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지리산 자락 답사 (4)

김창집 2002. 4. 6. 00:37
천년 사찰 화엄사와 천하 명당 운조루

▲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교학(敎學)의 도량

지리산의 길목 화엄사(華嚴寺)에 이르는 길은 주말, 이른 봄을 맞으려는 상춘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어제는 차편으로 성삼재에 올라서 노고단으로 갔지만 지리산을 제대로 종주하려면 이곳 화엄사를 거쳐 올라야 한다. 지리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싸 하지만 부드러움이 숨어 있는 맑은 공기가 몸을 엄습한다. 산이 깊고 그윽해서 절이 들어섰는지 절이 있어 분위기가 달라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이름난 절터는 어느 하나 명승 아닌 곳이 없다.

화엄사는 깊은 산 속에 있어서 전화(戰火)의 피해를 비교적 받지 않은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고이며, 신라 사찰 가운데서도 지리산에 맨 먼저 들어선 천년을 훨씬 넘긴 사찰이다. 우리나라의 3보 사찰로는 불(佛), 법(法), 승(僧)의 통도사(양산), 해인사(합천), 송광사(순천)를 손꼽지만 여기에 교학(敎學)을 덧붙인다면 4보로 화엄사가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벌써 관광지로 개발된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입구에 단지가 조성되어 넓은 주차장과 여관, 민박집, 음식점이 들어섰다.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우고, 선덕여왕 11년(642) 지장이 중창했다. 긴가민가했는데, 1979년에 발견된 '신라 화엄경 사경(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연기에 의해 창건된 절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룰 정도였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7년 만에(1630) 벽암 각성에 의해 중수되어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숙종 28년(1702) 장륙전이 중건되자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절로 들어서면서 맨 처음 눈에 띠는 것이 당간지주와 일주문이다. 화엄사의 경우 특이하게도 일주문이 2개 있는데, 매표소 근처에 새로 세운 일주문은 그 모양이 마치 어느 왕릉으로 들어서는 문 같은 느낌이 든다. 중창하면서 세운 게 틀림없다. 일주문(一柱門)은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며, ‘마음의 문’ 즉, 절 안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통일된 한 마음인 일심(一心)으로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일주문을 경계로 안쪽을 진계 바깥쪽을 속계라고 한다. 일주문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옛 일주문인 불이문(不貳門)에 이른다.

불이문은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에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이 문을 통과하면 속박을 벗고 자유자재한 해탈의 상태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닌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승속이 둘이 아니고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며, 중생계와 열반계가 둘이 아니라는 이치를 가르치는 문이기도 하다. 금강문과 천왕문을 거쳐 대웅전 앞 보제루를 돌아서면 비로소 화엄사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절을 답사할 때 느끼는 거지만 이런 기초가 되는 것들을 불교 신자가 아닌 분들에게 일러줘야 할 필요를 느낀다.

▲ 각황전, 석등, 세존사리탑 등 국보와 보물 창고

화엄사의 구조는 보통의 절집처럼 대웅전 앞에 2기의 탑이 있고 좌우로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나, 특이한 점은 대웅전보다도 높은 곳에 대웅전과 직각으로 서 있는 거대한 각황전(覺皇殿)의 모습에 있다. 국보 제67호인 이 건물의 이름은 본디 장륙전(丈六殿)이었는데, 새로 지으면서 숙종으로부터 이름을 하사 받아 사격(寺格)이 높아지고 결국 선교 양종 대가람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지리산 깊숙이 자리 잡아서 그런지 그 고풍스러움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각황전 앞에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석등 하나가 서 있는데, 국보 제12호로 높이 6.36m, 직경 2.8m에 이르는 대단한 크기의 석등이면서도 뛰어난 균형미를 갖추고 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아직도 그 형태가 완연한데 통일신라의 석조공예의 수준을 대변해주는 작품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의 각황전도 민간 건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 건물로 밖으로는 2층이나 속은 천장까지 통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절의 이름은 화엄경을 돌에 새긴 '화엄석경'을 이 건물 사방에 둘렀던 데서 유래한다.

각황전 마당 왼쪽으로 108계단을 오르니, 4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국보 제35호 세존사리탑이 있다. 화엄사 유적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7∼9세기에 축조된 초창기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유적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효성을 추앙하기 위해 공양탑 형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즉 석등의 공양인이 예배하는 연기조사이고, 그 대상이 사자탑의 가운데 서있는 그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탑 자체와 석등을 합쳐 효대(孝臺)라고도 불린다. 불심이 예술로 승화했다고나 할까, 당시 정 하나를 가지고 이처럼 숭고한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보제루는 승려와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집이다. 천왕문에서 보면 2층 누각이나, 건물을 돌아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집이다. 보제루를 돌아서면, 큰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 앞마당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있는데, 석축 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대웅전과 짝을 이룬 일금당 쌍탑 구조가 아닌 일금당 일탑구조, 동오층석탑은 남향한 대웅전과 서탑은 동향한 각황전과 각기 짝을 이룬 구조다.

동오층석탑에서 각황전을 마주한 채 올려다보고 있는 적묵당 또한 맞배지붕의 단아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그러나 천은사의 보제루처럼 조용히 앉아 경내를 둘러 볼 수 있도록 철책을 두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전이다. 보물 제299호로 지정될 만큼 고건축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 건물인데도, 더 당당한 위용을 갖춘 각황전으로 인해 조금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신세이다. 인생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옆에 훌륭한 것이 있음으로써 더불어 빛을 보는가 하면, 이처럼 손해를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산했다.


