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제주시'지 통권 제47호(2005)에 실린 것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제주향교 정문인 대성문
□ 조선시대의 향교(鄕校)
조선시대의
향교는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서울의 사학(四學)과 마찬가지로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 문묘(文廟),
명륜당(明倫堂) 및 중국과 조선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서무, 학생이 머무는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 하에 부·대도호부·목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여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정부에서 5∼7결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 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임진·병자의 양란과 서원의 발흥 때문에 부진하여 효종 때에는 지방 유생으로서 향교안(鄕校案)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자는
과거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등의 부흥책을 쓰기도 하였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이름만
남아 문묘를 향사하는데 그치게 되었고, 1900년에는 향교 재산관리 규정을 정하여 그 재산을 부윤·군수 등이 관장토록 하였다. 1918년 조사된
바로는 당시 향교의 총수는 335개, 소관 토지는 48만 평이었다. 해방이 되자 향교재산 관리법에 따라 재단을 설립하고 그 재산은 문묘의 유지와
사회 교화사업의 시설로 충당하게 되었다.
* 대성전 뒷편 소나무 숲에 세운 공자상
□ 다섯 번이나 옮긴 제주향교
제주에 향교가 건립된 것은 조선 세조 원년(1392)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1394) 3월 27일 병인의 기록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있었으나, '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학교조의
김처례(金處禮)가 지은 비문에 "우리 태조 원년 임신에 학교가 이루어졌다."와 '증보문헌비고' 학교고 향학조에 "우리 태조 원년 임신에 학교가
이루어지고, 세종 17년(1435) 을묘에 향교가 다시 지어졌다."는 기록이 그를
뒷받침해준다.
향교가 처음 세워진 곳은 지금의 동문시장 입구 제주은행 본점
앞인데, 1999년 12월 제주시에서 향교 옛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가락천(嘉樂川) 동쪽 관덕정에서 1리경'이라는 기록과 남아있는
지명에 따른 것이다. 1996년 제주시에서 발행한 '제주시의 옛 지명'에 나오는 '교동(校洞)'과 '웃생깃골'·'알생깃골'이
그것이다.
이곳에서 증축과 중수를 계속하며 190년간 이어오던 제주향교는
선조 14년(1581) 김태정(金泰廷) 목사가 부임하면서 "성묘(聖廟)는 만세에 우러러보는 곳인데 여염집 사이에 끼어 있고, 또 사장(射場)
밑에 있어 숭경(崇敬)하는 뜻을 이룰 곳이 못 된다." 하여 가락천 동쪽의 고령전(高齡田)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이듬해에 옮기게
된다.
'제주시의 옛 지명'에 따르면, '고령밧'은 "일도1동 구 영락교회 서쪽에 아파트가 들어선 일대의 밭으로, 오현단에서 동문동으로 넘어오는 다리 아래"라 했다. '탐라지'에는 "고령전은 옛날에는 고령포라 했다. 본주 동쪽 1리경에 있다. 지금은 성안에 있다."고 했으며, '증보 탐라지'에도 "제주읍 일도리 남수구 북에 있다. 옛날은 고령포라 하였다. 언전(諺傳)에 당나라 상선의 조난처라 한다."고 했다.
* 제주향교 계성사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고령전에서 86년 동안
지탱하던 제주향교는 현종 9년(1668) 이인 목사에 의해 "본목(本牧) 향교의 옛터가 좁고 험하며 동·서무 간살의 얽이[間架]가 더욱 좁아서
위판을 병렬할 수가 없고, 묘정(廟廷)과 성첩(城堞)의 거리가 10보에 불과한 데다 큰 내가 바짝 닥쳐 가까워, 허물어져 무너질 염려가
있다."고 하여 다시 옛터인 교동(校洞)에다 집을 짓고 돌아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내의 큰불로 소실되고 만다. 다시 옮겨온 지
56년이 흐른 경종 4년(1724)의 일이었다. 신유익(愼惟益) 목사는 서둘러 가락천 동쪽 옛터 고령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짓고 이듬해 3월에
옮겼다. 이전 후에 양무를 옮겨 세우는 한편으로 신문(神門), 향문(香門), 동서 각문 및 동서 재사, 강청, 전사청, 주고, 공수 등을
세웠다.
