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천년고도 시안 답사기 (11)
* 대안탑
♣ 여행 중에 거치는 상점
이제 서안에 온 지도 사흘째, 거처가 한 곳에 정해지고 행동반경이 넓지 않아서 거리의 풍경이 낯이 익어간다. 몇몇 건물과 광고판을 제외하고는 가로수라든가 거리가 눈에 익숙해졌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하지만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처음 수교 직전 중국 나들이 할 때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점 때문에 긴장했고, 가이드들도 많은 주의를 주었다. 사실이지 공안원 마음에 안 맞으면 하루 이틀 묶어놓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제 중국의 개방정책이 10년을 넘고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면서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심상하게 다니게 되고 그들이 모습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데서 가이드를 조종해 여행 팀들이 하루 한 번 꼭 거치게 되는 곳이 상점이다. 첫날 산에 가느라 못 가고 어제는 라텍스 제품 상점에 가서 부부 베개를 카드로 샀다.
그런 곳에 가보면 우리 한국 사람이나 중국교포들을 안내원을 두어 친절하게 상담을 해줘 안 사오기도 그렇고, 막 사는 것도 그렇고 곤란하다. 하지만 선진 관광지인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데서도 단체 여행객들을 상점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으니 이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물론 그곳은 쇼핑하러 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여행비를 낮추려고 경쟁하다가 얻은 결과다.
그래서 가서 사고 안 사는 것은 순전히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미안해 할 필요도 없고 투덜거릴 이유도 없다. 그냥 저냥 주는 차나 마시고 아이 쇼핑을 한다든가 가격이 맞을 경우 다른 곳에 가서 선물을 사려 말고 거기서 선물을 고르는 것도 좋다. 비단제품 공장에 들렀을 때는 싸고 좋은 제품이 다양해 식구들 선물을 하나씩 골랐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운영하는 가게에서는 비싼 약들이어서 하나도 못 사줘 섭섭하기도 했다.
* 대안탑이 있는 자은사 입구와 탑
♣ 자은사의 대안탑(大雁塔)
이제 서안의 상징이 된 대안탑은 자은사(慈恩寺)에 있는 커다란 탑으로 사흘 동안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때 멀리서 그 모습이 자주 보여 눈에 익숙해졌다. 대안탑(大雁塔, 따옌타)은 648년 당나라 고종(高宗, 628~683년)이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인 자은사(慈恩寺)에 있는데, 4각형의 7층탑으로 높이는 64m나 되는 누각식 탑이다.
‘대안(大雁)’이라면 큰기러기다. 이런 이름이 붙은 데는 재미있는 전설이 유래된다. 옛날 소승불교의 스님들은 육식도 하였는데, 어느 날 고기가 모두 떨어져 먹을 것이 없었다. 스님들은 부처님께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그게 통했는지 날아가던 기러기가 떨어져 스님들 앞에서 죽었다. 여기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은 이후 육식을 하지 않고, 그 깨달음을 항상 간직하기 위해 대안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저러나 이곳저곳을 다 거치다 보니 실상 우리가 보고 싶어 하던 자은사(慈恩寺)에 이르렀을 때는 대낮이었고, 짧은 시간에 그 넓은 절을 다 돌아보고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 차에서 내리자마자 표를 끊으러 가는 가이드를 따라가 시간을 정해 그 시간에 돌아오도록 강조하고는 셔터를 누르며 탑이 있는 곳까지 전진했다.
대안탑은 쉽게 눈이 띄어 용감하게 접근했지만 내가 찾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목표인 원측스님의 위패를 찾으러 해맸다. 대웅전의 뒤에 위패사당이 있고, 많은 위패 중에 신라에서 건너간 원측스님의 위패가 있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원측스님은 규기스님과 함께 현장법사의 제자로 6개 국어에 능통하여 경전의 번역작업에 크게 힘쓴 분이다. 그분의 사리는 서안 남쪽 흥교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 대안탑과 앞에 있는 현장법사상, 그리고 법당고현
♣ 현장법사, 그는 누구인가
현장법사는 보통 삼장법사로 통한다. 우리가 말하는 삼장법사(三藏法師)는 보통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西遊記)’를 떠올릴지 모르나, 원래는 불교 성전인 경장(經藏)과 율장(律藏), 논장(論藏)에 모두 정통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삼장 비구 또는 삼장 성사(聖師)라고도 부르며 줄여서 삼장이라고도 한다. 그 어려운 경전에 모두 정통한 법사란 극존칭인 것이다.
