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억새, 그 섣부른 몸짓의 의미

김창집 2002. 2. 5. 12:23


 

 

 입동(立冬)이 지난 지도 열흘. 낙엽 구르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몸으로 느끼는 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가을걷이가 끝난 허허로운 벌판엔 허연 머리를 풀어헤친 억새만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너울거리고 있다.

 제주의 가을은 억새로 시작해서 억새로 끝난다. 물론 가는 곳마다 늘푸른 나무숲이 없는 것은 아니나, 섬 어디든 빈곳이면 어김없이 숨어들어, 모른 척 얼려 자라다가 결국 가을이면 들통이 난다. 솟구쳐 오르는 희열을 어쩌는 수 없어, 속옷을 헤집고 허연 살을 드러낼 수밖에. 몰래 숨어 해오던 사랑이 임신으로 드러나듯이.

 억새가 자라는 땅은 척박한 땅이다. 곡식이 심어지고, 나무가 들어서고, 그리고 풀이 차지하다 남은 땅에서 그 자리를 탓하지 않고 이름처럼 억세게 살아간다. 곡식은 거름을 준다. 잡초를 뽑아준다. 가지를 쳐준다. 야단들이지만 억새는 발붙일 틈만 있으면 그만이다. 사랑하다 집 쫓겨난 연인(戀人)들이 방 한 칸 있으면 그만이듯이.

 억새는 저들끼리 어울려 피어난다. 바람이 불면 저들끼리 누웠다 저들끼리 일어선다. 찬이슬 내리는 새벽이나 서리 내리는 밤에도 불평 않고 묵묵히 이겨낸다. 누구 하나 상대를 거스르는 법이 없다. 서걱이는 소리도 요란하게. 저들끼리 놀고 저들끼리 어울리다 보면 벌 나비가 없어도 외롭지 않다. 같이 사는 두 사람 스스로 꽃과 나비가 되듯이.

 억새는 천연색이기보다는 우리들에게 친숙한 흑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래야 격에 맞는 존재다. 제 분수를 지켜 스스로 사치할 줄 모르는 대신 그들의 무릎 아래 야고를 길러낸다. 어찌 저들이 낳지 않았다고 자식이 아니랴. 자신들이 피우지 못할 아름다운 꽃 보랏빛 야고를 발 밑에 거두고, 제 살을 나눠준다. 개똥지빠귀가 뻐꾸기 새끼를 길러내듯이.

 억새--. 시원(始原)을 향한 원초의 몸부림. 저 정제된 채로 이방인을 맞는 산굼부리의 억새나 불의에 항거하여 멈추기를 거부하는 거친오름의 억새, 그리고 하늬바람을 온 몸으로 받고 불빛 아래 춤추며 밤을 새워야 하는 별도봉 억새의 부산스런 몸부림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왜 척박한 이 땅 제주에서 온 몸으로 떨어야 하는가를.

 사나이가 혼자 억새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간다. 아무 거두어볼 것 없는 황량한 가슴을 마주 대보기 위해. 낙엽이 다 져버린 허망한 들판 저 미친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억새 숲을 향해서. 갈대는 습한 땅에서 나서 온 몸에 온통 물 기운을 받고 허무를 내 뿜지만, 억새는 아무 곳에서나 자라 자유를 향한 섣부른 몸짓을 계속한다.

 어느덧 이곳까지 기러기 날고 나뭇잎이 진지 오래다. 이제 억새는 대지가 연주하는 교향악을 들으며, 잘 익은 씨앗을 달고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정착하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곳을 찾아 하나둘 비상(飛翔)의 나래를 편다. 어머니의 품을 떠난 억새는 낙하산을 타고 겨우내 대지 위를 떠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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