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명필들의 글씨를 모은 비림(碑林)

김창집 2007. 10. 27. 23:54

   -- 중국의 천년고도 시안 답사기 (4)

 

  * 시안비림박물관 입구


♧ 명필들이 쓴  비석들의 숲 비림(碑林)

 

 2007년 8월 3일 토요일 맑음

 어제 무리한 산행을 하고 늦게 도착해 축배까지 들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감동이 컸기에 아침에 거뜬하게 일어나 호텔 뷔페에 가서 가볍고도 영양이 많은 것으로 식사를 마쳤다. 오늘은 시안 답사의 중추를 이루는 여러 곳을 다녀야 하기에 잠시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쉽게 올 수 없고 다시 또 올 기회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기에 다지는 마음가짐이다.   


 시안 성벽의 남문 근처에 자리한 비림박물관은 역대 명필 1095개의 비석이 마치 나무숲처럼 빽빽하게 전시돼 있다하여 비림(碑林)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긴 시안의 이 비림은 이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곡부에 있는 공묘비림(孔廟碑林), 서창의 지진비림(地震碑林), 고웅(高雄)의 남문비림(南門碑林)과 함께 중국 4대 비림이라 부르며, 우리나라에 보은군에도 비림박물관이 있다.

 

  * 비림으로 들어가는 문 


 어제 넘어 다니며 보았던 시안 성벽의 남문을 바라보며 성벽을 이은 것 같은 문으로 들어가니, 못이 있고 오래된 곳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커다란 비단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가이드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문묘(文廟)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옛날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지냈던 문묘 터여서 그 문을 그냥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이어 ‘비림(碑林)’이라는 현판을 단 조그만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안에 들어 있는 비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 거대한 비는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인데, 잘 아시다시피 ‘효경’은 공자와 그의 제자 증자가 효에 대해 문답을 나눈 것으로, 큰 글자는 당 현종 때 이융기가 공자 효경의 원문을 예서체로 쓴 것이며, 작은 글씨는 현종이 해서체로 쓴 주석이라 한다.

 

   * 옛날 공자의 위패를 모셨던 문묘였음을 알려주는 문

 

♧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비림


 비림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역사진열실, 석각예술실, 비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림에는 당대(唐代) 개성연간에 만들어진 114개의 비석에 61만 글자나 들어 있는 개성석경(開成石經)을 비롯해 로마에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의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내용을 담은 대진경교류행중국비, 당 현종이 직접 쓴 석태효교비(石台孝敎碑), 왕희지(王犧之)의 삼장경교서비(三藏經敎序碑) 등이 있다.


 이 박물관은 북송 철종(哲宗)년간(1090년)에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9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림은 현재 7개의 대형 진열실과 8개의 회랑 그리고 8개의 비정(碑亭)에 한대부터 청대까지 2,300여 개의 비석을 수장하고 있으며, 그 중 1000여 개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서, 예서, 초서, 행서 등의 각종 서체를 비교할 수 있으며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 전시실 입구 비각에 걸린 현판(위)과 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회원들(아래)


 따라서,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종이가 없거나 질이 나쁜 종이 밖에 없던 시절, 오래 남을 돌에 글을 새기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고 거기에는 새기는 글은 좋은 글씨는 필요로 했기에 중요한 비(碑)에는 특별히 당대 최고의 명필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안진경(顔眞卿)의 안가묘비(安家묘碑), 회소(회素)의 성모첩비(經母帖碑), 제술랑(諸述良)의 안탑성교서비(雁塔經敎序碑) 등의 비(碑)가 눈에 띤다. 그리고, 얼마나 이 비문을 탁본해 널리 퍼뜨렸는데, 그것을 비림본(碑林本)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란의 고대문자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와 한자와 함께 쓰여 있는 소양처마씨묘지(召凉妻馬氏墓志)라 쓰인 비석 등 다양하다.

 

   * 열심히 탁본을 뜨고 있는 사람

 

♧ 6개의 전시실로 꾸며 놓아


 여러 시대의 각종 비를 모아 놓아서 그런지 어둡고 칙칙하다. 대부분의 비가 오석(烏石)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점도 있으나 오늘날의 책과 같은 의미로 새겨놓은 것들은 내용이 길고 글씨도 작다. 하지만 다른 전시실에 가면 꼭 표구해 갖고 싶은 시구(詩句)나 4군자 같은 그림도 있었다. 별로 닳지 않은 돌에 새긴 것이라 우리들의 보는 앞에서 계속 표구해 팔기도 한다.


