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도봉(別刀峰)이 품고 있는 것들
별도봉 정상에는 작게 만들어 유리를 낀 깜찍한 산불 감시 초소와 그 북쪽으로 방사탑 비슷한 돌무더기, 측량을 위한 삼각대와 깃발, 돌로 된 벤치, 그리고 윗몸 일으키기를 위한 운동 기구 등이 놓여 있다. 나무가 없어 시야가 확 트인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숨고르기가 끝나고 사라봉 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간다. 억새와 제주도 초가집 지붕의 재료가 되는 띠가 양쪽으로 알맞게 이어져 조금 가파르지만 제법 운치가 있다.
표고 136m, 비고 101m, 둘레 2,236m, 면적 242,535㎡의 별도봉엔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암괴석과 "다시 한 번 생각하라"라는 글이 써 있는 자살 바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주시 동남부 지역 67,000여명을 먹여 살리는 수도 정수장도 있다. 삼양동의 제1, 제2 수원지의 물을끌어다가 곱게 거르는 7개의 여과지, 2개의 배수지, 1개의 소독약품 투입지가 있는 곳. 잔디가 곱게 깔려 있어 금년 가을 어렵사리 소풍 장소로 허락 받아 우리 2부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즐겼던, 너무나 깨끗해서 뛰어다니지도 못했던 정수장.
이곳에서 가라앉힌 물은 요즘 전국적으로 알려진 생수 삼다수(三多水) 못지 않게 맛있는 수돗물이다. 생각해 보라. 요즘 수돗물을 마음놓고 그대로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는가. 사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곳은 공동묘지였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정지 작업을 해서 이런 소중한 곳을 만든 것이다. 흙이 다른 오름과는 다른 곳이다. 사라봉과 별도봉 사이 골짜기엔 지금도 조그만 샘과 못이 있다. 정수장과 이웃하여 4∼5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궁도장 한라정(漢拏亭)이 자리잡았다.
다시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면, 제주 동부두가 그린 듯이 보이고 가끔은 부산에서 들어오는 카훼리가 도착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를 길게 내뿜는다. 그 위 사라봉 절벽에는 1917년에 세운 제주도 최초의 유인 등대인 산지등대가 있다. 하얀 색이 칠해진 이곳은 무료로 숙박할 수 있도록 개방시켰다는 보도를 본적이 있다. 그 동쪽 소나무 숲에 태고종 사라사(紗羅寺)가 언뜻언뜻 비친다.
△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돌이 발견되는 알오름과 칠머리당
다 내려온 곳에는 알오름이라는 조그만 오름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바위 파편들을 지니고 있는 사라봉과 별도봉 셋 중에서 제일 먼저 솟아오른 오름이다. 보통 알오름이라면 오름 아래쪽에 보통 둥그런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오름은 작지만 오히려 두 오름보다 먼저 나와 둘을 거느린 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알오름이 높이 21m 둘레가 780m인데 비해, 두 번째로 솟은 별도봉은 높이 101m 둘레 2,236m, 세번째로 솟은 사라봉은 높이 148m에 둘레 1,943m니까.
제주화산체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암석은 화강암과 응회암이다. 이 알오름의 수리쇄설성 퇴적층에 포함되어 있는 화강암 조각은 거문도와 불국사 일대에 분포하는 '불국사화강암'과 대비된다. 이 암석은 중생대 백악기말에 형성되었으며, 6,600만년 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제주도의 지하 평균 800m 이하에 있는 암석이 화산이 폭발할 때 깨어지며 섞여 나온 것이다. 최근 곳곳에서 온천 탐사를 위한 시추 결과 제주 화산도의 심부(深部)에는 응회암과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것임이 드러났다.
오름이 끝나는 곳에 칠머리당이 위치해 있다. 칠머리당은 제주시 건입동의 본향당으로 원래는 부두 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확장공사로 이곳으로 옮겼다. 칠머리당의 신은 "도원수 감찰지방관"과 "용왕해신부인"이다. 이 두 신은 부부신으로 도원수 감찰지방관은 마을 전체의 토지, 주민의 생사, 호적 등 생활 전반을 차지해 수호하고, 용왕 해신부인(龍王 海神夫人)은 어부와 해녀의 생업, 그리고 외국에 나간 주민들을 수호해 준다고 한다.
