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역사기행] 제주의 향교를 찾아서 (2)

김창집 2005. 2. 17. 23:52

 

* 이 글은 '제주시'지 통권 제47호(2005)에 실린 것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소나무 숲이 우거진 제주향교

 

□ 지방유형문화재 제2호 제주향교
 
 제주향교 대성전은 문묘 안에 공자의 위패를 모셔놓은 전각으로 공자를 중심으로 오성(五聖) 공문십철(孔門十哲)과 송조육현(宋朝六賢) 및 우리 나라의 18현을 봉안하고 있다. 전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이전 당시인 순조 27년(1827)에 지어진 유일한 건물로 1872년, 1918년, 1976년 세 차례 중수했으며, 2000년에 이르러 크게 보수했다.  

 

 명륜당은 유학을 강학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강당인데, 1965년에 현 제주중학교 자리에 있던 것이 불타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모두 6칸으로 중앙의 중당이 2칸, 양익사(兩翼舍)가 각각 2칸씩으로 지은 소슬집이며 중당은 양익사보다 오가개부 높이가 높은 맞배지붕이고 양익사는 중당지붕보다 낮은 높이로 접속되었고, 와단쪽은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1년 콘크리트 건물을 해체하여 원형에 가깝게 개축되었다.

 

계성사는 오성의 위패를 보안하여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철종 5년(1854)에 상소로 창건되었는데, 전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74년에 국고보조금과 자체자금으로 크게 중수했으며, 1997년에 이르러 다시 개축했다. 그 외 중요 건물로 대성전 삼문과 계성사 삼문, 전사청이 있다. 전사청은 향교의 제사 업무를 맡아 수행하는 건물로 계성사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 제주향교 대성전 전경

 

□ 제주향교의 제향의례(祭享儀禮)

 

 국가적인 차원에서 향교를 중시한 이유는 유교 국가의 문묘제향적 기능이 있어서다.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는 모두 문묘를 설치해 전국의 선비들이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제를 지내고 춘추중중에는 석전대제를 지냈다. 문묘에 배향된 우리 나라의 유현은 18명으로 성리학 이전의 학자는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 두 사람이고 나머지 16명은 모두 성리학적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연마한 학자들로서 도통 연원에 따라서 문묘에 배향된다.

 

 제주민들도 과거라는 공식적인 관문을 통과해야만 양반으로 인정받는 중앙의 정책을 따랐지만 실제로 제주인들이 중앙에 진출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물론 제주인들을 위해 주기적으로 과거를 실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시험에 합격하여 명예를 얻은 것으로 그칠 뿐 실제로 등용되어 제주도를 떠나 한양 또는 다른 지방에서 관료생활을 한 경우는 드물었다. 따라서 과거에 응시 합격하였으나 실직을 받지 못한 자들과 과거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나 양반 가문 출신의 자제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 향교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이들에게는 향교에 출입한다는 사실 자체가 특권의 상징이었으며 다른 지방과는 달리 이들은 좌수·별감·풍헌 등의 향직을 독점하였다. 제주도의 경우 향직은 양반임을 상징하는 중요한 직역이다. 양반의 경우 중앙관직을 얻을 기회가 적고 과거를 통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향교의 직책과 향직을 중요시 여기고 신분유지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정의향교 수호사

 

□ 제주향교의 교관(敎官)과 생도(生徒)

 

 제주에서는 태조 3년(1394년)에 처음으로 도평의사사에서 건의하여 "제주에 교수관을 두어 토관(土官)의 자제를 교육시키고, 상경하여 시위(侍衛)하고 종사하는 자에게 천호(千戶) 등의 관직을 주도록"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편으로 교수관을 파견하는 일이 어렵게 되자, 정종 2년(1400) 이후에는 판관으로 하여금 교수를 겸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유생수가 증가하고 업무가 복잡하여져서 판관의 업무가 늘어났기 때문에 태종 18년(1418)에는 다시 교수관을 파견하고 정의·대정 향교도 아울러 담당하게 함으로써 문풍(文風)을 진작시켰다.

 

 직제를 보면 제주목은 교수 1인 훈도 1인이 있었고, 양현에는 훈도 각 1인 있어서 교훈을 담당하였다. 세종초 양현의 생도수는 각각 50여인에 이르렀고, 제주인 가운데서 학행이 뛰어난 자를 골라 교도를 삼아 가르치게 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향교 교생의 정원은 제주목이 90인, 정의·대정 양현이 30인이라고 했으나 제한이 엄격하지 않아 때에 따라 정원보다 적을 수도 있었으나 대체로 초과하는 예가 많았다.

 

 삼읍 향교와 각면에 훈장을 두어서 유생을 교육한 기록은 <남환박물>지에 나타난다. 제주·동중면·서중면·별방면·엄정면·애월면·예음비면과 대정·정의현에 각각 훈장을 두고 제주 277인, 정의 161인, 대정 42인의 유생을 뽑아서 초하루와 보름에 날마다 독서한 성적을 적어놓은 기록인 서도를 관에 바치게 하여 각각 상벌을 시행하였다.