 제1전시실의 작품은 과거시험 대비 필독서 13경을 새겨놓은 석판들이라 했다. 종이들이 좋지 않은 시절이라 필사본이 오래가지 못하기에 아예 표구할 것을 대비해 좋은 글씨를 돌에 써놓은 것들이다. 당나라 문종(873) 때 범본(範本)을 114개 돌판에 새겨 전시했던 것도 보이고, 13경은 처음에 ‘주역, 상서, 시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논어, 효경, 이아’ 등 12경이었는데 청대 때 ‘맹자’를 추가해 13경이 되었다.

 

 

  * 탁본을 뜨기 위해 종이를 붙여 말리는 광경

 

 제2전시실은 서예가를 위한 범본(範本) 전시장이다. 중국의 서성(書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왕희지’를 비롯해 구양순, 안진경, 저수량 등 이름 있는 서예가들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 묘지석들을 모았다. 당태종과 무측천이 제일 좋아했다던 왕희지체는 ‘대당삼장지효서비’와 당 고종의 명을 받아 회인스님이 왕희지체를 집자해 만든 ‘대당삼장성교서비’가 있고 구양순의 대표작 ‘구성궁예천문’과 ‘황보탄비’가 전시돼있다.


 제3전시실은 한나라로부터 북송, 위진, 남북조시대까지의 비석과 묘지명을 모아놓은 곳이어서 중국 서예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전시한 곳이다. 이곳에는 장욱(張旭)의 글씨 ‘순화각첩선(淳化閣帖選)’과 ‘두통첩(月+土痛帖)’, ‘단천자문(斷千字文)’ 등이 주목된다. 그는 당나라 서예가로 장쑤성(江蘇省, 강소성) 오군(吳郡) 출신이다.


  * 탁본과 기념품을 팔고 있는 가게

 

 8세기 전반인 현종(玄宗) 때 활동하였는데, 육간지(陸柬之)의 아들 육언원(陸彦遠)으로부터 ‘간지서법(柬之書法)’을 전수받았고 명기(名妓) 공손대랑(公孫大娘)이 2개의 긴 천을 공중에 휘두르며 춤추는 것을 보고 초서(草書)의 진수를 깨달았다고 한다. 또 술을 좋아해 취하면 미친 듯이 붓을 잡았으며, 머리카락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쓰기도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장진(張顚)이라고 했다.


 당시 자유분방한 ‘초서(草書)’를 창시하여 초서의 제1인자로서 유명했다. 안진경(顔眞卿)과 이양빙에게 필법을 전수했고, 회소(懷素)와 고한(高閑)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전한다. 해서작품에 ‘낭관석기(郎官石記)’가 있고 초서 작품에 ‘자언첩(自言帖)’, ‘고시사첩(古詩四帖)’이 있다. 초서(草書)는 한자 서체의 하나인데 자획을 생략하여 신속히 쓰는 흘림글씨로 한(漢)나라 때에 비롯되었다.


 * 유물들과 그림을 전시해 놓은 곳

 

 전한(前漢) 때에 예서(隷書)와 함께 일상 서체로 쓰였다는 것이 문헌과 서역지방에서 발굴된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 유품에서도 증명되었다. 전한 무렵 전서(篆書)의 필기체로서 고초(古草), 후한(後漢) 초기에는 장초(章草)가 생겼다. 장초는 예서의 자획을 간략화한 것으로, 붓을 치키는 팔푼(八分)의 필법을 가진 기복이 심한 서체였다. 진(晉)나라 때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서는 초서가 더욱 발달하여 예술적이고 세련된 모습을 갖추었다.


 동진(東晉) 때는 장초가 쇠퇴하고 금초(今草)가 생겨 초서체의 전형을 이루었다. 금초는 한 자씩 차분히 쓰는 독초체(獨草體)와 붓을 떼지 않고 쓰는 연면체(連綿體)로 나누어지는데, 왕희지의 글씨는 그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당나라 때에는 더욱 분방해진 광초체(狂草體)가 개발되어 장욱(張旭)과 회소(懷素)가 그 대가로 활동하였다.

 

  * 탁본을 거의 다 마쳐 떼려하고 있다.

