시립박물관과 도요쿠니 신사, 최대 1만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오사카 성홀 등이 있다. 또한 성의 주변에는 수로가 발달해 있어, 약 1시간이면 시내의 강을 순회할 수 있는 수상 버스도 운행되고 있다. 오사카 성의 서북 지역을 흐르는 오강은, 여름에 행해지는 일본 3대 축제의 하나인 오사카 덴진 축제의 무대가 된다. 100여 척의 배가 순항하는 풍경은 박력이 있으며, 불꽃놀이와 함께 놓칠 수 없는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 멀리 보이는 매림(梅林)

 

♧ 우리나라 사람이 제일 많이 찾아


 원래 이 자리에는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라는 대규모 사찰이 세워져(1496년) 권력의 비호 아래 90여 년 간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고 한다. 하지만 실권을 장악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1580년에 절이 파괴되었고, 이어 집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폐허로 변한 이 자리에 성이 세워지게 된다. 그 때가 바로 1583년, 일본 통일을 목표로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안정적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려 한 것이다.


 성의 공사에 소요된 기간은 무려 15년, 투입된 인력은 매일 3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이 처음 크기의 5분의 1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과거 성의 위용과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야욕의 끝이 조선 침략이었으며, 그 때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알았을까 하는 사실과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사람이 제일 많이 찾는다는 데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 엄청나게 큰 돌들이 들어간 성벽

 

  400여 년에 걸친 영욕의 세월을 보낸 곳답게 구석구석 볼거리로 가득하다. 우선 오사카성 공원은 오사카성을 둥글게 감싸 안은 형태인데 옛 성터를 개조해 1924년에 만들었다. 1970년에는 오사카 엑스포를 치르며 수많은 나무를 심어 지금처럼 울창한 숲을 갖게 되었다. 1620년에 처음 세워진 오사카성의 정문인 오떼몬(大手門)은 높이 약 6m로 1783년에 벼락에 맞아 불타버린 뒤 1848년과 1967년에 재건시켰는데, 코라이몬(高麗門)이라 하여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양식이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성벽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보이는데 가운데 박힌 거석은 드러나나 부분의 면적만 48㎡에 무게가 108톤이라 한다. 그런데 이건 이 성에 있는 돌 중 4번째로 큰 것이라 하니 혀가 내둘릴 수밖에 없다. 천수각을 볼 때 바로 오른 쪽에 있는 유럽식 건물은 천수각을 재건할 당시인 1931에 지어진 것인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 제4사단 사령부, 전후에는 오사카 경시청, 1960년부터 2001년까지 오사카 시립 박물관으로 사용해 왔다.

 

 

  * 나올 때 찍은 기념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