그 이후 얼마간은 별탈 없이 지내더니 영조 31년(1755) 홍태두(洪泰斗) 목사가 "향교 자리가 낮고 습기가 많다."는 김몽규(金夢 ) 전 목사의 말을 듣고 지금의 삼성초등학교가 있는 광양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30년이 흐른 후였다. 광양에서 70년이 지나자 심영석(沈英錫) 목사가 "광양 옛터는 산을 향하고 바다를 등져 지세가 전도되었고, 사나운 비바람으로 건물을 번번이 수리하는 역사가 없는 해가 없었다."는 장계를 올려 용담동 자리로 이건 허락을 받아냈고, 순조 27년(1827)에 부임한 이행교(李行敎) 목사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안착하는 대장정이 끝났다.
* 새로 고쳐 지은 명륜당
□ 현 위치에서의 제주향교의 변천
제주중학교 정문을 지나 향교 입구에 이르러보니, 늘 문 앞을
지키는 운명철학 아저씨는 간 곳이 없고, 담벼락에 커다랗게 전통혼례를 치러준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오랜만에 정문으로 들어서는데, 오른쪽에 충효관
현판 옆으로 '문명한문학원'과 '성균관유도회 제주지부' 간판이 보인다. 이 건물은 제주상고 교실로 쓰였었는데 1998년에 환수,
깔끔하게 수리해 문명학원과 유학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제주향교 규칙에는 "향교는 유교 정신에 기하여 도의의 천명과
윤리의 부식(扶植), 문화의 발전 및 공덕(公德)의 작흥(作興)을 목적으로 하고, 그를 달성하기 위해 문묘 향사, 유학의 연구 및 향교 육성발
전, 기타 사업을 펼치며, 충효 교실 및 한문 유학교육을 위한 학원을 개설 운영한다. 직제는 전교 1인, 장의 50인, 감사 2인,
서독유사(書牘有司) 1인으로 편제하고, 사무장을 둘 수 있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알맞은 터를 찾기 위해 435년 동안 헤맨
셈이다. 이행교 목사의 '향교 이건기'에 따르면 "한라산의 한 가닥이 북으로 달리다 동으로 감아 도니, 산세는 멀리 둘리어져 별이 벌여있고
바둑돌이 놓여 있는 것처럼 황홀하고 바다 빛은 깊이 잠기어 큰 파도 성난 물결을 보지 못한다. 문명이 탁 터져 환하고 끌어안아 도량이 크고
온후하니, 성묘의 신주를 모실 곳으로는 더없이 합당하다."고 나온다.
* 제주향교의 정자
이건 당시 처음 세운 건물은 문묘와 동·서무, 당실과 재사, 주방 등이며, 철종 원년(1850)에 장인식(張寅植) 목사가 대성전과 동·서무를 중수하였고, 철종 5년(1854)에 제주유림들이 진정하여 구내에 계성사를 착공 이듬해에 완공하였다. 그 뒤 고종 9년(1872) 조의순(趙義純) 목사가 문묘와 동·서무를 중수했고, 고종 20년(1883)에 박선양(朴善陽) 목사가 명륜당을 중수했다.
이후 수 차례의 중개수가 이어져 오다가 해방이 되면서 구내에
지금의 제주중학교 전신인 제주초급중학교(6학급)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하면서 일부는 교실로 사용하고, 1951년에는 낡은 동·서무를 헐어 그곳에
교실을 지었다. 1965년에 명륜당이 누전으로 불타자 남쪽으로 옮겨 지으면서 대성전 앞에 배치돼 있던 건물들은 다 정리되어 학교 부지가 되고
향교는 지금의 영역으로 고정되었다.
1974년에는 국고보조금과 도비보조금, 그리고 자체 자금을 동원하여 계성사를 대중수하고 대성문을 신축했다. 1976년에 또 국고보조금과 도비보조금, 자체 자금 등으로 대성전을 중수하고, 1991년에 제주시 예산을 지원 받아 전사청을 개축했다. 1997년에는 지방비로 계성사를 개축했고, 2001년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시멘트로 된 명륜당을 해체하고 이듬해 복원하였다. (계속)
* 제주향교 계성사 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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