 


 

* 정의향교 문명학원

 

□ 정의향교(旌義鄕校)로 가는 길

 

 역사 기행의 정의향교 부분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해 성읍민속마을로 차를 달린다. 그 이전에 향교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옛 홍로현(烘爐縣)인 지금의 서귀포시 서홍동(西烘洞)과 처음 정의현청 소재지였던 성산읍 고성리도 가 보아야 하겠지만 별다른 것이 남아 있지 않아 전문가가 쓴 글을 참고하기로 한다.

 

 1996년에 발간된 <남제주군의 문화유적>에서 강창언(姜彰彦)이 밝힌 바에 따르면,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에 '태조 8년(1408) 무자에 홍로읍에 향교를 세우니, 이것은 영주산 남쪽 향교의 효시다.'라는 기록과 홍로현 자리에 '향교가름'·'궁터'·'대궐터'라는 지명이 있어 건물지의 지표를 조사해본 즉, 어떤 건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갑석과 면석을 유실한 채 지대석만 남아 있는 기단부가 확인되었다. 이곳이 정의향교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주위에서 원통형 초석 3점과 기와편, 분청사기편, 백자편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태종 16년(1416) 산남을 정의현과 대정현으로 나누었을 때 현청 소재지였던 고성리에 정의향교가 처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 책에는 '성산읍에 있는 고성 내외를 조사한 바,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초석이 묻혀져 있는 경작지는 찾아내었는데, 이곳이 정의향교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적고 있다.

 


* 정의향교 동재

 

□ 성읍리에서도 몇 번 옮김

 

 서문 앞에다 차를 세우고 문을 지나 후문으로 정의향교로 들어갔다. 들어서면서 생각해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정착하기까지 이곳 성읍리에서도 몇 번 이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세종 5년(1423)에 정의현성을 이곳 옛 진사리(晉舍里)로 옮길 때는 현성 서문 밖에 창건되었으나, 그 후 몇 차례의 이전을 거쳐 헌종 15년(1849)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른 것이다.

 

 처음 서문밖에 있을 때는 대성전만 건립하여 오성위를 모신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1601) 10월 기묘에 '정의현성 안 북쪽에 황폐한 채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 위치를 알 수 있는 근거도 없고 현지 조사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학교등록>의 현종 1년(1660) 기록에는 정의·대정 고을의 향교가 모두 초가로 되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후 조선 숙종 29년(1703)에 완성된 이형상(李衡祥) 목사의 '탐라순력도'의 세 그림에는 지금의 위치에 대성전과 동·서무로 보이는 향교의 모습이 뚜렷이 나와 있다. 영조 14년(1738)에는 나억령(羅億齡) 현감이 서문 안 지금 대성전 북쪽으로 이건하고 명륜당과 동·서재를 지어 그 면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순조 9년(1809)년에는 여철영(呂喆永) 현감에 의해 북성쪽인 화원동(化源洞)으로 옮기려다 객사에 화재가 나 물러나는 바람에 후임 노상희(盧尙熙) 현감에 의해 이듬해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그 이후 헌종 15년(1849) 장인식(張寅植) 목사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까지의 과정은 나타나 있지 않다. 1914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었다가 1922년 들어 크게 보수하였고, 1967년에 다시 보수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정의향교 비석군

 

□ 제주 유형문화재 제5호 

 

 정문에는 대성문이란 현판 아래 '정의향교' 간판을 위시해 '성균관유도회 정의지부', '성균관유도회 청년회', '성균관유도회 여성회', '정의향교 문명학원'이란 간판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정의향교가 이 지방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정의향교의 배치를 보면, 대부분의 향교가 남향인데 비해 동향 구조로 되어 있고 대성전과 명륜당이 좌우로 나란히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집터의 형편상 부득이한 배치였을 것이다. 정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나라의 6현과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좁은 마당에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외로이 이를 지키고 서 있었다. 지난 2000년에 완전 해체 복원한 바 있다.

 

 명륜당 역시 동향을 하고 있는데, 정면은 5칸 전후좌후퇴(前後左右退) 집이고 팔작지붕이다. 수호사(守護舍)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의향교를 관리하는 곳으로, 귀기둥은 단면 모양의 사각형이고 평주들은 원형에 민흘림을 하고 있다. 수선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평상시에는 유림들이 사용하고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곳이다. 일제 때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동재는 1997년에 복원되었다.

 


 

* 정의향교 정문인 대성문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보관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켰던 정의향교 안에는 고목은 없으나 동백나무, 은행나무, 담팔수,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비자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과거 향교의 제전은 정의현 관내 여러 마을에서 참가하여 해마다 여러 차례 성대하게 치러졌었는데, 일제강점기 몇 해 동안은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공자탄일만 제를 지내도록 통제를 받다가 해방되자 풀렸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