이 두 신의 표석 왼쪽에는 해신선왕(海神船王)과 영등대왕(靈登大王) 신위(神位) 표석, 오른쪽엔 남당 하로바님과 남당 할마님 신위 표석이 세워져 있는 대여섯 평의 잔디밭 공간이다. 영등신은 이월 초하룻날에 귀덕으로 입도하여 칠머리당에 오는데, 이때에 영등환영제가 치러지며, 제주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열나흘날 송별대제를 위해서 칠머리당에 다시 온다. 그리고 보름날에 우도를 거쳐 강남천자국, 가달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500여 년 이상을 이어져 내려온 칠머리당굿은 1980년 11월 2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으며, 영등신에게 올리는 무속제이다. 영등신은 흔히 '영등할망'이라고 부르는 신으로서 음력 2월 1일 본도를 찾아와 2월 15일에 떠난다. 어민들의 해상 안전과 해녀 채취물의풍요를 빌기 위하여 2월 1일에 영등환영제를 하고, 2월 13일에서 15일 사이의 어느 날(보통14일)에 영등송별제를 한다. 제순(祭順)은 ①초감제 ②요왕맞이 ③씨드림, 씨점 ④산받음 ⑤액막이 ⑥배방선으로 구성된다.
또 다른 길인 해안쪽 중턱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 칠머리당에서 만난다. 중간에 기암괴석과 그 아래쪽으로 자살 터가 있고, 사면에는 억새들이 있어 하늬바람을 맞으며 가로등 아래서 밤새 너울너울 춤을 춘다. 사라봉과 만나는 곳으로 오다보면 혹시 자살했던 사람이 무덤인 듯, 길가에 임자 없는 무덤이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한쪽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실패한 인생의 뒤안길에서도 뭇 사람들의 발길질을 온몸으로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 영주십경(瀛洲十景)의 하나인 사봉낙조의 장관
모든 길이 통하는 두 오름 사이엔 뒤에 사봉 낙조 사진이 크게 박힌 제주시 관광 안내판이 걸려 있고, 온통 소나무로 덮여 있는 오름 오른쪽으로 사라봉을 한 바퀴 도는 길이 나 있다. 그곳으로 가면 사라사와 등대가 나온다. 다음은 음수대가 있는 곳으로 사라봉 정상으로 오르는 산책길. 시멘트 블럭을 깐 길 양쪽엔 벚나무가 심어지고 그 아래로 칸나와 수선화, 올 가을 들어 해변 절벽 틈에 자라는 털머위를 옮겨 놓았다.
꾸불꾸불 세 바퀴 반으로 된 길을 오르노라면 어쩌다 아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운동 중이어서 대부분은 목례로 지나간다. 지그재그로 되어 있는 산길을 속도를 가감하며 땀이 촉촉이 벨 정도로 오른다. 세 번째 바퀴를 도는 곳이 트여 있어 등대를 비롯한 제주항의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진다. 드디어 정상, 화장실과 그 옆에 운동할 수 있는 공간, 정상까지 곳곳에 갖가지 나무와 운동 기구가 배치되어 있다.
망양정(望洋亭)에 올라 천천히 돌며 주위를 조망하면서 사방을 둘러본다. 소나무와 벚나무는 시야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잘라놓았다. 이곳은 영주 10경의 하나인 사봉낙조(沙峰落照)의 현장이다. 성산출일(城山出日)과 대구(對句)를 이루는 이 정자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보는 광경이야말로 소문난 그대로 일품이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제주시가지의 야경과 바다에 널려 있는 고기잡이배에서 내뿜는 불빛은 온 섬을 하나의 축제의 밤으로 들끓게 하기에 충분하다.
