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처럼/
김창집
바야흐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 가을이 되면, 오름은 들꽃 잔치를 벌인다. 전에는 몰랐는데,
오름에 오르면서부터 가을에도 아름다운 들꽃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물매화·섬잔대·쑥부쟁이·자주쓴풀·한라부추·쥐손이풀·한라돌쩌귀·촛대승마….
이들뿐이랴. 오름 등성이에 서면 보이는 곳마다 꽃밭이다. 누가 돌보아주지 않았어도 저마다 제 자리에서 빛을 내며 향기를
풍긴다.
내가 좋아하는 들꽃은 물매화다. 이 꽃은 그 이름처럼
매화의 성정(性情)을 닮았다. 음지건 양지건 제가 태어난 곳에 뿌리박고 잎자루를 내밀어 다섯 개의 하얀 꽃잎을 피워 올린다. 흰색이면서 초록빛을
띤 것이 춘란의 소심을 떠올리게 한다. 이름이 물매화가 아니었어도 맞는 순간 가까이 다가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요즘 저자 거리에서는 쉬 계절을 느끼지
못한다. 한겨울에 꽃의 여왕 장미가 넘쳐나고,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자랑하는 국화가 헤픈 향기를 풀어놓는다. 누가 딸기를 봄, 수박을 여름
과일이라 할 것인가. 딸기는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는 좀처럼 꽃눈을 머금지 않아서, 뿌리를 상자에 심고 겨울이 온 것처럼 속여 냉장시설에
넣었다가 온실에서 가온을 한다.
그런 것을 즐겨 먹어서 그런가. 요즘 철없는 아이와
어른들이 너무 많다. 아이들을 온실에 넣고 키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세상이 춥고 더운 줄도 모르고 세찬 바람을 견디는 법도 모른다. 그렇게
신산(辛酸)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 세상을 바로 사는 가치관을 지닐 수 있으랴.
이 가을 아이들을 데리고 오름으로 가자. 가서 물매화의
고매한 자태를 보여줘도 좋고, 끈질긴 생명력을 딛고 피어난 쑥부쟁이의 의연함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겨울이 되어,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찬바람을 맞으며, 눈 속에서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는 복수초나 너도바람꽃을 찾게 한다면 더 바랄 나위 없는 나들이가
되리라.
△ 이 글은 8월 20일자 '제주도청' 소식지에 실린 글입니다. 길이가 제한되어 있어
이런 모양이 되었습니다.
* 사진은 닭의장풀(달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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