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우도, 그리고 이생진 님의 시

김창집 2004. 11. 2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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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일요일(11월21일) (사)탐라문화보존회 회원 72명을 이끌고 우도(牛島)에 다녀왔습니다. 10월에 가려다 풍랑 때문에 대신 성산읍 답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소설(小雪)을 하루 앞둔 겨울 날씨임에도 쾌청하여 걸어서 무난히 한 바퀴 돌 수 있었습니다. 우도에 관한 사항은 11월 2일에 올린 '늦가을에 찾은 우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겨울답지 않게 바다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섬과 바다를 좋아하는 떠돌이 시인 이생진(李生珍) 님의 시와 함께 올려 보려 합니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유명한 선생님은 충남 서산에서 성장했고, '현대문학'을 통해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습니다. 1996년 '먼 섬에 가고 싶다'(1995)로 윤동주 문학상, 2002년 '혼자 사는 어머니' (2001)로 상화(尙火) 시인상을 수상했는데, 2001년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1978)로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은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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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출봉과 성산항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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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머리오름 정상의 우도 등대

 

▲ 우도(牛島) / 이생진

 

끊어졌던 물이
서로 손을 잡고 내려간다
헤어졌던 구름이 다시 모여
하늘에 오르고
쏟아졌던 햇빛이 다시 돌아가
태양이 되는데
우도(牛島)는 그렇게
순간처럼 누웠으면서도
우도야
우도야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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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음악회를 여는 우도8경 중 동안경굴

 

△ 이생진 시인의 변(辯)

 

 해마다 여름이면 시집과 화첩을 들고 섬으로 돌아다녔다. 안면도 황도 덕적도 용유도 울릉도 완도 신지도 고금도 진도 흑산도 홍도 거제도 제주도 내라로도 와라로도 쑥섬 거문도……. 


 

 이렇게 돌아다니며 때로는 절벽에서 때로는 동백 숲에서 때로는 등대 밑에서 때로는 어부의 무덤 앞에서 때로는 방파제에서 생활이 뭐고 인생이 뭔가 고독은 뭐고 시는 무엇인가 생각하며 물위에 뜬 섬을 보았다. 그 때마다 나는 섬이었다. 물 위에 뜬 섬이었다. 


 

 그러나 통통거리면 지나가는 나룻배 벙벙 울며 떠나는 여객선 억센 파도에 휘말리며 만년을 사는 기암절벽 양지바른 햇볕에 묻혀 조용히 바다를 듣는 무덤, 이런 것들은 내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낙원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살아서 낙원을 다닌 셈이다. 그 낙원에서 맑고 깨끗한 고독을 마실 때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것을 시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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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갯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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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국(山菊)

 

▲ 성산포(城汕浦)에서/ 이생진

 

아침 여섯 시
어느 동쪽이나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 피운다
태양은 수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설사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한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은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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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우도의 돌담

 

성산포에서는
男子가 女子보다 女子가 男子보다
바다에 가깝다
술을 마실 때도 바다 옆에서 마신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맨 먼저
나는 수평선(水平線)에 몸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드는 파도소리에 귀를 찢기웠다.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한 세상 하면서, 당하고 만 일이 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이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기운 적은 없었다

 

모두 막혀버렸구나
산은 물을 막고 물은 산을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 게다
떠나간 사람이 와 있는 것처럼 보일게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닿지 않는 진주로 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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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답지 않게 맑고 푸른 바다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해도 그렇게 날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 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다가 바다에 누워 밤이 되어 버린다
날 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서
픽픽 넘어지며 운다
큰산은 밤이 싫어 산짐승을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릴 차내버린다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가듯
넓은 바다도 물 속으로 물 속으로
밤을 피해간다

 

성산포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 가운데 풍덩 생명을 빠뜨릴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수는 없다
성산포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산다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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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바다를 서성이는 사람들과 깨끗한 모래톱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덕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生)과 (死)를 놓지 않아서
서로가 떨어질 순 없다.
파도는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피워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세워 할 것도 없이
돌아선다

 

사슴이여
살아있는 사슴이여
지금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꽃이여
너 동백꽃이여
지금 꽃으로 피어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슴이 산을 떠나면 무섭고
꽃이 나무를 떠나면 시드는 것
지금은 시세움 없이 말하지 않지만

 

어망에 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갈매기가 몰고 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한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이제 다시 돌아갈 곳 없는 자리
그대로 천년만년 길어서 싫다
꽃이 사람이 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가 물에 산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 속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 데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山神)께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水神)께 빌다가 세월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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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핀 수선화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만들고 바다가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는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돕는다
기도보다 잔잔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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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산호해수욕장으로 알려졌던 서빈백사와 바위 해변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라를 보고 있는 고립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두었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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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 해변에서 본 우도 최고봉 쇠머리오름과 남서쪽에서 본 오름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