동쪽으로 돌아서면 솟아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부드러운 오름의 곡선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동쪽으로 삼양의 원당봉, 함덕해수욕장 저편의 서우봉, 그리고 서쪽으로 도두봉을 비롯해서 수산봉, 고내봉, 과오름까지 거의 이 사라봉, 별도봉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또한, 남쪽으로 우뚝 솟은 한라산(漢拏山). 여기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섬 어디서 바라보는 것보다 높고 웅장하다. 그것은 해변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이 가깝고 또 중산간지대가 넓지 않기 때문에 바로 솟아 보이는 데 기인한 것이다. 맑은 날은 맑은 대로 한라산의 웅장한 모습이 구름 낀 날은 구름 낀 대로 한라산과 어울려 신비감을 자아낸다. 아침 시간 여유라도 있는 날이면 이 정자에 머물면서 한라산과 구름이 엮어내는 웅대한 자연의 변화를 한껏 즐기는 것이다.
한라산을 우러르다 너무 목이 뻣뻣해지면 바다로 눈을 돌린다. 그러면 왼쪽 가까운 곳으로부터 소관탈도(小冠脫島), 대관탈도가 보인다. 그 옛날 제주도에 부임하는 사또들이 신령스런 한라산을 향해 갓을 벗고 신고를 드리지 않으면, 뭍에 발 딛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제주도의 관문인 셈이다.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추자군도(楸子群島)의 상·하추자도와 그 앞으로 보이는 작은 섬들---사수도, 절명이, 밖미역섬, 푸랭이섬, 수덕이섬, 그 밖으로 보길도, 청산도, 완도, 오른쪽으로 여서도와 거문도까지 사이에서 배와 섬들이 벌이는 수상 쇼.
원래 이 망양정 자리에 있던 봉수대(熢燧臺)는 허물어지고 대신 조금 북쪽으로 물러나 새로 쌓아놓은 연대(煙臺), 정말 상식 있는 사람들이 해놓은 건지 의심이 가는 이 연대는 무엇을 근거로 쌓았단 말인가. 제주섬을 도는 오름 봉우리에 설치되어 있는 봉수대는 결국 이 사라봉수에서 목관아지로 마지막 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연대라니? 서쪽 비탈에는 멀구슬나무를 비롯해 가마귀쪽나무, 광나무, 녹나무 등이 심어져 있어 져버린 벚나무 사이로 드러난다.
△ 의녀 김만덕(義女金萬德)의 서민 사랑
남쪽 제주시내를 향해서 계단이 놓여지고 계단과 이웃해서 금산저수지, 그 곁 사라봉 남쪽기슭에는 모충사가 자리하고 있어 순국지사 조봉호(趙鳳鎬) 기념비와 의병항쟁기념탑, 의녀 김만덕의 묘비가 차례로 나란히 서 있고, 남서쪽 기슭에는 충혼각이 있다. 이곳 모충사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제주도의 독특한 방사탑의 모습을 한 타임캡슐, 그 동쪽 만덕 기념관에 가면 김만덕의 일생을 그린 강부언(姜富彦)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모충사와 이웃하여 사라봉으로 오르는 길목엔 1957년에 창건하고 1977년에 대거 보수한, 태고종 보림사라는 절이 자리잡았다.
제주 서민들의 우러름을 받는 김만덕 할머니는 조선 영조 15년(1739년) 김응열의 삼남매 중 외딸로 태어났다. 만덕이 13세 되는 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게 되니, 오라비 만석과 만재는 친척집에 목동으로 가고, 만덕은 기방(妓房)에 의탁하게 된다. 그녀는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총명하였으므로 자라면서 타의에 의해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가 20여세가 되었을 때 본의 아니게 기생된 사연을 들어 양녀로 복귀시켜 줄 것을 관에 호소, 결국은 기적에서 삭제되어 양녀로 복귀되었다.
만덕은 지체 있는 사람으로부터 청혼도 있었지만 이를 뿌리치고 돈을 버는 일에 전념하여,수십 년 사이에 부자가 되었다. 정조 18년(1794년) 8월에 제주에 태풍이 불어닥쳤는데, 온 섬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이듬해에는 큰 기근이 일어나게 된다. 관에서는 진곡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는데, 진곡 수송선 5척이 침몰하였으므로 재차 1만 1천 석의 진곡을 다시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김만덕은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들이게 하였다. 그 중 10분의 1은 친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모두 관에 보내어 기민을 구하게 하였다. 관에서는 완급을 가리어 나누어주니 구호를 입은 백성들이 거리에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구휼이 끝나자 목사는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었다. 임금은 '만덕의 소원을 들어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특별히 시행하라' 하였다.
