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늦가을에 찾은 우도[2004. 10. 23.]

김창집 2004. 11. 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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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과 우도간을 오가는 배

 

 우도면(牛島面)은 면적 6.07㎢, 인구 1,752명(2001)이며, 천진리, 조일리, 오봉리, 서광리 등 4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1698년(숙종 24년) 다시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하여, 1800년대 초부터 부락이 형성되었다. 1980년 구좌면(舊左面)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구좌읍 관할 연평출장소로 있다가, 1986년 4월 우도면(牛島面)으로 승격하였다. 우도면은 제주도 동쪽 성산포(城山浦)에서 북쪽으로 약 3.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제주에 딸린 8개의 유인도 중 가장 큰 섬이다.


 섬의 동남단에 높이 솟은 우도봉(132m)과, 대부분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17km의 해안선을 중심으로 '우도8경'이 펼쳐져 있고, 천혜의 수산자원이 주민의 주소득원이 되고 있다. 교통편은 종달리(終達里)를 종점으로, 한때 범선을 이용했으나, 1930년대 이후 점차 개선, 발전하여 성산포를 종점으로, 매일 1시간 간격으로 정기선이 운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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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포항의 두 등대

 

▲ 우도8경(牛島八景)

 

 우도의 대표적인 풍광을 낮과 밤, 하늘과 땅, 앞과 뒤, 동과 서로 구분하여, 1983년 연평중학교 제16대 교장 김찬흡 선생이 재직 당시에 발굴하여 명명한 것이다.

 ① 주간명월(晝間明月) : 섬의 남쪽에 '광대코지'라는 암벽주변으로 해식동굴이 여럿 형성돼 있는데, 암벽 밑 수중동굴에는 맑고 잔잔한 날 오전에 태양이 반사되어 동굴 천장에 둥근 달처럼 환하게 떠오른다. 이를 따로 '달그리안'이라고도 한다. 

 ② 야항어범(夜航漁帆) : 여름밤의 멸치잡이 광경. 수십, 수백 척의 어선들이 섬 주위에 빽빽이 늘어서서 집어등을 환하게 밝힌 모습이 온 바다가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현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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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도 북쪽 끝에서 본 섬과 성산포항을 출발하며 본 우도

 

 ③ 천진관산(天津觀山) : 기기묘묘한 성산일출봉을 옆에 둔 채 뾰족하게 솟아오른 수산봉과 지미봉 뒤로 아른거리며 오순도순 둘러앉은 기생화산들을 품고 있는 한라산의 자태를 바라보는 경치를 말한다. 
 ④ 지두청사(指頭靑沙) : 등대가 있는 쇠머리오름 꼭대기에 올라서 바라본 우도전경은 초록빛 대지, 티없이 맑고 푸른 물결 위에 부서지는 흰 파도, 하얀 백사장이 눈이 부시도록 시리다.

 ⑤ 전포망도(前浦望島) : 종달리와 하도리 사이 앞 바다에서 바라보는 우도의 모습. 그 모습은 영락없는 와우(臥牛)의 모습이다.

 ⑥ 후해석벽(後海石壁) : 수직 기암절벽이 성산일출봉을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 웅장한데 배를 타고 나가 이 수직절벽과 바로 앞의 외돌바위가 어우러져 자아내는 풍광을 감상하는 것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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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머리오름의 갯쑥부쟁이 군락

 

 ⑦ 동안경굴(東岸鯨窟) : 쇠머리오름의 깎아지른 수직 절벽 밑으로 '콧구멍' '고래동굴' 그리고 '붉은 동굴' 로 불리는 해식동굴이 두 개 있는데 썰물이 되어야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이 굴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내부가 매우 커서 큰고래가 살았음직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굴 주변의 해변인 검멀레 해변의 검은 모래사장은 찜질에 좋다. 

 ⑧ 서빈백사(西濱白沙) : 우도 서쪽 백사장은 우리 나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산호모래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산호모래가 아닌 굳어진 홍조류가 부서져 만들어진 모래밭으로 확인됐다. '홍조단괴(紅藻團塊)'는 광합성 작용을 하며 물 속에 서식하는 석회조류식물중의 하나인 홍조류가 탄산칼슘을 침전시켜 단괴로 형성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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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도의 고인돌과 억새

 

▲ 우도(牛島)의 연혁

 

 왜적의 출몰로 한 때 무인도였던 섬에 조선 현종 8년(1842)에 물때를 맞춰 이곳에 넘나들며 해산물을 채취하던 인근 마을 주민들이 조정에 탄원해 다시 사람이 살도록 인가를 받았으며, 헌종 10년(1844) 진사 김석린이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이전에는 국유 방목장으로 숙종24년(1698) 절제사 유한명에 의해 말 200마리가 방목되었다. 헌종 8년(1842)부터 사람이 다시 살기 시작한 가파도 역시 국유 방목장이었는데, 말은 우도에서 소는 가파도에서 방목하였다.


 우도 선착장에는 잠녀상과 함께 일제 강점기를 지내면서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단하고 어려웠는지를 말해주는 '우도 해녀 항일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다음은 1932년 세화리 잠녀 투쟁 당시 널리 부르던 우도면 전흘동 출신 강관순이 지은 해녀가(항일운동가).