그러나, 이곳 중국에서는 인도와 서역에서 불경을 들여와 한자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역경삼장이나 삼장법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표격인 중국 최대의 번역승려인 현장에게 고유명사처럼 붙었던 것이다. 현장법사(玄獎法師, 602~664)는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여행을 하는 삼장법사의 모델이다.
10세 때, 뤄양(洛陽)의 정토사(淨土寺)에 들어가 13세 때 승적에 오른 인물로, 불교 연구에 힘쓴 그는 중국 전역을 돌며 곳곳에 있는 불교 관련 건축과 경전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큰 깨달음과 경전 연구를 위해 627년 인도로 떠났다. 그는 인도의 사원에 들어가 국빈급 대우를 받으며 경전 연구에 힘썼다.
근 20년이 다 되어갈 무렵인 645년 그는 경전과 연구물을 가지고 이곳 장안으로 돌아와 태종의 후원을 얻어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자로 번역했다. 또한 인도에서 보고들은 것을 정리한 기행문집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도 저술하여 중국 불교 연구에 공헌했다. 그의 유골은 당나라 때인 669년에 창건한 흥교사(興敎寺) 석탑과 묘탑에 안치돼 있으며, 그를 도운 고제규기와 신라의 원측을 기리는 측사탑이 나란히 서 있다.
♣ 대안탑과 소안탑
자은사의 구조를 보면, 한 줄로 쭉 늘어선 건물에다 각 문이 있고, 요소요소에 종루(鐘樓)나 고루(鼓樓)가 있고, 나머지 터에는 필요한 건축이 들어 서 있다. 커다란 향로에 한 묶음씩 태우는 매캐한 향내가 그 넓은 경내에 퍼진다. 대안탑은 현장법사가 17년간 인도를 다녀오면서 가져온 680여 건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보관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내용이 전한다.
“652년 법사는 단문 남쪽에 석불탑을 만들어 서역에서 가져온 경장을 안치하려고 했다. 기공에 임박해서 법사는 손수 삼태기를 들고 벽돌을 운반했다. 이렇게 2년이 걸려 이 탑은 완성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5층의 인도식 불탑이었다고 하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고 현재의 모습에서는 인도풍 불탑의 양식은 전혀 찾을 수 없는데, 1층의 한 변의 길이가 25m나 되며 층수가 높아질수록 그 폭이 좁아진다.
탑 내부로 올라가면 각층의 사면에는 아치형 창이 나 있고 맨 위까지 나선형 계단이 이어져 꼭대기에서는 시안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하나 시간이 없어 올라가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대안탑 뒤에는 2003년에 완공된 현장법사 기념관이 초현대식 설비를 갖추고 있다. 남문 입구 좌우에는 감실에는 제술랑이 직접 쓴 ‘대당삼장성교서’와 그 기록이 적힌 비석이 있다.
시간을 맞춰 나오면서 제대로 못 돌아본 아쉬움과 소안탑을 못 가는 아쉬움을 접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인연(因緣)이 없어 못 가는 소안탑(小雁塔, 샤오옌타)은 684년 당 고종이 죽은 후 헌복(獻福)을 하기 위해 지어진 유명한 불교 사원 천복사에 있다. 이 탑 역시 불교 경전의 번역과 보관을 위해 지어진 것으로, 당나라 승려인 의정 인도여행에서 가져온 56부 230권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보관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헌복사(獻福寺)였는데, 무측천 때 천복사로 이름을 바꿨다는데, 총 13층 높이에 43m 규모로 16세기에 일어난 지진으로 상부 2층이 붕괴되어 지금의 형태만 남았다 한다. 대안탑에 비해 곡선이 두드러진 게 특징이며, 대안탑과 마찬가지로 꼭대기에 오르면 시안 시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안탑은 대안탑과는 달리 어둡고 나무 계단이 좁고 낮기 때문에 많이 오르진 않는다고 한다.
* 시간이 없어 못 간 소안탑(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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