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오늘도 오름을 오른다
오름이 나를 부르는가.
오름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오름을 오르고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하얀 눈이 사각사각 밟히는
어승생 오르막길을 걸어서.
가끔은 미끄러지고 무릎까지 빠져
차가운 눈이 등산화 속으로 기어들어 가도
나는 올라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
아니 기대감에 가슴을 불태우며
한 발짝 한 발짝 내어 딛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은 오름에 결석하기로 했다.
아니, 결석한다기보다는 갈 상황이 아니었다.
4촌 여동생 결혼 잔치 피로연의 진행 상황을 살펴
이것저것 지시하고 거들면서 일이 원만히 치를 수 있도록 하면서
오랜만에 만나는 손님들을 맞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오름 식구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려고
매주 모여 오름으로 떠나는 장소로 갔었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을 버릴 수 없고
오늘 오를 어승생오름이 서운해 할까봐
오전만 할애하기로 하여 따라 나서고 말았다.
난 이제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좋고
내가 떠나버리면 아이들이 섭섭해 할까봐
섣불리 일터를 바꾸기가 힘들었다.
그래, 이제까지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리라.
△ 어리목광장 -- 노루들의 천국이자 한라산의 길목
노루의 천국 어리목 광장엔 노루는 한 마리도 없고 대신
주인들을 부려놓은 차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여기는 눈꽃 축제가 열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난동(異常暖冬)인지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눈이 오지 않아, 눈을 나르노라 군인들만 고생했었다.
그래 올해부터는 축제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는데
비웃는 듯이 12월말부터 눈이 쌓이기 시작하여
1월초까지만 해도 이곳은 눈의 나라[雪國]였다.
그 땐 차는 하나도 못 올라오고 먹을 것을 찾아 내려온 노루들만
아이들이 내미는 배춧잎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후기 빙하기 시대, 육지와 섬이 이어졌을 때
따뜻한 곳을 찾아 내려온 동물들 중, 황곰은 일찍 사라지고
조선시대 조공(朝貢) 바람에 사슴과 고라니도 끊겼다.
한동안 노루와 오소리도 뜸하더니
지금은 당국의 보호와 도민들의 정성으로 많이 불어났다.
노루는 초식을 하는 유순한 동물로
귀여운 사람, 아름다운 여자, 명예, 벼슬, 경사 등을 상징하며
스스로 집안으로 들어오면 고귀한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되나
울안에 굳게 갇힌 노루를 보면,
풋사랑을 하거나 이룰 수 없는 짝사랑에 빠지고 만단다.
이곳은 또한, 한라산으로 오르는 길목의 하나
어리목 등반길은 한라산의 4개 코스 중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곳으로
비교적 거리가 짧고 지루하지 않는 등반로.
철쭉과 오름이 장관을 이루는 만세동산과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을 만나볼 수 있는 코스.
사제비 동산까지 1시간 가량은 오르막이지만
힘이 충분한 때라 얼마든지 걸어 오를 수 있고
그 이후로는 가슴이 탁 트이는 초원과 정상이 눈앞에 다가선다.
어리목 코스는 약 4.7km, 등반하는데 약 2시간 가량 걸리는데
윗세오름에서 영실(靈室)로 내리면 안성맞춤인 코스다.
▲ 한라산 북쪽 지역, 모든 오름을 거느린 어승생악
어리목 광장 북쪽에 자리잡은 한라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를 지나
녹기 시작한 눈을 밟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오르면서
옛날 이곳에서 뛰어 놀았을 말을 생각한다.
그래 이곳을 이렇게 오르내리며 다리 힘을 키웠기에
임금님을 태우는 튼튼한 말이 될 수 있었겠지.
말의 해 임금님께 진상할 말을 키웠다는 어승생(御乘生)에서
힘을 길러, 어디 지자체 선거에 출마라도 해봐야 되는 것 아닌가.
곳곳에 아이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안내판이 눈에 띈다.
표고 1,169m, 비고 350m, 둘레 5,842m, 면적 2,543,257㎡로
산북에서 제일 큰 몸체로 지역사령관처럼 우뚝 서서 호령한다.