▲ 토지면 오미리에 자리한 명당 운조루(雲鳥樓)

화엄사에서 나온 일행은 쌍계사로 가기 위해 19번 국도와 나란히 흐르는 하동포구로 흘러가는 섬진강 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깨끗한 계곡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정경을 바라보노라니 복사꽃만 없지 무릉도원이 예 아닌가 싶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이 구례군의 장수촌이 널려 있는 곳이다. 지난여름 욕심을 부린 나머지 너무 여러 곳을 택해 무리했던 관계로 운조루를 빼었는데, 시간이 된다고 박 기사가 들러 가자고 한다. 토지면 오미리에 자리잡은 운조루는 1776년 무관 유이주(柳爾胄)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로 지금은 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다.

운조루의 옛모습은 그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1천여 평의 대지에 건평이 100평이 넘는 보기 드문 이 집의 전체 건물은 행랑채, 손님을 맞는 내사랑 귀래정, 주인이 거처하던 외사랑인 운조루, 안채와 안사랑채, 사당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운조루는 지리산의 좋은 나무를 골라 가려서 지은 집답게 재목이 듬직하다. 건축물 구조와 이들 가문이 소장한 여러 문서, 서화, 문구 등을 통해 조선 후기 호남지방 양반가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돼 있으나, 보수와 관리가 소홀해 점점 퇴색해 가고 있었다.

경상북도 안동 태생으로 낙안군수를 비롯하여 주요 지방 수령과 대규모 국가 건축의 책임자를 지낸 유이주라는 사람이 건축적 기본소양과 재력을 받침으로 창건한 것으로 금한낙지(천정에서 옥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의 명당에 99칸의 집을 짓고 그 일가들을 모여 살게 했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과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데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에서 첫머리인 운(雲)과 조(鳥)를 따온 것이다.

한편 운조루 창건 과정에서 운조루가 명당의 증거라는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집터를 닦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 서 어린아이의 머리 크기만 한 돌거북이 출도 되어 운조루의 터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을 입증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지난 1989년 도난당했다. 운조루가 아직까지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명당중의 명당에 집을 지었다는 것도 있지만 이 저택이 조선후기 건축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 유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고 기뻐했다. 유이주는 운조루 곁에 사촌동생인 유이익의 집 뿐 아니라 그의 맏형인 이혜의 집도 지었다. 이 집에 남아있는 문서에 따르면 구례로 처음 옮겨왔을 때 노비는 5명이었으며 용천부사를 지내고 경상도중군으로 있던 1786년 그 집 노비 숫자는 11명으로 늘었다. 풍천부사를 지내던 시절인 1792년의 노비는 9명이었고, 이듬해 재산 상속 문서에는 21명으로 늘었다. 당시 재산은 집이 78칸, 밭이 2.5결, 논이 26결이었다.


▲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함께 한 집안

오늘날 이 집안의 가대를 지키고 있는 유홍수 씨가 경작하는 밭이 12필지 3,004평(15두락), 논이 11필지 7,897평(39두락), 임야가 18필지 96,292평(32정보), 대지가 4필지 1,772평이므로 전답이 조금 줄었다고 하겠다. 유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그의 집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여러 채가 연결되어 점자 모양을 갖춘 이 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누마루채 및 방마다에 당호와 방의 별칭이 붙어 있으나 전체를 일러 '운조루'라 한다. 후손들은 유이주를 '삼수공'이라 부른다.

구례 금환락지의 풍수적 형국은 지리산의 주봉 노고단에서부터 그 신령스러움이 흘러오는데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노고단의 용이 천황치에서 건너편 왕시루봉 줄기와 어우러져 섬진강을 끌어안은 모습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이고 안산(案山)으로는 강 건너 오봉산이 머리를 조아리며 춤을 추는 모습. 구례에서 금환락지를 찾아가기 바로 전 마을이 장수촌으로 이름난 상사리와 하사리인데 도선국사가 이곳 모래밭에서 우리나라 산천 모습을 그려 놓고 공부하여 풍수지리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쳤다는 곳이다.

금환락지는 또 다섯 가지가 아름답다 하여 오미동(五美洞)이라 불렀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들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족하며, 풍토가 윤택하여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좋은 터전인데다 관청과의 거리도 멀어 관리의 횡포로부터도 안전하였고, 난세에는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몸을 숨길 수도 있는 곳이었기에 혹자들은 이곳을 가리켜 두 마리의 학이 춤추고 있는 쌍학지지(雙鶴之地) 청학동으로 일컫기도 했다.

구름 속에서 학이 노닐었다는 운조루 누마루는 주인을 잃은 지 오래고, 아흔아홉 칸 집 마나님이 거처했던 안채도 집안일을 돌볼 수 없는 부족한 일손 탓인지 버려져 있다. 대청마루에는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고 기둥마다 적혀 있는 삼강오륜의 문구들도 세월의 무게를 어찌하지 못하고 남루해졌다. 사람의 자취가 끊긴 옛 방들은 들어가 보면 헛간처럼 퀘퀘하고 을씨년스러울 뿐 위세 높았던 운조루 대갓집의 면모는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운조루의 역사를 더듬어 가다 보면 절로 머리 숙여 경건해진다. 흥망성쇠가 있게 마련인 세상의 순리대로 자신들이 누려온 부를 이곳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줄 줄 아는 그런 넉넉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조루 집안이 몰락하게 된 것은 일제 식민통치의 토지조사 사업으로 대부분의 농토를 빼앗기고부터이다. 이는 곧 호남지역의 권문세가였던 이 집안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거부하고 지조를 지킨 것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지주들이 친일파가 되어 일족의 부와 권세를 축적하였던 사실과 비교하면 운조루의 몰락은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그 길을 함께 한 지사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2002. 2. 23.>


<사진> 위는 운조루 전경이고, 아래는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화엄사의 모습인데, 왼쪽에 높게 2층으로 보이는 것이 각황전, 오른쪽에 넓고 조금 높게 보이는 것이 대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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