 

 제4전시실은 송에서 청까지 유명한 ‘시문(詩文)’비를 모아놓은 곳이며, 제5전시관은 원․명․청대의 비석들을 모아놓은 곳인데, 주로 청나라 비석들이다. 내용은 당시 사회활동에 대한 기록으로 사회사와 지방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되고 있다. 일부 비석은 중요한 서예로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6전시관은 청나라 시가(詩歌), 산문(散文) 등이 전시돼 있었다. 이곳에는 멋진 그림과 글씨들이 있어 아저씨들이 직접 탁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어떤 것은 탁본을 위해 물로 비석에 붙여 말리고 있었다. 이렇게 탁본(拓本)된 것들은 한쪽에서 팔고 있었고, 책으로도 만들어 팔고 있어 조그만 것을 한 권 샀다.  


 * 박물관 안에 있는 석각예술관 

 

♧ 비림에 있는 주요 청대 작품들


 청대엄공신도비(淸代嚴公神道碑), 청대송학도(淸代松鶴圖), 청대관우좌상(淸代關羽座像), 청대평안부귀도(淸代平安富貴圖), 청대복록수삼성도(淸代福祿壽三星圖), 청대관제시죽도(淸代關帝詩竹圖), 청대괴성점두도(淸代魁星點斗圖), 청대관중팔경(淸代關中八景), 청대일필호자(淸代一筆虎字), 청대관잠(淸代官箴), 청대화갑중주필수자(淸代花甲重周筆壽字), 청대백수도비(淸代百壽圖碑).


 청대주개예서사조병(淸代周金+皆隸書四條屛), 청대유용서첩(淸代劉墉書帖), 청대철보서동파서법론(淸代鐵保書東坡書法論), 청대천지정기(淸代天地正氣), 청대옹방강서첩(淸代翁方鋼書帖), 청대등정정문부(淸代鄧廷楨文賦), 청대유화산시(淸代游華山詩), 청대고기묘지명(淸代顧夔墓志銘), 청대영정치원(淸代寧靜致遠), 청대왕탁천자잠(淸代王鐸千字箴), 청대복자(淸代福字) 등등등.   

 

   * 전시중인 옛조각

 

♧ 그 밖의 볼 것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 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가볼만 한 곳이다. 비림은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이 당나라의 개성석경(開城石經, 837년 경서를 베껴 완성한 석각)이 황폐해짐을 안타깝게 여겨 안진경경(顔眞卿), 서호(徐浩), 몽영몽영(夢瑛) 등 이름난 서가들의 서체가 담긴 돌비석을 세우고 보존한데서 시작한다.


 명(明)나라의 성화(成化), 청(淸)나라의 강희(康熙)·건륭(乾隆)·가경(嘉慶) 연간에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그 동안 당송 이후 근대에 이르는 비석을 더 찾아다 전시하였고, 또한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을 비롯한 유명한 서가(書家) 법첩의 석각을 많이 수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서안 부근은 예로부터 비석이 많았지만 당나라 말 황소의 난 때 파괴, 소실되었다. 다행히 비림만은 보존되어 당 이후의 서법 변천과 석비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 박물관에 전시중인 그림

 

 그 외로 돌로 된 여러 가지 유적과 유물들이 모여 있는 곳도 있고, 미술품을 전시해 놓은 곳도 있어 볼거리가 많았고, 나무와 꽃들도 잘 가꿔져 있었다. 무덤 앞에 세운 것이 아니라 관위에 두었다가 구멍에 그림자가 없어지면 흙을 덮었다고 한다. 해시계였던 비석이 나중엔 말을 매다는 기둥구멍으로 쓰이기도.. 동물 조각모양이 다양하다.


 비림박물관의 현관격의 비각에는 편액에 ‘碑林(비림)’의 글씨를 보면 ‘비(碑)’ 자의 획이 하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청나라 장군 임칙서(林則徐, 1785 ~ 1850)가 쓴 것인데 그는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 당시 서안에 왔다가 광동성으로 가는 중에 비림의 현판을 남기면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시안에 돌아와 점을 찍겠다고 했는데, 그가 전쟁에서 패하고, 남경조약이 체결된 뒤 신강에 가서 죽고 말았기 때문에 아직도 그대로라 한다.


  * 나오면서 본 옛건축물

 

♬ 매화 - 등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