서어나무·마가목·단풍나무·팥배나무가 잎을 떨구어버린 지금
꽝꽝나무·주목·줄사철나무·송악이 파랗고
가끔씩은 알몸을 드러낸 청미래덩굴 열매가 얼굴을 붉힌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식물을 찾아다니던 부종휴 선생은 이곳에서 흰철쭉꽃을 만난 곳.
발자국을 따라 오른 지 20분, 시계(視界)가 트이며
뒤쪽 어리목 너머로 다가서는 족은드레오름, 민대가리, 사제비동산
그 사이로 확연히 드러난 Y계곡에 쌓인 눈을 보며
제주의 오름을 만들었다는 거신(巨神) 설문대할망이 누워
배꼽 위로만 안개 비단 이불을 덮은 것 같은 환상에 얼굴이….
정상에는 둘레 약 250m 가량의 원형 화구호(火口湖)가 있고
남서쪽에 외도천(外都川), 동쪽에 도근천(都近川)이 오름을 끼고 흐른다.
오늘 시원히 트이지 않은 이곳 어승생 정상에서
일제 말기 일본군이 설치했던 토치카에 들어가 상처난 역사를 만져본다.
4·3 때도 이곳에 커다란 아픔이 있었지.
오름에 올라보면 늘 좋은 것만 보이는 게 아니고
이곳 유배지 제주 땅의 아픈 역사를 종종 만난다.
원나라 때 100년 동안 할퀸 흔적이나
일제강점기 때 그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만행의 흔적
그리고, 4·3때 뿌려진 피의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오늘 같이 즐거운 산행에서 좋은 일만 생각하자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분화구로 내려간다.
백록담의 축소판인 이곳 굼부리엔 늘 물이 괴어있진 않다.
언제나 화벽으로 둘러싸인 아늑함과 활활 타오르던
활화산을 상상하며
온 몸 가득 충만하는 기(氣)를 담고 돌아온다.
` (2002. 1. 13.)
<사진> 위는 노루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오름 사랑' 대표 서재철 씨,
아래는 '오름 나들이' 양영태 씨의 작품입니다.


▲ 나는 오늘도 오름을 오른다
오름이 나를 부르는가.
오름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오름을 오르고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하얀 눈이 사각사각 밟히는
어승생 오르막길을 걸어서.
가끔은 미끄러지고 무릎까지 빠져
차가운 눈이 등산화 속으로 기어들어 가도
나는 올라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
아니 기대감에 가슴을 불태우며
한 발짝 한 발짝 내어 딛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은 오름에 결석하기로 했다.
아니, 결석한다기보다는 갈 상황이 아니었다.
4촌 여동생 결혼 잔치 피로연의 진행 상황을 살펴
이것저것 지시하고 거들면서 일이 원만히 치를 수 있도록 하면서
오랜만에 만나는 손님들을 맞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오름 식구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려고
매주 모여 오름으로 떠나는 장소로 갔었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을 버릴 수 없고
오늘 오를 어승생오름이 서운해 할까봐
오전만 할애하기로 하여 따라 나서고 말았다.
난 이제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좋고
내가 떠나버리면 아이들이 섭섭해 할까봐
섣불리 일터를 바꾸기가 힘들었다.
그래, 이제까지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리라.
△ 어리목광장 -- 노루들의 천국이자 한라산의 길목
노루의 천국 어리목 광장엔 노루는 한 마리도 없고 대신
주인들을 부려놓은 차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여기는 눈꽃 축제가 열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난동(異常暖冬)인지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눈이 오지 않아, 눈을 나르노라 군인들만 고생했었다.
그래 올해부터는 축제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는데
비웃는 듯이 12월말부터 눈이 쌓이기 시작하여
1월초까지만 해도 이곳은 눈의 나라[雪國]였다.
그 땐 차는 하나도 못 올라오고 먹을 것을 찾아 내려온 노루들만
아이들이 내미는 배춧잎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후기 빙하기 시대, 육지와 섬이 이어졌을 때
따뜻한 곳을 찾아 내려온 동물들 중, 황곰은 일찍 사라지고
조선시대 조공(朝貢) 바람에 사슴과 고라니도 끊겼다.