목사가 만덕을 불러서 소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다른 소원은 없으나 오직 한가지 서울에 가서 임금님 계신 궁궐을 우러러 보는 것과 천하의 명산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이 때 제주의 여자는 국법으로 육지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 있는 때이었으나 목사가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이를 허락했고, 상경하는 데 필요한 역마와 식사는 관에서 특별히 제공하도록 하였다.
김만덕이 상경한 것은 정조 20년(1796년) 가을이었다. 상경하여 두어 차례 좌의정 채제공을 뵈었고 임금에게 아뢰어 선혜청에서 숙식을 돌보아 주도록 하였다. 수일 후에 김만덕에게 내의원 의녀반수의 벼슬을 내렸고 내합문으로 들어가 임금을 배알하였다. 이 때 임금이 전교하기를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를 내어 기아자 천 백여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한 일이로다' 하시고 상을 후하게 내리셨다. 만덕은 그 해 겨울을 서울에서 채류하고 다음 해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이 있는 곳과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였다.
서울에 돌아와서 며칠 후에 내원에 들어가서 귀향의 뜻을 아뢰자 임금은 전일과 같이 상을 내렸다. 이 때 김만덕의 이름이 온 장안에 퍼져 공경대부와 선비들이 모두 만덕의 얼굴을 한번 보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만덕은 출발에 앞서 좌의정 채제공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채제공이 이르기를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해외에 삼신산이 있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한라산을 영주산, 금강산을 봉래산이라고 한다. 너는 탐라에서 생장하여 백록담의 물을 떠 마시고, 이제 금강산도 편답하였으니 이는 천하에 수많은 남자들도 다 못하는 일이다.' 하면서 김만덕의 일을 적어 만덕전이라 이름하였다. 병조판서 이가환이 지은 시.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일세
예순 얼굴이 마흔쯤으로 보이는구려
천금 내어 쌀 사들이고 백성을 구제하여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뵈었구려
다만 원하는 건 금강산을 한 번 유람하는 건데
산은 동북에 안개와 연기로 사이에 있도다
임금께서는 날랜 역마를 내도록 허락하시니
천리에 뻗친 광휘는 관동을 떠들썩하게 했네
높이 올라 멀리 굽어보며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는
표연히 손을 저으며 바다굽이로 돌아가려나
탐라는 저 멀리 고량부 신인 때부터인데
여인네가 이제야 나라 임금 뵐 수 있었다네
칭찬 소리 우뢰 같으며 고니 노닐 듯 빼어나니
높은 기풍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구려
사람이 나서 이름을 세움에 이 같음이 더러 있겠지만
여회청대로 기림은 어찌 족히 몇이나 되리요
김만덕은 순조 12년(1812년) 10월에 74세로 돌아가셨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 성안이 한 눈에 보이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안장하였다. 1960년경부터 제주 시가지를 넓히면서 김만덕 묘소 있는 곳이 헐리게 되었으므로, 1977년 1월 3일에 도민의 이름으로 이곳 모충사로 옮기고 제주도에서는 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만덕 봉사상을 제정, 해마다 한라문화제 때 그 해에 많은 봉사를 한 자랑스런 여인에게 수여하고 있다.
망양정에서 내려와 급수대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아래쪽을 살피니, 오늘 처음으로 수선화가 꼭 세 군데 피어 있다. 옛 만덕의 얼굴을 대하듯 가까이 다가서서 살핀다. 두 송이씩 달린 세 줄기에 핀 꽃에 코를 대고 차례로 향내를 맡으니, 맵싸한 향기가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벌써 제주 사라봉 꼭대기에는 봄의 기운이 뻗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 위는 '벚꽃 핀 망양정'의 모습이고, 아래는 오르미 양영태 씨가 다른 곳에서 찍은 '어느 날의 일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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