 "우리는 제주도의 가이없는 해녀들/비참한 살림살이 세상도 안다./추운 날 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저 바다의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우는 아기 젖먹이며 저녁 밥 짓는다./하루종일 해봤으나 번 것은 기막혀/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코/온 가족 생명 줄을 등에다 지고/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조선 각처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배운 것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저놈들은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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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도를 오가는 배


▲ 탐라순력도 우도점마(牛島點馬)

 

 1702년(숙종28) 7월13일 이형상 목사는 아침 일찍 일출봉에서 해뜨는 것을 보고(성산관일, 城山觀日) 나서, 우도로 건너가 말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그 날 점검한 마필수는 262필이며, 이들 말을 관리하는 목자(牧子) 보인(保人)의 수가 2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우도의 모습이 마치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포구와 어용굴(魚龍窟)이 표시되어 있는데, 어용굴은 신용(神龍)이 사는 곳으로 어선이 접근하면 대풍(大風)과 뇌우(雷雨)가 일어나 나무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해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당시 우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가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이원조(李源祚)목사가 장계(狀啓)를 올려 우도 목장의 개간을 허락 받은 1842년 이후이다.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 따르면, 숙종 23년(1697) 우도에는 말을 가파도에는 소를 방목하여 진상에 대비토록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뱃길이 험해 왕래가 불편하고 검열이 어렵기도 하려니와 때로 해적이 밥이 될 때도 있어 순조 23년(1823년) 위유어사에 의해 우마를 본도의 목장에 나누도록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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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도의 등대

 

▲ 쇠머리오름[우도봉, 牛島峰] 

 

 오름의 남∼남동 사면은 곧바로 높이 100m의 해안단애를 이루며 바다로 내리지르고, 북사면은 용암유출에 의해 파괴된 형태로 완만한 용암대지가 마을로 이어져 있어 오름이 곧, 섬 그 자체인 셈이다. 쇠머리오름은 응회환(tuff ring)의 수중 분화구이며 화구 안사면에는 저수지와 함께 병풍처럼 둘러쳐진 화구륜을 확인할 수 있고, 화구중앙에 소위 알오름이라고 하는 화구구인 '망동산'이 솟아있다. 이러한 2개의 성인이 다른 기생화산체가 동시에 하나의 화구상에 존재하는 것을 해안선 주변에서는 종종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단성(單性)의 이중식화산이라고 한다.


 그렇게 응회환은 해양환경의 얕은 바다 속에서 만들어진 수중분화활동의 산물이며, 화구구인 망동산은 육상분화활동의 산물인 송이(scoria)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오름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최초 화구가 천해(淺海) 또는 해안선 주변 조간대에 노출된 환경하에서 물과의 접촉이 원활하여 화산쇄설성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응회환의 분화구를 형성한다. 물과 마그마의 접촉에 의한 수증기성 폭발활동은 응회환의 퇴적층 속에 혼탁류와 같은 다양한 퇴적구조를 남긴다. 이러한 퇴적활동에 의해 자체 성장한 화산체는 물과 접촉이 안 되는 육상 환경으로 바뀌며, 소위 스트롬볼리식 분화인 육상분화로 전이된다.


 육상분화 활동에 의한 화구로부터의 용암유출은 북쪽사면을 파괴하면서 흘러 우도의 지표지질을 만들었으며, 뒤이은 화산활동의 여운은 알오름과 같은 화구구를 생성시킴으로서 우도와 쇠머리오름은 만들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의 쇠머리오름의 형태는 분화활동 후에 계속된 파도에 의한 물리적인 해안침식의 결과이다. 해안침식지형인 오름의 해안 수직절벽에는 해침에 의해 해식동(海蝕洞), 해식애(海蝕崖)가 발달되어 있으며, 오름의 식생은 전체적으로 풀밭오름의 특징을 보이며, 산정부에는 소나무와 삼나무로 조림된 숲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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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도의 해변과 서빈백사장

 

▲ 우도의 고인돌

 

 우도봉 서측 해안가 가까이에 성산일출봉과 마주보고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상석은 길이가 200cm, 너비가 150cm, 두께가 60cm 정도의 크기로 윗면은 자연석 그대로이지만, 모서리는 떼 내어 다듬은 흔적이 분명하다. 장축방향은 제주 본섬의 한라산 주봉을 향하는 동서방향이다. 현재 상석 북쪽에 1매, 동쪽에 상석이 비탈을 따라 다소 미끄러져 드러난 납작한 지석(支石) 2매가 확인된다. 1985년도 처음 확인하였을 당시에는 없었던 지석묘 동쪽 길이 새로 조성되면서 지석묘 서쪽 부분이 다소 교란되었다.


 그 축조 연대는 우선 제주도 본섬의 고인돌 연대가 그 대부분이 곽지1식의 적갈색경질토기 시대라는 점과 우도 발견의 마제석부의 추정시기 역시 앞서 곽지1식토기와 비슷한 시기라는 점에서 대체로 기원 1∼5세기경의 어느 한 시점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본섬에서 고인돌 지석과 그 하부에서 확인되는 토기가 바로 곽지1식토기이며, 이 토기가 마제석부와 공반되는 것이 광령리 유물산포지는 물론, 곽지리 패총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렇게 되면 제주도 본섬의 대부분의 고인돌과 함께 우도 고인돌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축조된 고인돌이 되는 셈으로, 고인돌 축조 전통이 특히 제주도에서 더욱 오래 지속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셈이다.

 

♬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 유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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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라잡은 할머니와 우리가 먹은 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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