한동안 노루와 오소리도 뜸하더니
지금은 당국의 보호와 도민들의 정성으로 많이 불어났다.
노루는 초식을 하는 유순한 동물로
귀여운 사람, 아름다운 여자, 명예, 벼슬, 경사 등을 상징하며
스스로 집안으로 들어오면 고귀한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되나
울안에 굳게 갇힌 노루를 보면,
풋사랑을 하거나 이룰 수 없는 짝사랑에 빠지고 만단다.
이곳은 또한, 한라산으로 오르는 길목의 하나
어리목 등반길은 한라산의 4개 코스 중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곳으로
비교적 거리가 짧고 지루하지 않는 등반로.
철쭉과 오름이 장관을 이루는 만세동산과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을 만나볼 수 있는 코스.
사제비 동산까지 1시간 가량은 오르막이지만
힘이 충분한 때라 얼마든지 걸어 오를 수 있고
그 이후로는 가슴이 탁 트이는 초원과 정상이 눈앞에 다가선다.
어리목 코스는 약 4.7km, 등반하는데 약 2시간 가량 걸리는데
윗세오름에서 영실(靈室)로 내리면 안성맞춤인 코스다.
▲ 한라산 북쪽 지역, 모든 오름을 거느린 어승생악
어리목 광장 북쪽에 자리잡은 한라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를 지나
녹기 시작한 눈을 밟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오르면서
옛날 이곳에서 뛰어 놀았을 말을 생각한다.
그래 이곳을 이렇게 오르내리며 다리 힘을 키웠기에
임금님을 태우는 튼튼한 말이 될 수 있었겠지.
말의 해 임금님께 진상할 말을 키웠다는 어승생(御乘生)에서
힘을 길러, 어디 지자체 선거에 출마라도 해봐야 되는 것 아닌가.
곳곳에 아이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안내판이 눈에 띈다.
표고 1,169m, 비고 350m, 둘레 5,842m, 면적 2,543,257㎡로
산북에서 제일 큰 몸체로 지역사령관처럼 우뚝 서서 호령한다.
서어나무·마가목·단풍나무·팥배나무가 잎을 떨구어버린 지금
꽝꽝나무·주목·줄사철나무·송악이 파랗고
가끔씩은 알몸을 드러낸 청미래덩굴 열매가 얼굴을 붉힌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식물을 찾아다니던 부종휴 선생은 이곳에서 흰철쭉꽃을 만난 곳.
발자국을 따라 오른 지 20분, 시계(視界)가 트이며
뒤쪽 어리목 너머로 다가서는 족은드레오름, 민대가리, 사제비동산
그 사이로 확연히 드러난 Y계곡에 쌓인 눈을 보며
제주의 오름을 만들었다는 거신(巨神) 설문대할망이 누워
배꼽 위로만 안개 비단 이불을 덮은 것 같은 환상에 얼굴이….
정상에는 둘레 약 250m 가량의 원형 화구호(火口湖)가 있고
남서쪽에 외도천(外都川), 동쪽에 도근천(都近川)이 오름을 끼고 흐른다.
오늘 시원히 트이지 않은 이곳 어승생 정상에서
일제 말기 일본군이 설치했던 토치카에 들어가 상처난 역사를 만져본다.
4·3 때도 이곳에 커다란 아픔이 있었지.
오름에 올라보면 늘 좋은 것만 보이는 게 아니고
이곳 유배지 제주 땅의 아픈 역사를 종종 만난다.
원나라 때 100년 동안 할퀸 흔적이나
일제강점기 때 그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만행의 흔적
그리고, 4·3때 뿌려진 피의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오늘 같이 즐거운 산행에서 좋은 일만 생각하자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분화구로 내려간다.
백록담의 축소판인 이곳 굼부리엔 늘 물이 괴어있진 않다.
언제나 화벽으로 둘러싸인 아늑함과 활활 타오르던
활화산을 상상하며
온 몸 가득 충만하는 기(氣)를 담고 돌아온다.
` (2002. 1. 13.)
<사진> 위는 노루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오름 사랑' 대표 서재철 씨,
아래는 '오름 나들이' 양영태 씨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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